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원화 스테이블코인과 관련해 중앙은행의 적극적인 개입을 예고했다. 스테이블코인은 기존 외환시장 규제를 우회할 수 있어 금융 시스템의 안정성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게 이 총재의 판단이다.
이 총재는 12일 열린 한은 창립 제75주년 기념식에서 “원화 표시 스테이블코인은 법정화폐의 대체 기능이 있다”며 “외환시장 규제를 우회하지 않도록 제도적 방안을 마련해 관계기관과 긴밀히 협의해나가겠다”고 말했다. 이 총재가 원화 스테이블코인 법제화와 관련해 개입 의지를 시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동안 이 총재는 “화폐의 대체재인 스테이블코인을 비은행 기관이 마음대로 발행하면 통화정책 유효성을 상당히 저해할 수 있다”며 우려의 목소리를 내왔으나 이번에는 제도화 과정에서 한은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점을 공식화한 셈이다.
한은의 이 같은 입장 표명은 새 정부 출범 이후 원화 스테이블코인 논의가 급물살을 타는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이 과거 국내 최대 블록체인 투자사인 해시드 산하 싱크탱크 ‘해시드오픈리서치’ 대표 시절부터 강조해온 스테이블코인 활성화 전략이 민간 주도 모델을 전제로 짜여 있기 때문이다. 제도 설계 역시 금융위원회가 주도권을 잡을 것이라는 시각이 우세한 상황이다.
한은은 통화 주권과 관련된 문제에서 민간 주도 체제에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다. 현재 법정통화 발행으로 생기는 주조 수익(시뇨리지)은 정부 세입에 반영되는 식으로 공공 목적에 활용된다. 하지만 향후 스테이블코인 발행이 대규모로 확산될 경우 국가에 귀속되고 사회에 환원돼야 할 자원이 민간에 집중될 수 있다는 게 한은의 문제의식이다.
향후 통화정책 방향에 대해서는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이 총재는 “올해 경제성장률은 0.8%로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코로나19 위기를 제외하면 지난 30년간 가장 낮은 수준이어서 경기 부양 정책이 시급해졌다고 보고 있다”며 “지난해 10월 이후 네 차례 기준금리 인하를 통해 경제 활력을 제고하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단순한 경기순환 요인이 아닌 구조적 요인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총재는 “어느 정도의 경기 부양이 적절한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낮은 성장률을 단순히 경기순환의 관점뿐만 아니라 구조적인 시각에서도 평가해볼 필요가 있다”면서 “급하다고 경기 부양 정책에만 과도하게 의존할 경우 사후적으로 더 큰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역성장의 배경인 저출생과 고령화, 높은 수출의존도 같은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금리 인하만으로는 경기회복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금리를 내려도 근본적인 성장 잠재력 회복과는 거리가 있다는 뜻이다.
이 총재는 특히 시차를 두고 나타나는 금리 인하 부작용에 주목했다. 그는 “기준금리를 과도하게 낮추면 실물경기 회복보다 수도권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이어질 우려가 크다”며 “손쉽게 경기를 부양하려고 부동산 과잉투자를 용인해온 과거의 관행을 떨쳐내야 한다”고 했다. 아울러 그는 미국의 금리 인하 속도가 더 늦어질 경우 내외 금리 차로 환율이 다시 반등할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 총재는 그동안 한은이 우리나라 경제의 구조적 문제를 진단하고 거점도시 육성, 대학 지역별 비례선발제, 퇴직 후 주택연금 활용, 지식서비스산업 전략적 육성 등의 해법을 제안했다고 소개했다. 미래 도전 과제 측면에서 디지털 혁신과 인공지능(AI) 확산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한은의 노력 또한 강조했다.
한편 이 총재는 ‘주권 AI’ 도입도 예고했다. 그는 “우리나라는 자국 언어 기반하에 소버린 AI를 개발하고 있는 소수의 국가 중 하나”라며 “한은 역시 이런 변화 흐름에 부응하기 위해 국내 업체가 구축한 소버린 AI를 기반으로 한은에 특화된 AI를 개발해 올해 하반기에 도입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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