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중국·러시아 3국 정상이 중국 전승절 80주년 열병식을 계기로 66년 만에 나란히 서서 세(勢)를 과시한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또 다시 전 세계에 주둔한 미군의 철수·재배치를 시사해 동맹·우방국을 긴장케 했다. 이를 두고 집권 1기 때부터 주한 미군 등의 가치를 방위비라는 돈으로만 계산하는 인식이 현재까지 이어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현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의 본토 방어, 중국의 대만 침공 대비를 안보의 최우선 과제로 삼는 가운데 한국 등 다른 동맹국들에는 각자도생의 부담을 더 지우려는 게 아니냐는 분석이다. 각국의 방위 부담이 늘수록 최첨단 군사 장비를 압도적으로 보유한 미국이 무기 판매 수익을 얻을 기회도 그만큼 늘게 된다. 분단 국가인 한국의 경우 가뜩이나 중국 전승절을 기점으로 한반도 안보 위협 수위가 높아진 상황에서 미국의 군사력 지원 여부에 따라 금융시장도 요동을 칠 수밖에 없다. 외교 전문가들은 한국 정부가 아직 날아오지 않은 미국의 방위비 청구서를 대비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미군 재배치 움직임을 주시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트럼프 “폴란드에서는 미군 안 빼…다른 나라는 생각 중”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3일(현지 시간)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카롤 나브로츠키 폴란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자리에서 ‘미군이 폴란드에 남느냐’는 질문을 받고 “그렇다”고 대답했다. 폴란드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으로 약 1만 명의 미군이 주둔하는 미국의 동맹국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폴란드가 오랫동안 더 많은 미군을 원했고 원한다면 더 많은 군인을 두겠다”며 “우리는 매우 특별한 관계이고 미군은 폴란드에 남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제는 트럼프 대통령의 이후 발언에서 불거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는 폴란드에서 군인을 없앤다는(remove) 생각조차 한 적이 결코 없다”면서도 “다른 나라들에 대해서는 이를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 등 폴란드의 외의 국가에 대해서는 미군의 완전한 철수나 감축, 병력 재배치를 고려하고 있음을 시사한 셈이다. 이날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베이징 톈안먼광장에서 열린 중국 전승절 80주년 열병식에서 우호를 과시한 직후였다.
현재 한국에는 주한미군이 2만 8500명가량 주둔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5일 이재명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하는 과정에서는 ‘주한미군 감축을 고려하느냐’는 질문에 “우리는 친구이기 때문에 그걸 지금 말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들 돌렸다. 그러면서 주한미군이 사용하는 기지가 위치한 부지의 소유권을 갖고 싶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폴란드의 미군 문제에 보인 자세와는 상당히 대비되는 대목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폴란드에 주둔하는 미군 감축 문제에 대해 단호한 거부 의사를 표시한 것은 최근 우크라이나 종전 작업이 차질을 빚은 영향으로 풀이된다. 푸틴 대통령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의 담판을 차일피일 미루자 해당 지역 미군 강화 메시지로 압박을 넣은 것으로 해석된다. 나토는 폴란드가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의 4.12%를 국방비로 쓴 것으로 추산했는데 이는 나토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이다. 폴란드는 올해 국방비 지출 비중 목표를 4.7%로 잡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폴란드는 나토 회원국으로서 내야 하는 돈보다 더 많이 낸 2개 국가 중 하나”라며 “그건 매우 좋은 일”이라고 평가했다. 나브로츠기 대통령은 회담 후 취재진과 만나 “폴란드 내 미군 숫자를 늘리는 데 성공할 것이라 확신하지만 우리는 그 절차를 막 시작했다”고 말했다.
