전체메뉴

검색
팝업창 닫기
이메일보내기

역사 부침에 ‘죽었다 부활한 군대’ 아십니까?…바로 ‘무적 해병대’[이현호 기자의 밀리터리!톡]

軍경제적 운용 명분, 해병대사령부 해체

해군통합 14년간 해병대 관리문제 속출

해체 14년 만에 해병대사령부 재창설돼

4월15일 대한민국 해병대 창설 75주년

김일성과 생일 같은 ‘귀신 잡는 해병대’

유신정권 출범 직후인 1973년 10월10일 해병대사령부 연병장에서 사령부 해체 및 사령관 전역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다. 사진 제공=해병대사령부




“해병대는 한 번 죽었다가 부활한 독특한 군대입니다.”

지난 2019년 4월 대한민국 해병대 창설 70주년 기념 국제심포지엄에서 이갑진 전 해병대사령관이 한 발언이다. 해병대가 해체돼 10여 년 동안 해군과 통합된 상태로 있다 다시 독립한 역사를 거론한 것이다.

이 전 사령관의 ‘해병대는 한 번 죽었다’는 표현은 유신정권 시절인 1973년 10월10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해병대사령부를 전격 해체하고 해병대를 해군에 통합시킨 조치를 뜻한다.

해병대는 6.25와 월남전을 통해 ‘무적 해병대’, ‘귀신잡는 해병’, ‘누구나 해병이 될 수 있다면 나는 해병이 되지 않았다’ 등의 자부심 넘치는 명성을 떨쳐왔다.

건군 이후 최초의 파병 전투부대로 1965년 10월 해병대 청룡부대(제2여단)는 베트남 땅을 밟았다.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전선에서 시작된 귀신잡는 해병의 신화는 이곳에서도 계속됐다. 1972년 2월 귀국 때까지 6년 4개월 동안 여단급 작전 66회와 대대급 작전 109회, 소부대 작전 15만1347회를 통해 적 사살 9619명, 포로 및 귀순 1256명 등의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베트남전에서 ‘귀신잡는 해병’의 전설을 쓰고 귀환한 해병대 청룡부대 용사들을 맞은 것은 ‘사령부 해체’라는 날벼락이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1973년 9월14일 국무회의에서 해병대를 해군에 흡수해 통합시키고 해병대사령부를 해체하는 내용의 국군조직법 개정안 의결했다.

4성 대장 계급에서 해군참모총장 부하로


한국전쟁을 1년 앞둔 1949년 4월 경남 진해 덕산비행장에서 소규모 병력으로 창설된 지 24년 만에 공중분해된 것이었다. 해병대 창설 당시 국방부는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의 지리적 여건을 감안할 때 상륙작전을 수행할 부대가 필요하다”고 밝히며 해병대 창설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해병대 창설 배경은 1948년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상륙작전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1949년 4월 15일 초대사령관 신현준 중령을 비롯한 380명의 소수 병력으로 창설됐다. 창설 이듬 해 6·25전쟁이 발발하자 해병대는 장항·군산·이리 지구 전투를 시작으로 진동리 지구 전투, 통영 상륙작전, 인천 상륙작전 및 수도 서울 탈환작전, 도솔산 지구 전투, 장단·사천강 지구 전투 등 수많은 전투에서 명성을 높이며 ‘귀신잡는 해병’, ‘무적 해병’의 애칭을 얻었다.

이처럼 주요 전장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해병대는 창설 24년만에 4성(星) 대장 계급의 사령관직은 중장으로 하나 낮아지고 해군참모총장의 부하인 제2참모차장이 됐다, 해병대의 이름은 해군해병이 됐다. 한국전쟁의 전세를 뒤집은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 베트남전에서 세계 전사(戰史)에 빛나는 전공을 세운 해병대의 명예와 자존심이 무참히 구겨진 것이다.

정부는 ‘경제적 군의 관리 운영’이라는 이름으로 해병대사령부를 해군에 통합시켰다. 해병대사령관이라는 직책은 사라지고 해군 제2참모차장(중장) 체제라는 기형적인 구조로 해병대가 운영된다. 그러나 전력 관리·지휘구조의 문제점이 노출되자 1987년 11월 해병대 부대를 통합 지휘할 해병대사령부가 재창설됐다.

예비역 해병중장인 이 전 사령관의 발언은 이 같은 해병대 역사의 아픔 부분을 지적한 지적한 것으로 “해병대는 역사의 부침 속에서 한 번 죽었다가 부활한 독특한 역사를 지닌 군대”라며 “해병대의 가치를 계속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조직가치의 양면성 인식’, ‘사람 중심의 가치 조성’, ‘가치 실천체계 구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연합뉴스


우리가 모두 알고 있듯이 해병대는 6·25 전쟁에서 북괴군을 쳐부수며 엄청난 존재감을 발휘했다.

