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대통령 자리를 두고 한 판 승부를 벌이게 됐다. 3일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서 최종 대선 후보로 선출되면서다.
최근 그는 ‘꼿꼿문수'로 불린다. 윤석열 정부 고용노동부 장관 시절 국회에 출석해 12.3 비상계엄에 대한 사과 요구에도 머리를 숙이지 않아 생긴 별명이다. 윤 전 대통령의 지지층이 그에게 열광하는 이유다.
그 길로 김 후보는 보수 진영에서 차기 대권 다크호스로 부상했다. 오랜 기간 침묵을 깨고 지난달 8일 국무회의를 마지막으로 장관직에서 사퇴한 그는 다음날인 9일 대선 출마를 공식화했다.
김 후보는 스스로를 좌·우 이념을 아우르는 다양한 경험 속에서 살아왔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동시에 중도 확장성이 약하다는 평가 속에 순탄치 않은 경선 과정을 통과했다. 부동의 1위를 이어오던 지지율의 부침도 겪었다.
아직 숙제는 남았다. 한덕수 전 국무총리와의 단일화다. 김 후보는 꾸준히 반(反) 이재명 빅텐트와 후보 단일화를 외쳐온 만큼 다시 한 번 지지자들의 선택을 받게 됐다. 보수 진영 구원투수 격으로 등판한 한 전 총리와의 단일화가 어떤 형태로 끝 맺을 지 관심이 쏠린다.
국민의힘 최종 대선 후보로 선출된 김문수, 그가 걸어온 길을 살펴봤다.
전태일 열사 분신…김문수 노동운동에 투신하다
“상당한 충격이었다”
김 후보가 대선 출마를 공식화한 이튿날인 지난달 10일, 첫 행선지인 서울 종로구 전태일기념관에서 열사의 분신을 두고 그가 한 말이다.
1970년 열사의 분신을 계기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는 김 후보는 대학시절 학업을 뒤로하고 공장 노동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공장 생활을 7년 이상 했다는 그는 수 차례의 해고로 공장을 옮겨 다녔다고 한다.
김 후보는 “재단 기술을 배워 공장에 들어갔더니 한 달 하고 해고를 당해 다른 곳에 갔더니 일주일도 되지 않아 또 잘렸다"며 “일을 하지 않아 해고를 당한 것이 아니라 초등학생들이 많았던 공장에서 성인인 내가 그들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었다”고 말했다. 당시 만연했던 미성년자 노동 착취와 근로기준법 미준수 현장을 꼬집은 것이다.
공장 생활을 하며 당시 우리 노동 현장의 현실을 직시한 김 후보는 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을 교육하는 한편 노조 활동을 이어갔다.
생전 전태일 열사와의 친분은 없던 그였지만 1984년 설립한 전태일기념사업회 초대 사무국장을 맡기도 했다. 노동운동을 이어가던 김 후보는 1985년도에는 서울노동운동연합을 설립하고 이듬해 5.3 인천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2년 6개월의 옥살이까지 하게 된다.
‘마르크스-레닌주의자'가 보수 정당으로…김문수, 36년 정치 인생 시작
운동권에선 이미 유명인사였던 김 후보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영입으로 민주자유당에 입당하며 보수 정치인으로 깜짝 변신했다.
입당 4년 전인 1990년 이재오 전 의원 등과 민중당을 창당하며 정치권에 이미 발을 들인 그이지만 보수 정치인으로의 탈바꿈은 세간의 경악을 자아냈다. 노동운동에 투신하던 시절 ‘마르크스-레닌주의자'였지만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의 붕괴를 목격하면서 ‘자유’가 가장 중요한 가치라는 것을 알게 됐다는 것이 전향에 대한 김 후보의 설명이다.
이후 1996년 김 후보는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연이어 같은 지역구인 부천 소사에서 3선에 성공한 그는 2006년 경기도지사에 당선됐으며 2010년 재선에 성공하며 행정가로써 시민들에게 다가섰다.
尹 부름 받다…논란 끝 고용노동부 장관 임명
두 번째 경기도지사직을 마무리하고 물러난 김 후보는 총선(대구 수성구)과 지선(서울시장)에 도전했지만 연이어 고배를 마셨다.
이후 김 후보는 자유통일당을 창당하며 대표를 맡는 등 정치적 영향력을 놓치지 않기 위해 활동했다. 이 과정에서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와의 관계에 대한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다.
그런 그를 윤석열 전 대통령은 지난 2022년 9월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으로 발탁했다. 과거 격렬한 노동운동의 거두로 불린 김 후보였지만 이후 행적은 노동계의 궤적과 사뭇 달랐던 탓에 경사노위 위원장 임명이 정치권과 노동계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후 2024년 윤석열 정부 두 번째 고용노동부 장관에 임명되며 윤 정부와의 밀착 행보를 가속화한다. 계엄 직후인 지난해 12월, 대정부질문에 고용노동부 장관으로 참석한 김 후보가 서영교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국무위원 전원 사죄 요구에도 요지부동한 장면이 보도되면서 ‘꼿꼿문수’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계엄 선포 자체에는 반대하면서도 대통령 탄핵은 격하게 반대했던 그는 윤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을 흡수하며 국민의힘 유력 대선 주자로 부상했다. 결국 ‘반탄파’ 주자로 당심을 얻으며 제21대 대선 국민의힘 최종 후보가 됐다.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 약력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대구 경북고등학교와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을 계기로 노동운동에 뛰어들면서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을 지낸 그는 5.3 직선제개헌투쟁으로 옥고를 치렀다. 1990년 노동운동 세력과 민중당을 창당하고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1994년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영입돼 민주자유당에 입당하고 1996년 15대 국회부터 신한국당·한나라당 소속으로 3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두 번의 경기도지사와 윤석열 정부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과 고용노동부 장관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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