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재판 기일이 연기됐다. 법원이 다음 기일을 따로 정하지 않는 ‘기일 추후 지정’ 결정을 내린 만큼 사실상 이 대통령 취임 기간 해당 재판이 열리지 않게 된 셈이다. 법조계에서는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외에도 이 대통령이 받고 있는 4건의 재판도 줄줄이 연기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 나온다. 야당인 국민의힘은 재판부의 결정에 대해 ‘사법부의 굴복’이라고 강하게 비판했고 더불어민주당은 법원 결정을 환영하면서도 이른바 ‘재판중지법’으로 불리는 형사소송법 개정을 예정대로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대통령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을 담당하는 서울고등법원 형사7부(재판장 이재권)는 이달 18일로 예정됐던 이 대통령의 파기환송심 기일을 변경하고 추후 지정했다고 9일 밝혔다. 기일 추후 지정은 공판기일을 변경·연기하거나 속행하면서도 다음 기일을 따로 정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재판부는 이번 결정에 대해 “헌법 84조에 따른 조치”라고 설명했다. 헌법 제84조는 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제외하고는 재직 중 형사상 소추를 받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법조계에서는 이 조항이 당선 이후 발생한 사건에만 적용되는지, 당선 전에 기소된 사건도 포함되는지를 놓고 의견이 엇갈렸지만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당선 이전 기소된 사건에 대해서도 재판을 정지할 수 있다고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 결정으로 이 대통령의 다른 사건을 심리 중인 재판부들도 파기환송심 재판부와 유사한 판단을 내릴 가능성이 커졌다. 앞서 대법원이 지난달 14일 국회에 제출한 답변서에서 “헌법 제84조의 적용 여부는 해당 사건을 심리하는 재판부 판단에 달려 있다”고 밝혔지만 민주당이 재판중지법을 추진 중인 상황에서 재판부가 굳이 논란을 키울 수 있는 기일 지정을 할 가능성은 크지 않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외에도 △대장동·위례·백현동 개발 특혜 의혹 및 성남FC 후원금 사건 △위증교사 항소심 △쌍방울 대북 송금 △경기도 법인카드 유용 의혹 관련 재판을 받고 있다. 이 가운데 대장동 재판은 이달 24일, 대북 송금과 법인카드 유용 사건은 각각 다음 달 1일과 22일에 공판준비기일이 있다. 위증교사 항소심은 지난달 20일 예정이던 기일이 연기된 후 ‘추후 지정’ 상태다.
한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는 “재판부별로 판단은 독립적일 수 있지만 현 상황에서 사법부가 쉽게 재판을 진행하기는 어려워 보인다”며 “진행 여부에 대해 법적 검토가 더 신중하게 이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 다른 법조계 관계자는 “현재 민주당이 추진 중인 형사소송법 개정안은 사실상 이 대통령 1인을 위한 법안으로 위헌 소지가 많다”면서도 “일단 법이 제정되면 헌법재판소의 판단이 나올 때까지 재판부는 재판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서울고등법원의 이번 기일 연기 결정에 정치권 반응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을 통해 “스스로 사법부 독립을 꺾은 서울고법의 오늘 결정은 대한민국 사법부의 역사에 큰 오점으로 남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 전 대표는 “헌법 84조는 대통령의 직무집행과 무관하게 임기 시작 전에 이미 피고인의 신분에서 진행 중이던 형사재판을 중지하라는 조항이 아니다”라며 “헌법에도 반할 뿐만 아니라 법원 독립을 근본적으로 해치는 잘못된 결정은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나경원 국민의힘 의원은 “법원이 드디어 이 대통령에 무릎 꿇었다”며 “오늘의 사법부의 태도는 대한민국 헌법의 후퇴 선언이다. 대한민국 헌정사에 ‘사법의 정치 예속’이라는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고 비판했다. 권영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바람이 불기도 전인데 법원이 알아서 누워버린다”며 “법치주의의 최후 보루인 법원이 이러니 앞일이 걱정”이라고 말했다.
반면 민주당은 법원 결정을 환영하면서도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이르면 이달 12일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한다는 방침이다. 이 개정안은 대통령 당선 시 피고인의 형사재판을 중지하도록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개정안을 대표 발의한 김용민 민주당 의원은 “기일 변경 결정을 환영한다”면서도 “이와 별개로 각종 개혁 과제는 중단 없이 추진될 것”이라고 밝혔다. 조승래 민주당 수석대변인은 “재판이 중단됐다는 판단은 개별 재판부가 아니라 법원의 해석에 따라야 한다”며 “헌법 정신에 대한 자의적 해석이 계속된다면 법 개정을 보류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정청래 법제사법위원장도 이날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12일에 통과시키자고 박찬대 원내대표 등과 회의를 했다”고 설명했다. 또 현재 14명인 대법관 수를 30명으로 늘리는 내용의 법원조직법 개정안에 대해 “개인적으로 12일 본회의에서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