주요 승리한 전투를 살펴보면 △장항·군산·이리지구 전투(1950년 7월15∼21일) △진동리지구 전투(1950년 7월31일∼8월13일) △통영 상륙작전(1950년 8월17일∼9월22일) △경인지구 작전(1950년 9월15일∼10월7일) △북진·철수·재반격 작전(1950년 10월∼1951년 6월) △백령도 등 전략도서 확보작전(1951년 2월14일∼1953년 7월27일) △김포지구 전투(1951년 3월7일∼1953년 7월27일) △도솔산지구 전투(1951년 6월4∼20일) △김일성·모택동고지 전투(1951년 8월31일∼9월3일) △장단지구 전투(1952년 3월17일∼1953년 7월27일) 등에서 큰 공을 세웠다.

이들 전투 중에 미국 ‘뉴욕헤럴드트리뷴’ 신문의 여성 종군기자인 마가렛 히긴스가 본국에 타전한 기사를 통해 우리 해병대를 ‘귀신도 잡을 수 있는 부대’라고 크게 격찬한 것이 바로 ‘통영 상륙작전’이다. 여기서 유래가 돼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표어가 오늘날 해병대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1965년 9월에 청룡부대(2여단)를 창설해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청룡부대의 해외파병은 국군 전투부대로서는 처음이다. 파병 6년 4개월 동안 ‘짜빈동 전투’ 등 수많은 전투에 참전해 높은 전공을 세웠다.

하지만 유신 직후인 1973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국가 자립경제 발전을 위해 경제적으로 군을 관리·운영해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해병대 해체를 지시했다. 군 안팎에서는 이는 명분에 불과하고 실상은 해병대가 날로 성장하자 육군 장성 출신인 박 전 대통령이 이를 견제하려 한 것이란 해석이 지배적이다.

육군출신 군사정권 해병대 탐탁치 않아해




일각에서는 1961년 5·16 쿠데타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김동하 예비역 해병중장과의 갈등이 근본 원인이란 해석도 나온다. 김동하 장군은 1963년 “군이 정치 전면에 나서지 말고 그만 민간에 정권을 이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박 전 대통령의 미움을 사고 심지어 ‘반혁명분자’로 몰려 옥살이까지 했다.

여러 가지 추측이 많지만 어찌됐든 역사의 부침 속에 1973년 10월10일 해병대사령부는 침울한 분위기 속에 사령부 해체 및 제9대 사령관 이병문 장군의 전역 기념행사를 열었다. 동시에 해군본부에 제2참모차장(중장) 직제를 신설해 역시 참모총장의 해병부대 지휘·감독을 보좌하도록 했다. 해군본부에 인사, 군수참모부 등과 나란히 ‘해병참모부’가 생겨 해군참모총장의 참모 역할을 하는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주목할 필요가 있는 점은 해병대가 해군에 통합돼 운영된 시기는 육군 장성 출신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군사정권의 권위주의 통치가 지배한 시기라는 것. 이 때문인지 유신정권에 이어 등장한 전두환 신군부의 5공화국 정권도 해병대를 탐탁치 않게 여긴 것은 마찬가지로, 역시 육군의 많은 견제를 받으며 해병대의 위상은 곧두박질 치고 있는 형국이었다.

민주화 직후인 1987년 11월1일 14년 만에 부활한 해병대사령부 연병장에서 사령부 재창설 및 사령관 취임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다. 사진 제공=해병대사령부


그러나 기회가 왔다. 1987년 6월 항쟁과 6·29 선언으로 민주화의 꽃이 활짝 핀 그해 11월1일 해군에서 독립한 해병대사령부가 다시 창설됐다. 1986년부터 해군 제2참모차장으로 재직하던 박구일 해병중장이 14년 만에 부활한 해병대의 새 사령관으로 취임하며 무적 해병대의 위상 재정립이 시작됐다.

현행 국군조직법 제2조 제1항은 “국군은 육군, 해군 및 공군으로 조직하며, 해군에 해병대를 둔다”고 규정하고 있다. 다만 해병대를 해군 소속으로 하지만 “해병대사령관은 해군참모총장의 명을 받아 해병대를 지휘·감독한다”(10조 3항), “해군참모총장에게 위임된 사항 중 해병대에 관하여는 해병대사령관에게 권한을 재위임할 수 있다”(15조 3항) 등 규정을 따로 둬 해병대의 독립적 지위를 보장하고 있다. 이 덕분에 해병대사령관은 합참의장, 육·해·공군참모총장 등과 나란히 합동참모회의에 참석하는 멤버가 됐다. 3성 장군 중에 서열 1위다.

