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3월 검찰이 서울 론스타코리아 사무실을 전격 압수수색했다. 미국계 사모펀드(PEF)인 론스타가 외환은행 매각으로 4조 원 넘는 차익을 챙겨 나간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나라가 발칵 뒤집혔을 때다. ‘먹튀 논란’으로 국민들의 분노가 커지고 여론이 악화하자 검찰이 수사에 나섰고 감사원도 헐값 매각 의혹 재조사에 나섰다.
2005년에는 해외 투자은행(IB)인 골드만삭스가 진로 부실채권 투자로 큰 수익을 거둔 것을 겨냥해 국세청이 세무 조사에 착수했다. 검찰 수사와 국세청 세무조사 등 당국의 파상 공세에 글로벌 금융 공룡들은 크게 반발했고 파이낸셜타임스(FT) 등 해외 언론들은 금융 허브를 추진하는 국가가 외국 자본을 차별하는 ‘정신분열증 행태’를 보이고 있다고 비난했다. 2003년 출범한 노무현 정부가 야심 차게 내세웠던 ‘동북아 금융허브’ 계획이 무너져내리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2003년 발표된 동북아 금융허브 추진 로드맵에는 글로벌 50대 자산운용사의 아시아 지역 본부를 다수 유치하고 2020년에는 홍콩·싱가포르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아시아 금융 중심지로 만들겠다는 계획이 담겨 있었다.
세계 주요 도시의 금융 경쟁력을 보여주는 국제금융센터지수(GFCI)에서 2020년 기준 서울은 세계 16위였다. 뉴욕과 런던이 각각 1·2위를 차지했고 상하이·도쿄·홍콩·싱가포르는 각각 3·4·5·6위였다. 이는 금융허브 계획의 목표 시점이었던 2020년 아시아 금융 중심지의 꿈이 어떤 결과로 이어졌는지 보여준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달 17일 캐나다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국가 전반의 인공지능(AI) 대전환을 추진해 아태 지역 제1의 ‘AI 허브’를 구축하겠다”며 올해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글로벌 AI 협력의 비전과 이행 방안을 제시할 것이라고 소개했다. 이 대통령의 1호 대선 공약은 ‘AI 3대 강국’ 달성이다. 이를 위해 100조 원 규모 AI 펀드 조성 계획도 내놓았다. 취임 연설에서는 “AI·반도체 등 첨단산업에 대한 대대적 투자와 지원으로 미래를 주도하는 산업 강국으로 도약하겠다”고 강조했고 울산 데이터센터 출범식에서는 “AI 고속도로를 구축하겠다”고 말했다.
이재명 정부의 AI 3대 강국 진입 포부는 20여 년 전 노무현 정부의 아시아 금융허브 계획을 떠올리게 한다. AI 3대 강국 진입은 규제 혁파와 정부의 세제·재정 등 전방위 지원 속에 인재 육성과 기술 개발 및 전력 확보 등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다. AI는 승자가 시장 전체를 지배하는 속성이 강한 만큼 초격차 기술 개발을 위한 연구개발(R&D) 투자를 대폭 확대해야 한다. 또 기업들이 R&D에 집중할 수 있도록 주52시간 근무제 예외 적용 등 노동 유연성을 높여줘야 한다. 이 대통령이 강조한 AI 고속도로 계획을 현실화하려면 안정적인 전력망도 구축해야 한다. 경제성은 물론 간헐성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재생에너지 중심의 에너지 정책에 치중해서는 달성하기 쉽지 않다.
이재명 정부가 AI허브 꿈을 이루려면 금융허브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맥킨지 글로벌연구소 소장을 지냈던 리처드 돕스는 금융 허브 전략이 성과를 내지 못한 이유를 분석하며 “금융을 하나의 산업으로 인정하고 각종 규제들을 풀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미래의 속도’라는 책에서 과거보다 훨씬 빨라지고 있는 미래의 속도에 대비하지 않으면 국가와 기업들이 신산업 경쟁 대열에서 도태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정부가 ‘관치’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시장 개입을 일삼으면 해당 산업의 발목을 잡게 된다.
AI는 잠재성장률 하락 위기에 직면한 한국 경제를 재도약으로 이끌 수 있는 신성장 동력이다. 미국·중국 등 주요국들이 앞다퉈 규제를 완화하며 AI 주도권 경쟁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는 것은 AI 산업의 경쟁력이 국가 경쟁력과 직결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K팝 그룹 ‘방탄소년단(BTS)’과 드라마 ‘오징어 게임’, 영화 ‘기생충’의 성공 배경에는 민간 기업의 역동성과 창의성이 자리 잡고 있다. 이재명 정부는 AI 관련 기업들이 기업가 정신과 창의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줘야 한다. 빈번한 노사 분규 등 노조 리스크와 정치적 불확실성 등 외국인 투자를 가로 막는 각종 장애물들을 걷어내는 노력을 통해 ‘신산업 생태계’를 활성화해야 AI 허브의 꿈을 실현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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