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현지 시간) 프랑수아 바이루 프랑스 총리 신임 여부를 묻는 의회 투표에서 불신임 안이 가결될 전망이다. 매 시간 나라 빚이 1200만 유로(약 180억 원)씩 쌓이는 재정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바이루 총리가 승부수를 띄웠지만 야당의 거센 반발에 내각 붕괴가 확실시되고 있다. 불과 20개월 만에 총리 4명이 사퇴할 위기에 처하면서 프랑스의 정치적 혼란이 가중될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나온다.
프랑스 하원은 이날 오후 의회를 열고 바이루 총리의 신임·불신임을 묻는 투표를 실시한다. 바이루 총리가 의회 개회 연설을 하면 뒤이어 열리는 표결에서 그의 신임 여부가 결정된다. 재적 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가결된다.
바이루 총리는 지난 7월 15일 내년도 예산안 기조를 설명하면서 국방 예산을 제외한 정부 지출 동결과 법정 공휴일 이틀 폐지 등 긴축 재정안의 큰 틀을 공개했다. 에리크 롱바르 재무장관이 국제통화기금(IMF)의 개입 위험을 경고할 만큼 프랑스 재정적자가 심각해지면서 허리띠 졸라매기에 나선 것이다.
바이루 총리는 국가 빚을 줄이기 위한 긴축 재정 계획이 야당 반발에 부딪히자 의회 신임 투표를 자청했다. 의회 신임을 기반으로 긴축 정책을 밀어붙이려 했지만 좌우 진영의 반대가 극심했고, 이를 넘어서기 위해 최후 수단으로 불신임까지 각오한 것이다. 불신임이 가결되면 총리는 물론 장관 모두가 사퇴해야 한다.
프랑스의 공공 부채는 지난해 기준 3조 3000억 유로로 GDP 대비 113% 수준이다. 매시간 부채가 1200만 유로씩 증가해 왔다는 게 바이루 총리의 설명이다. 유럽연합(EU)은 회원국 재정적자가 국내총생산(GDP)의 3%를 넘지 않도록 제한하고 있지만 프랑스 재정적자 비율은 지난해 5.8%로 기준치의 2배에 육박한다. 코로나19 팬데믹,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에너지 가격 급등에 대응하기 위한 막대한 공공 지출로 재정이 악화됐다.
바이루 총리는 의회 투표를 일주일 여 앞둔 지난달 31일 인터뷰에서 이번 투표의 쟁점은 "총리나 정부의 운명이 아니라 프랑스의 운명"이라고 호소했다. 그는 현재 프랑스의 상황을 "선체에 구멍이 뚫려 물이 들어오는 배"에 비유하면서 "만약 정부가 무너지면 지금 추진 중인 정책은 버려질 것이고, 이는 국가의 미래를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바이루 총리는 각 정당 지도자를 만나 정부 지지를 설득하려고 했지만 좌파 정당이 면담을 거부하는 등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극우 국민연합(RN)의 조르당 바르델라 대표는 2일 바이루 총리를 면담한 뒤 언론에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며 정부 불신임 계획을 밝혔다. 그는 바이루 총리가 제시한 예산 방향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며 "국가에 해롭고 프랑스 국민에게 극히 불공정"하다고 비판했다.
RN의 실질적 지도자이자 유력 대권 후보인 마린 르펜 하원 원내대표도 "바이루 총리가 진정으로 각 정당의 의견을 듣고 싶었다면 7월에 이미 모든 절차를 끝냈어야 했다"며 불신임을 예고했다. 이어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에게 초고속 (의회) 해산을 촉구하면서 "새 총선에서 선출된 다수당이 예산을 편성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유일한 민주적 해결책"이라고 강조했다.
현지 언론은 야당이 불신임을 예고한 만큼 바이루 내각 해산이 확정적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협상도 하기 전에 의회에 신임 투표를 요청하면서 야당에 내각을 해산시킬 명분을 줬다는 평가가 나온다. 마크롱 대통령이 중도 블록과 온건 우파 공화당(LR)을 결집하도록 독려하고 있지만 대규모 파업이 예고되는 등 긴축에 대한 여론도 싸늘하다. 마크롱 대통령의 지지율은 지난 3일 조사에서 역대 최저치인 15%에 그쳤다.
프랑스는 바이루 내각이 해산될 경우 20개월만에 총리 4명이 물러나는 오명을 쓰게 된다. 현재 하원 의석 577석 가운데 330석을 극우와 좌파 진영이 차지하고 있어 중도 연합 내각을 꾸려온 마크롱 대통령의 정치적 위기도 커진다. 마크롱 대통령이 조기 총선을 선택하는 방법이 있지만 극우 RN이 과반을 차지할 수 있어 리스크가 크다. 지난해 6월 마크롱 대통령이 전격 의회를 해산하고 조기 총선이 치러졌을 때도 RN은 1차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으나 2차 투표에서 반RN 진영이 뭉치며 좌파 연합, 범여권에 이어 3위로 내려앉았다. 로이터통신은 "정부의 운명을 넘어 프랑스가 긴장의 9월을 맞이하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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