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귀 질환은 발생 빈도가 낮지만 사회 전체로 보면 결코 소수의 문제가 아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등록된 희귀 질환만 1300여 종에 이르며 환자와 가족을 합치면 수십만 명이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재명 정부는 희귀 질환을 국가가 책임져야 할 공공과제로 규정하고 환자와 가족의 삶을 지키는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사회적 지원을 받으려면 희귀 질환으로 진단받아야 한다. 대부분 희귀 질환은 발병 초기에 증상이 모호해 다른 질환으로 오인되기 쉽고 불필요한 검사와 진료를 반복하다 보니 정확한 진단까지 평균 수년이 걸린다. 이 과정에서 치료 시기를 놓친 환자는 돌이킬 수 없는 장애를 얻게 되고 가족은 감당하기 어려운 경제적·심리적 부담을 떠안게 된다. 따라서 희귀 질환은 조기 진단이 곧 생명을 지키는 길이며 사회적 비용을 절감하는 최선의 해답이다.
우리나라는 신생아 선별검사를 시행하고 있는데 국민적 수용성이 높은 대표적 공공의료 성과 중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검사 항목이 선천성 대사이상 질환과 난청으로 제한돼 있어 아직도 수많은 희귀 유전 질환은 조기 진단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최근 과학기술은 희귀 질환 조기 진단의 새로운 길을 열고 있다. 수일 내 저비용으로 전장유전체 분석이 가능해지면서 많은 희귀 질환의 발병 원인이 규명되고 진단율도 높아지고 있다. 한 번의 분석으로 수천 개의 유전자를 동시에 확인할 수 있어 불필요한 검사와 진단 지연을 줄이고 치료 가능성이 있는 환자를 조기에 발견할 수 있다.
실제로 영국 보건부는 10만 명의 신생아를 대상으로 한 유전체 선별검사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며 치료할 수 있는 200여 종의 희귀 질환을 조기 선별하는 체계를 마련했다. 미국 역시 ‘BabySeq Project’를 통해 신생아 유전체 선별검사가 기존 검사보다 높은 진단율과 조기 개입 효과가 있음을 확인하고 다양한 인종·사회적 배경을 가진 대규모 집단에서 유전체 검사의 실용성과 파급효과를 검증하기 위한 대규모 후속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제 한국도 유전체 기반 신생아 선별검사 도입을 본격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무엇보다 과학적 근거가 확실하다. 다수의 국제 연구에서 전장유전체나 전장엑솜 분석을 활용한 선별검사가 기존 검사보다 진단율과 정확도가 높고 조기 개입을 통해 치료 효과까지 향상된다는 점이 입증됐다. 한국은 이미 세계적 수준의 유전체 분석 인프라와 데이터 해석 역량을 보유하고 있어 의료 현장 도입의 토대가 마련돼 있다.
경제적 타당성 또한 크다. 희귀 질환 환자와 가족이 감당해야 하는 고비용 치료와 돌봄 부담을 줄일 수 있으며 장기적으로 볼 때 사회적 편익이 훨씬 크다. 조기 치료는 불필요한 검사와 입원을 줄여 건강보험 재정에도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온다. 국립보건연구원은 현재 유전체 기반 신생아 선별검사를 위한 시범 사업을 진행 중이다. 이는 한국형 유전체 검사 모델을 개발하고 실제 의료 서비스 체계에 적용하기 위한 과학적 근거를 축적하는 중요한 시도다.
물론 해결해야 할 과제도 존재한다. 어떤 질환을 선별 대상으로 삼을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중요하다. 전문가들은 치료나 예방이 가능한 질환에 국한될 필요가 있다고 하는 반면 더 많은 정보를 요구하는 이들도 있다. 검사와 해석의 표준화도 필요하다. 첨단기술이고 아직도 발전해가는 기술인 만큼 현장 적용을 위한 관리가 필요하다. 특히 개인정보 보호와 데이터 활용의 균형이 중요하다. 환자와 가족의 권리가 침해되지 않도록 철저한 보안과 윤리적 관리가 전제돼야 하지만 유전체 데이터는 연구와 진단을 발전시키는 소중한 자원이기도 하다. 재정 부담도 문제다. 단기적으로는 비용에 대한 우려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조기 진단은 불필요한 치료와 입원을 줄이고 사회적 비용을 경감시켜준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도 이제 유전체 기반 신생아 선별검사를 본격적으로 도입할 준비를 해야 한다. 기술은 이미 성숙돼 있으며 남은 것은 정책적 결단과 사회적 합의다. 조기 진단을 통해 희귀 질환자들이 치료 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하는 것은 국가가 반드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책무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