美 본토 방어, 中 대만 침공 최우선…北 위협엔 한국 주도 요구
트럼프 대통령이 각국에 배치된 미군에 대한 철수·감축·재배치 가능성을 거론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1기 때부터 “미국이 ‘부자나라’를 보호하고 있다”며 동맹국들을 수차례 압박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2020년 한국에 50억 달러(약 7조 원) 수준의 방위비 분담금을 요구하며 70년 역사상 처음으로 주한미군 한국인 근로자 4000명에 무급 휴직을 강제했다. 글로벌 동맹과 안보 관계를 미국의 지출로만 계산한 결과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2기에 들어서도 중국의 위협에만 집중하며 다른 동맹국의 안위엔 최대한 손을 떼겠다는 태도를 유지했다. 주요 외신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 3월 ‘임시 국방 전략 지침’에서 중국의 대만 침공 대비, 미국 본토 방어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러면서 북한, 이란 등 다른 위협 요인에는 동맹국들에 그 대응을 대부분 맡기기로 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동맹 관계 재설정 작업 핵심 인사로 꼽히는 엘브리지 콜비 국방부 정책차관도 7월 31일 엑스(X·옛 트위터)에 글을 올리고 같은 날 이뤄진 한미 국방장관 통화를 평가하며 “한국은 북한에 맞선 강력한 방어에서 더 주도적 역할을 기꺼이 맡는 것과 국방 지출 면에서 계속 역할 모델이 된다”고 썼다. 콜비 차관은 “미국과 한국은 지역 안보 환경에 대응하며 동맹을 현대화할 필요에 있어 긴밀히 연계돼 있다”며 “우리는 공동의 위협을 방어할 준비가 된, 전략적으로 지속가능한 동맹을 만들기 위해 한국과 계속 긴밀히 협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이 국방비를 더 써서 북한을 방어하는 데 한층 더 주도적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공동의 위협’은 북한보다는 중국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됐다. 콜비 차관은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국방부 전략 및 전력 개발 담당 부차관보를 지낸 인물로 2기부터는 미국을 최우선에 두는 새 국방전략(NDS) 수립을 주도하고 있다.
하워드 러트닉 상무부 장관은 지난달 26일 CN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방위 산업에 관해 엄청난 논의가 있다”며 미국 정부가 방산 업체 지분을 인수해 향후 무기 판매 수익을 직접적으로 누릴 수도 있음을 암시했다. 러트닉 장관은 “록히드마틴은 매출 97%를 미국 정부에서 만들기에 사실상 정부의 한 부문”이라며 “국방부 장관과 부(副)장관은 그 일을 맡고 있고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李대통령엔 “미군 문제 나중에 말하자”…韓, 내년 국방비 8.2% 先증액
트럼프 행정부의 방위비 증액 요구가 눈앞으로 다가오자 한국은 내년 국방비를 미리 증액해 잡았다. 국방부는 지난 2일 내년 국방비를 올해보다 8.2% 많은 66조 2947억 원으로 책정했다. 트럼프 1기 행정부 시절인 2019년(8.2%) 이후 7년 만에 국방비를 최대폭으로 증액했다. 이 대통령이 25일 트럼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뒤 “국방비를 증액하겠다”고 밝힌 데 따른 조치다. 국방부는 또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로 미국의 동맹국들이 국방비를 GDP의 3.5%로 늘리려는 움직임에 맞춰 2035년까지 이 수치에 도달할 수 있는 계산 결과를 도출했다. 국방부에 따르면 한국은 매년 7.7%씩 국방비를 늘려야 2035년 GDP의 3.5% 수준에 도달한다. 이는 내년부터 한국의 명목 GDP가 연 평균 3.4%씩 성장한다고 가정한 수치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탈퇴 발언까지 서슴지 않으며 나토 회원국에도 국방비를 크게 늘릴 것으로 요구한 바 있다. 이에 나토 회원국들은 2035년까지 직접 국방비를 GDP의 3.5%로, 간접비를 포함한 국방비는 GDP의 5%까지 늘리기로 최근 합의했다. 미국은 일본에도 방위비를 GDP의 3.5% 수준으로 끌어올리라고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기간부터 중국의 군사 위협을 받는 대만에도 “미국에 보호비를 내라”며 국방비를 GDP의 10%까지 늘리라고 압박했다.
