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국채와 달러·주식이 동시에 하락하는 ‘트리플 약세’가 이틀째 이어지면서 4월 초 상호관세 충격에 따른 ‘셀 아메리카’ 현상이 재연될 수 있다는 우려가 고개를 들고 있다. 이번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감세 정책이 트리거가 됐다. 관세정책 여파로 물가가 오르고 미국 경기가 둔화할 것이라는 전망 속에 연방정부의 재정적자와 부채 증가세가 가속화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면서 미국 자산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는 흐름이 포착되는 것이다.
마켓워치에 따르면 21일(현지 시간) 30년물 미국 국채금리는 5.09%에 거래되며 전 거래일보다 12bp(1bp=0.01%포인트) 급등했다. 이는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기준금리가 22년 만에 최고점을 찍었던 2023년 10월 말 이후 1년 6개월 여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심리적 저항선으로 여겨지는 5%를 넘은 것은 물론 장중 한때 5.1%를 넘기기도 했다. 글로벌 국채 벤치마크인 10년물 미 국채금리도 12bp 급등한 4.605%를 기록하며 올 2월 12일(4.629%) 이후 3개월여 만에 4.6%선을 넘어섰다. 국채금리는 가격과 반대로 움직이며 이날 국채금리 상승 폭이 컸다는 것은 그만큼 시장의 매도세가 거셌다는 의미다.
이날 국채금리 상승의 기폭제는 미국 재무부가 실시한 20년 만기 국채 경매의 흥행 실패다. 재무부는 이날 총 160억 달러 규모의 20년 만기 신규 발행 국채를 시장에 매각했지만 낙찰 수익률은 5.047%로 높았다. 최근 여섯 차례 평균치였던 4.613%를 크게 웃돌았고 입찰 직전 시장 수익률보다도 11bp 높았다. 투자 수요가 약해 투자자들의 채권 매입을 유도하기 위해 더 높은 이자(프리미엄)를 줘야 했다는 뜻이다. 이날 경매는 16일 무디스가 미국 신용도를 낮춘 후 처음으로 실시된 국채 경매라는 점에서 시장은 미국 국채 수요를 확인하는 시험대로 여겼다.
무엇보다 트럼프 대통령의 대규모 감세 법안 드라이브가 국채금리를 끌어올렸다는 평가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7년 시행한 감세안을 연장하고 팁 소득에 대한 비과세 등을 담은 법안 통과를 핵심 국정과제로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시장에서는 해당 법안이 가뜩이나 불어난 재정적자를 더 악화시킬 것으로 것으로 보고 있다. ‘책임 있는 연방예산위원회’는 법안 시행 시 2034년까지 공공부채가 최소 3조 3000억 달러 늘어나고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 비율도 현재 100%에서 125%까지 높아질 것으로 추산했다. BMO 캐피털마켓의 금리 전략가 이안 링겐은 “시장이 정책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국채 시장을 통해 판단한다면 30년물 수익률의 급등은 분명히 우려할 만한 신호”라고 설명했다.
달러 가치와 주가도 동반 하락했다. 12일 미중 무역 합의 이후 소폭의 등락을 거듭하던 뉴욕 증시는 이날 뚝 떨어졌다. 다우존스30산업평균지수가 1.91% 떨어지는 등 3대 지수가 모두 1%대 하락했다. 6개국 주요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지수는 전날 100.12에서 99.56으로 떨어졌다. 이달 7일 이후 약 2주 만에 100선 아래로 내려왔다.
전문가들은 이번 자산 매도세가 미국 자산에 대한 글로벌 투자자들의 장기적인 외면 신호일 가능성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도이체방크의 외환 전략 책임자인 조지 사라벨로스는 달러 약세를 가장 우려되는 대목으로 꼽으며 “미국 자산 투자에 대한 외국인투자가들의 파업 신호이자 미국의 재정 리스크를 보여주는 분명한 신호”라며 “이를 풀 수 있는 것은 연준이 아니라 오직 의회”라고 지적했다.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 회장은 이날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행사에서 블룸버그TV와 인터뷰를 갖고 “(연방정부가 재정) 적자 문제를 서둘러 해결해야 한다”며 “달러의 단기적인 변동은 걱정하지 않지만 사람들이 (재정적자 문제로) 달러 자산 투자를 줄일 수 있다는 점은 분명히 이해하고 있다”고 짚었다. 이어 관세정책에 따른 물가 상승을 언급하며 “우리는 스위트 스폿에 있는 게 아니다”라고 사실상 스태그플레이션의 가능성을 경고했다.
현재로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감세 정책에서 후퇴할 가능성은 낮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이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감세 법안 통과의) 경제적·정치적 이해관계는 엄청나다”며 “감세 법안이 부실해진다면 수백만 명의 유권자들의 시선이 무역정책의 경제적 파장으로 집중될 수 있다”고 전했다.
한편, 미 하원은 22일 트럼프 대통령의 감세 법안을 통과시켰다. 상원으로 넘어간 법안은 간소화된 예산 조정 절차로 통상의 60표 이상(총 100석 중)이 아닌 단순 과반(51표)만으로도 통과 가능하지만, 현재 공화당 내 여러 상원의원들이 법안 수정을 요구하고 있어 진통이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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