군의 한 소식통은 “해병대의 지휘 및 관리의 실질적인 권한은 계속 해군참모총장에게 주어짐으로써 해병대 지휘권의 미비, 사기저하, 누적된 피해의식 등 많은 문제점이 야기돼 왔다”며 “결국 해군에 14년간 통합운용된 해병대가 전력관리에서 문제점을 드러내 상륙작전에 관한 지휘구조를 개선할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해병대사령부를 재창설하게 된 것으로 안다”고 했다.

이후 해병대는 2019년 창설 70주년을 전후로 많은 변화와 위상을 재정립하고 있다. 우선 2007년 해병대 항공부대 창설을 계획해 해병대 항공조종사를 선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0여 년이 지난 2018년 해병대 상륙기동헬기 마린온 1호기를 전력화하면서 해병대 항공부대 창설과 ‘공지기동’(空地機動) 해병대의 꿈을 실현시켰다.

2008년 2월 20일에는 한미 해병부대 역량의 통합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연합해병구성군사령부(CMCC)를 창설했다. CMCC는 한국 해병대 부대와 지정된 미 해병대 부대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행사한다. 단순 지원사령부에 머물러 있던 한국 해병대사령부가 연합해병구성군사령부의 일원으로 작전사령부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상승불패 해병대’ 용맹함 전 국민이 신뢰


2010년 11월 23일에는 연평도에 대한 북한의 기습 공격으로 ‘연평도 포격전’이 발발했다. 당시 연평부대 해병들은 적의 포격에 맞서 추가도발 의지를 분쇄하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또 연평도 포격전 이후엔 적에 대한 정보·감시자산·타격 수단이 강화된 별도의 작전사령부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2011년 6월 15일 서북도서방위사령부 창설로 이어졌다. 이에 따라 육·해·공군 전력을 운용하는 전군 유일의 합동작전사령부로서 해병대 주도 아래 합동 전력을 운용하며 전·평시 서북도서 방어임무를 수행 중이다.

이 뿐이 아니다. 2015년 12월 1일에는 제주도 해병대 9여단이 창설됐다. 이로서 해병대는 서북도서-제주도-울릉도 등 한반도의 전략도서를 방어하는 작전사령부로서 그 작전 수행 영역이 확장되면 국가전략기동부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2016년 5월에는 1개 연대상륙단을 1신속기동부대로 지정해 군사적 위협상황에 대비하고 있다. 2018년 2월에는 1개 연대상륙단을 2신속기동부대로 추가 지정해 국가적 관리가 필요한 비군사적 재난에 가장 먼저 투입되고 임무를 완수할 체계를 갖췄다.

특히 2018년에는 상륙부대의 눈과 귀 역할을 하는 해병대 특수수색대를 창설했다. 가장 최근에 창설된 특수전 부대로 과거에 해병대 수색대로 불리면서 존재했다. 그러다 2018년 5월 당시 해병대사령관이었던 전진구 중장의 주도로 추진해 사령부 직할부대로 개편됐다. 기존의 병 위주의 수색대의 한계와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간부 위주의 작전부대가 필요하다고 보고 특수수색대를 창설했다. 국가단위 특수작전에 투입되며, 기존 해병수색대의 임무를 비롯한 군 대테러특수임무대 임무도 수행한다.

향후 해병대는 신형 상륙장갑차와 대형 상륙함, 공격헬기 등 핵심 전력을 확보하고 공지기동형으로 부대구조를 확대 개편된다. 이를 통해 전면전 뿐 아니라 비군사적 안보위협까지 담당하는 국가안보의 핵심전력으로 우뚝 서겠다는 목표로 오늘도 완벽한 임무 수행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4월 15일은 대한민국 해병대의 창설 75주년이다. 특이하게 이 날은 북한의 김씨 일가 1대(김일성)와 생일이 같다. 김일성 사후 북한은 4월 15일을 북한은 최대 명절 중에 하나인 ‘태양절’(김일성 생일)로 지정해 축하 열병식이 열리곤 했다.

물론 해병대사령부를 비롯해 서북도서와 김포·강화, 포항, 제주도 등에 위치한 해병대 전 부대도 이날 창설기념행사를 갖고 창설 75주년의 의의를 되새긴다. 앞으로도 완벽한 전투준비태세를 갖춰 연평도 포격전에서 보여준 불타는 포진지 속에서 즉각 대응사격에 나선 ‘상승불패 해병대’의 용맹함을 계속 보여줘 전 국민이 사랑하고 신뢰하는 해병대로 영원히 자리매김 하길 바란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

서울경제를 팔로우하세요!

서울경제신문

텔레그램 뉴스채널

서울경제 1q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