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극복을 위한 구조 개혁 조치는 조기에 과감하게 취해져야 한다.’ (1998년 2월 9일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 전문 일부)
90개 이행 사항을 담은 2·6 노사정 대타협은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 여야 정당 대표까지 참여한 노사정위원회가 발족된 지 약 한 달 만에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노사정위원회는 3차 본회의 만에 구조조정 방안, 실업 대책 등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10대 의제를 채택했다. 이 과정에서 26회의 난상 토론과 밤샘 협상이 있었다. 국회는 2·6 대타협 이후 8일 만에 임시국회를 열고 합의 사항에 관한 법률을 개정해 신속한 정책 실행을 도왔다.
김대중 정부가 마주한 당시의 경제 상황은 처참했다. 외환보유액이 39억 달러까지 급감해 국가 파산 위기였고 기업들의 줄도산으로 대량 실업이 발생했다. 이 같은 상황 속에 이뤄진 2·6 노사정 대타협은 역대 정부의 유일한 ‘노사 빅딜’로 평가된다. 초유의 경제위기 속에서 기업 경쟁력과 사회안전망을 동시에 높이는 구조 개혁을 단행한 것이다. 정리해고제 도입, 파견법 법제화, 노동조합 활동 보장(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 등 노사 양보 없이 추진할 수 없는 과감한 개혁안이 여기에 담겼다.
전문가들은 이재명 정부가 마주한 경제 현실이 IMF 때만큼 녹록지 않다고 진단한다. IMF 위기가 외화 유동성 부족에서 비롯됐다면 지금은 고금리, 내수·수출 부진에 더해 성장의 활로까지 잃어버린 복합 위기 상황이다. 8년 전 3%대였던 잠재성장률은 1%대까지 추락했으며 경제를 지탱해온 반도체·배터리 등 주력 기술은 중국에 따라잡혔다. 정부 부채가 양호하다지만 1800조 원에 달하는 가계부채는 우리 경제를 짓누르고 있다. 김민석 국무총리 후보자도 앞서 “28년 전 IMF 때는 큰 경제적 추세가 상승이었는데 지금은 경제적 추세 자체가 하강과 침체 상태”라고 우려했다. 이런 가운데 정년 연장, 청년 취업난, 주4.5일제, 주52시간제, 노란봉투법까지 성장과 직결되는 노사 현안이 수두룩하다. 김희성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IMF에 비견되는 현 경제 상황에서 노사정은 대승적 차원에서 양보하고 산업과 노동 구조의 체질 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대중 정부의 2·6 노사정 대타협을 돌아보면 불가능한 얘기가 아니다. 당시 대타협을 빅딜로 부를 수 있는 것은 노사가 각각 원하는 노동기본권 보장과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가 ‘주고받기’ 식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노동기본권을 보면 노동조합의 활동 여건이 대폭 개선됐다. 심지어 노조의 정치 활동을 보장한다는 ‘논쟁적 합의’까지 이뤄졌다. 반면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의 핵심은 경영상의 이유를 해고 요건으로 인정하는 정리해고제 도입이다. 기업이 더 쉽게 인력 충원이 가능하도록 파견근로가 법제화를 통해 고용시장으로 들어왔다.
기업 구조조정과 동시에 사회안전망 구축이 이뤄진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대타협 협약은 10대 의제에 90개 항목으로 구성됐는데 제1 추진 과제는 기업 입장에서 경영권과 직결된 경영 투명성 확보와 구조조정 촉진이었다. 정부가 채권은행과 대기업 재무구조 개선에 주도적으로 나서는 합의가 이뤄졌다. 동시에 실업급여 혜택을 늘리고 퇴직·실직 근로자 생계를 지원하는 실업 대책들이 합의안에 대거 포함됐다. 당시 실업 대책 재원으로 5조 원이 책정됐는데 이는 현재 가치로 약 9조 5000억 원에 이른다. 대타협을 통해 확립된 사회안전망 강화 기조는 2000년 국민기초생활보장제 도입으로 이어졌다. 이 제도는 저소득 국민의 최저 생활과 자립을 지원하는 필수 안전망 역할을 한다.
하지만 한국 경제 재도약의 발판이 된 ‘노사 빅딜’은 이후 정권에서 사실상 명맥이 끊겼다. 노사정 사회적 대화 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는 1998년부터 2017년까지 노사정 대타협 사례를 김대중 정부와 이명박 정부(2009년 2월 13일)에서 단 두 차례 이뤄졌다고 평가한다. 그나마 이명박 정부 때 합의는 파업 자제, 일자리 유지 등 선언적 합의에 그쳤다. 2015년 9월 15일 박근혜 정부에서 이뤄진 노사정 합의는 입법에 실패하고 사실상 폐기됐다. 당시 합의는 정부가 사회안전망 강화보다 노동시장 유연화에 무게를 두고 일방적으로 추진하다가 노동계의 강한 반발에 부딪쳤다.
반면 이재명 정부는 노동 존중과 실용적 시장주의를 동시에 내걸면서 노사·노정 대화를 이끌기에 이전 정부보다 수월할 것이라는 기대가 커지고 있다. 더구나 김대중 정부처럼 경제위기 극복이 최우선 과제로 놓여 있다. 국회 지형은 여대야소여서 김대중 정부보다 입법에도 더 유리하다. 노동학계에서는 노동 개혁의 가장 큰 성공 요인으로 대통령의 리더십을 꼽아왔다. 최영기 전 한국노동연구원 원장은 “현재 위기는 마치 ‘냄비 속 개구리’처럼 강도가 낮아 인식이 늦을 뿐이다. 김대중 정부 때처럼 노사정은 물론 정치권이 주도적으로 나서야 한다”며 “노사 현안들은 패키지 딜(사안별 합의로 전체 일괄 타결)이 유효한 합의 수단”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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