리아노보스티 통신에 따르면 마리야 자하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은 4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동방경제포럼 브리핑에서 지난달 실시된 한미 연합 군사훈련인 ‘을지 자유의 방패(UFS)’ 훈련을 강하게 비판했다. 자하로바 대변인은 “수만 명의 병력이 참가하고 미군의 F-35 전투기와 다른 공격용 군사장비들이 동원됐다”며 “훈련의 주최 측에서 내놓은 공식 입장과는 달리 이 훈련은 어떤 방식으로든 방어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北인권보고서는 반토박…북핵 용인 가능성도
북한의 한반도 안보 위협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무관심은 지난달 12일 미국 국무부가 발간한 ‘2024 국가별 인권보고서’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미국 국무부는 북한 인권보고서에서 “북한 정부는 사형, 신체 학대, 강제 실종, 집단 처벌을 포함한 만행과 강압을 통해 국가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했다”고 평가하면서도 지난해 4월 공개된 ‘2023 국가별 인권보고서’에는 있던 북한 정치 체제에 대한 비판을 제외했다. 이는 마코 루비오 국무부 장관이 다른 나라 선거 제도의 정당성이나 공정성에 대해 평가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린 까닭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나온 보고서는 북한의 부정부패 문제를 지적하면서 “주민들이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통해 정부를 선택할 수 없으며 당국이 야당을 허용하지 않는다”고도 지적한 바 있다.
올해 발표된 북한 관련 인권보고서는 분량과 구성도 크게 줄었다. 이번 보고서는 북한 인권 상황을 생명, 자유, 인간 안보 등 3개 항으로 구성해 7개 항이 있던 전년도 보고서보다 단촐해졌다. 분량도 지난해 53장에서 25장으로 감소했다.
이와 관련해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 국무부 군축·국제안보 차관을 맡았던 로버트 조지프 전 차관은 지난달 5일 워싱턴타임즈재단 주최 한반도 안보 관련 온라인 세미나에서 “북한이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을 중단할 의향이 없는데 미국이 이에 굴복할 가능성이 있어 핵무장한 북한과 더불어 살아갈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조지프 전 차관은 “북한이 (핵탄두) 200기를 보유하든, 400기를 보유하든 간에 미국은 (북한 핵탄두의) 10배나 많이 보유하고 있어 억제할 수 있기 때문”이라며 “실제로 북한의 핵 보유를 용인하자는 논의가 정부 안에서 이뤄지는 것을 본 적은 없지만 미 국방부의 일부 인사가 핵무장한 이란과는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음을 시사한 건 봤다”고 주장했다. 존 델러리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도 같은 자리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대북 외교에서 비핵화 진전보다는 북한의 대러시아 군사 지원 중단과 핵무기 동결을 실질적 목표로 삼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앞서 김여정은 7월 29일 대미 담화를 통해 “우리 국가의 불가역적인 핵보유국 지위와 근본적으로 달라진 지정학적 환경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며 “새로운 사고를 바탕으로 다른 접촉 방식을 모색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촉구했다. 그러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은 자기의 현 국가적 지위를 수호함에 있어 그 어떤 선택안에도 열려 있다”며 “우리 국가 수반과 현 미국 대통령 사이의 개인적 관계가 나쁘지 않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고 주장했다. 비핵화를 더 이상 대북 안건으로 다루지 않는 조건으로 트럼프 대통령과 서둘러 만나고 싶다는 뜻을 내비친 담화였다. 김정은은 4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시 주석과 양자 회담을 갖고 한반도 문제에 중국과 더 긴밀히 협력하기로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1기 집권 시절 김정은과 싱가포르, 베트남 하노이, 판문점에서 세 차례 만났다. 2기 집권 때도 김정은과 만날 수 있다는 입장을 수 차례 내비쳤으나 막상 취임 이후에는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5일 한미정상회담에서 “김 위원장을 만나 달라”는 이 대통령 요청에 “그것을 추진할 것이고 매우 좋은 일”이라고 화답했다. 반미 진영의 군사적 결집이 예고된 상황에서도 권위주의 국가 지도자들과 기존 하향식 외교로만 해결을 보려는 데 방점을 두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인식이 드러난 장면이었다.
※‘트럼프 스톡커(Stocker)’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시대에 투자에 도움이 될 만한 미국의 시장·기업·정책·정치·외교 관련 현장 이야기와 현안 분석을 전달하는 코너입니다. 구독하시면 유익한 미국 소식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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