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한 항암제를 투여해 암세포를 죽이는 항암화학요법은 암환자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다. 항암치료 부작용으로 머리카락과 눈썹이 빠지면 자존감이 낮아지고 사회생활도 크게 위축된다. 암환자가 ‘냉각모자’(쿨링캡)를 쓰면 머리카락이 덜 빠지는 것은 물론 더 굵어지는 등 탈모 방지에 도움 된다는 국내 연구 결과가 나왔다.
삼성서울병원 혈액종양내과 안진석·암교육센터 조주희·임상역학연구센터 강단비 교수 연구팀은 냉각모자가 항암치료로 인한 탈모를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5일 밝혔다.
암환자의 머리가 빠지는 건 항암제의 특정 성분이 모낭세포와 피부세포를 파괴하기 때문이이다. 특히 유방암을 포함한 부인암 치료에 주로 사용되는 도세탁셀, 독소루비신, 파클리탁셀 등의 항암제가 탈모를 잘 일으킨다. 환자들에게는 항암치료 종료 후 6개월 정도 지나면 회복한다고 교육되고 있지만 유방암 환자의 42.3%는 항암치료 3년 후에도 이전의 모발 상태로 돌아오지 못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모발량이 어느 정도 회복됐더라도 모발 굵기는 항암치료 이전의 절반 정도에 머물러 있는 경우도 많았다.
연구팀은 냉각모자를 쓰면 혈관이 수축돼 두피로 가는 혈액순환이 느려지고 모낭세포를 망가뜨리는 항암제의 영향도 줄어든다는 점을 확인했다. 이를 바탕으로 냉각모자를 쓴 환자는 머리카락이 다시 날 때 더 건강한 모발이 자라날 것이란 가설을 세웠다.
사실을 검증하기 위해 2020년 12월~2021년 8월 사이 유방암 1~3기로 진단돼 치료 받은 139명을 대상으로 무작위 대조군 임상시험을 진행했다. 항암치료 전후 2시간 동안 냉각모자를 사용한 환자 89명과 그렇지 않은 50명(대조군)을 상대로 지속 탈모 여부, 모발의 양과 굵기, 스트레스를 비교하는 방식이다. 냉각모자는 머리가 닿는 부분에 매립된 관을 따라 냉각수가 일정 온도로 순환하면서 두피 열을 내리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연구 결과 냉각모자를 쓴 환자군의 13.5%만 항암치료 6개월 후에도 모발의 양과 굵기가 회복되지 않는 '지속 탈모'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대조군은 절반이 넘는 52%가 지속 탈모를 경험했다. 연구 시작 당시 두 집단 간 모발 굵기는 차이가 없었지만 항암치료를 받으며 모발의 건강 상태는 확연히 달라졌다. 흥미로운 사실은 냉각모자를 쓰지 않은 채 항암치료를 받았던 대조군은 6개월 새 모발 굵기가 7.5μm 감소한 반면 냉각모자 사용군은 오히려 1.5μm 증가했다는 점이다. 항암치료로 빠진 머리카락을 가리려고 가발을 착용하는 환자 비율도 차이를 보였다. 냉각모자군에서 항암치료 종료 6개월 후에 가발을 착용한 환자는 17%로 대조군(32%)의 절반 수준에 그쳤다. 탈모 스트레스도 냉각모자군에서 유의미하게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
암환자를 위한 냉각모자는 미국식품의약국(FDA), 유럽의약품청(EMA)의 허가를 받고 항암치료의 보조적 요법으로 쓰이고 있다. 국내에서 냉각모자의 탈모예방 효과를 입증한 연구가 나온 건 이번이 처음으로 현재 신의료기술 등록 절차가 진행 중이다.
안 교수는 “냉각모자를 착용하면 모낭 손상이 덜하고 항암치료 후 머리카락이 다시 날 때 빨리 나고 굵은 모발이 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을 입증했다”며 “탈모는 환자의 삶에 다양한 영향을 주기 때문에 이런 부분까지 포함해 암치료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번 연구 결과는 암연구 분야 저명한 국제학술지인 ‘임상종양학회지’ 최근호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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