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가 구조적 저성장의 깊은 수렁에 빠져들고 있다. 2015년까지만 해도 3%대를 웃돌았던 잠재성장률이 1%대로 급락하더니 이제는 0%대 추락을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됐다. 급기야 올해 대만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한국의 1인당 GDP를 22년 만에 추월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왔다. 도대체 무엇이 한국과 대만의 차이를 갈랐으며, 한국이 구조적 저성장의 수렁에서 벗어날 해법은 무엇일까. 홍성국 혜안리서치 대표는 22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인구 감소, 혁신 부족, 불균형 성장으로 성장의 한계에 봉착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홍 대표는 “한국의 정치 상황은 중도 실용 노선이 사라지고 양극단의 우파와 좌파만 남는 양극화까지 가속화되고 있다”며 “팽창 시대가 끝나고 과거에는 겪어보지 못한 문제가 속출하는 ‘수축사회’로 가는 복합 전환기인데 그동안 땜질식 대처만 해왔다”고 개탄했다. 30년 넘게 증권사에서 투자 분석과 경제 전망을 담당하는 리서치센터에서 일했던 그는 “경제 추락을 막아내고 잠재성장률의 추세적인 하락을 반전시킬 구조 개혁의 리더십이 필요한 때”라고 강조했다.
-한국의 구조적인 저성장을 어떻게 진단하나.
△우리 경제의 저성장 구조화는 이미 오래전 시작됐지만 최근까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오히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더 가속화되고 있다. 이대로라면 저출생·고령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반복적인 정책 실패로 장기 복합 불황을 겪었던 일본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높다. 한마디로 ‘앞문에 호랑이, 뒷문에는 늑대’가 있는 상황이다. 성공 신화의 그늘과 주력 산업 쇠퇴, 경제구조, 교육 문제 등 과거의 상처를 해결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약육강식의 국제 질서, 인구 감소, 급격한 기술 변화 등 미래의 위험과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 안보와 경제 문제에서 미국과 중국 사이에 끼인 한국의 상황을 고려하면 호랑이를 미국, 늑대를 중국으로 바꿔도 의미가 통할 것 같다.
-구조적 저성장에서 벗어날 해법은.
△지금 각국의 성장은 인공지능(AI) 등 기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기술만 있으면 자금을 모으고 시장을 만들 수 있다. 성장의 원천은 기술 주도 성장이 돼야 한다. 기술 개발을 촉진하는 것이 유일무이한 방법이고 이는 교육체계 개편과 같은 말이다. 과학·기술·공학·수학, 이른바 ‘스템(STEM)’을 조기 교육해야 한다. 중국의 ‘천인계획’을 넘어서는 미래형 교육 혁신이 가장 중요하다. 암기식 대학 입시 중심의 교육은 이제 필요 없다. 추가로 규제 혁신이 필요하다. 보호주의와 제로섬 국제 질서와 AI가 만드는 새로운 사회에 걸맞은 규제 시스템을 원점에서 다시 구축해야 한다.
-과거에 한국의 ‘수축사회’ 진입을 경고한 적이 있는데.
△수축사회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공급은 과잉 상태인데 인구 감소, 부채 증가, 기후위기에 따른 비용 증가 등으로 수요는 쪼그라들고 있다. 모든 시스템이 인구 증가를 전제로 만들어졌는데 인구가 더 이상 늘지 않으면 지속 가능하지 않다. 고령자가 늘고 중산층이 줄어들면서 복지 부담은 커지고 세수는 증가가 어려운 상황이다. 경제 파이가 줄어드니 제로섬게임이 벌어지고 이해관계자들 간 갈등도 깊어진다. 포퓰리즘이 판치는 각자도생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포퓰리즘과 각자도생 현상은 왜 나타나나.
△수축사회의 구조가 바뀌지 않은 상황에서 AI 등 과학기술이 계속 발전하면서 양극화가 더 심화되고 있다. 경제 파이가 커지지 않으니 가져가는 쪽에서 전부 다 가져가는 제로섬게임이 심화되고 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결국 내가 사는 게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됐다. 정치적으로 포퓰리즘이 득세하고 각자도생하려는 것도 더 많은 파이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갈등하고 싸우기 때문이다. 경제 양극화가 심화되면 사람들이 이익에 따라 서로 편을 갈라서 싸운다. 내가 더 많이 차지하려면 편을 먹고 싸워 남의 것을 빼앗아 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총리,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 같은 정치인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대만의 올해 1인당 GDP가 한국을 추월해 내년에는 4만 달러를 넘어선다고 한다. 반면 한국은 10년째 3만 달러에 갇혀 있다. 어디서 차이가 생긴 건가.
△대만의 성공 비결은 한마디로 정보기술(IT) 산업에 특화된 경제구조에 있다. 반도체와 스마트폰 부문에서 꾸준한 투자가 빛을 발하고 있다. 당분간 대만의 고성장은 이어질 듯하다. 그러나 대만의 경제구조는 과도하게 반도체와 스마트폰에 치중돼 있다. 반면 한국은 음식료·바이오·문화·조선·자동차·기계·건설·소재·금융 등 세계에서 산업 포트폴리오가 가장 다양한 국가다. 이를 잘 살려야 한다.
-중국의 기술 굴기가 무섭다. 중국의 기술 패권 도전을 어떻게 전망하나.
△최근 딥시크 사태에 주목해야 한다. 딥시크와 오픈AI의 격차가 거의 없다고 하지 않나. 미국 입장에서는 가장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중국이 AI 기술을 자립하는 순간 세상의 판이 완전히 바뀔 것이다. 그럼 우리나라는 정말 위험해진다. 진짜 ‘앞문에 호랑이, 뒷문에 늑대’가 되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의 기술 양강 체제가 구축되면 유럽도 위험해진다.
-그런 변화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국제 질서를 과학기술 차원에서 보면 지금부터가 정말 중요한 시점이다. 우리도 보호주의 시대, 탈세계화 시대, 새로운 패권 전쟁의 시대에 맞는 산업구조로 산업을 유지해야 한다. 앞으로 5~6년간 우리는 선배들이 독립운동을 하듯이 우리 산업과 경제의 자강 능력을 높이기 위해 박차를 가해야 한다. 과거의 관성대로 살아가면서 망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시대에 맞게 한국을 개조하든지 우리의 선택지는 극단적인 두 가지다.
-우리가 추구할 개혁의 방향은.
△사실 거의 모든 국가들이 개혁에 올인하고 있다. 본질은 수축사회의 다양한 공격을 방어하면서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핵심은 ‘성장’과 ‘복지’의 조화다. 성장의 이유는 결국 복지를 늘리기 위한 것이고 복지가 확대되면 많은 사람이 소비를 늘려 다시 경제성장으로 이어진다. 모두가 알고 있는 이 논리가 전 세계 개혁의 방향이다. 스페인을 주목하는 것도 ‘성장’과 ‘복지’를 동시에 추진하면서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뤄냈기 때문이다.
-스페인은 어떤 식으로 개혁을 했나.
△2014년 유럽 재정위기 당시 스페인·포르투갈·이탈리아·그리스 등 4개국이 어려웠다. 어느 정도 회복이 됐나 싶었는데 코로나19가 오면서 다시 어려워졌다. 그런데 지금 스페인은 투자·수출·소비 등이 다 좋다. 경제가 균형 성장하고 있고 실업률도 크게 떨어졌다. 페드로 산체스 총리가 과감한 개혁을 했다. 우선 정부의 신규 투자가 마중물이 돼 경제가 살아났다. 비정규직 계약 제한, 노사 간 단체협약 협상력 조정 등 노동시장 개혁도 중요한 포인트다.
-어려운 상황에서 이재명 정부가 출범했다. 새 정부의 과제는 무엇인가.
△이재명 정부의 구호가 ‘진짜 대한민국’ ‘진짜 성장’이다. 모든 것이 풍요로웠던 팽창사회는 빠르게 저물고 있다. 팽창사회를 기반으로 한 사회와 경제는 ‘가짜’라는 뜻이다. 반면 기후위기, 인구 감소, 과학기술의 급속한 성장을 감안한 정책만이 ‘진짜’라는 의미다. 시대적 상황을 감안한 새로운 정책이 필요하다는 의미고, 지금이 바로 골든타임이라는 절박함을 바닥에 깔고 있다.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리려면 기술 중심의 성장을 하는 동시에 모두가 성장에 참여해 균형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앞으로 금융 쪽에서 변화가 매우 클 것 같다. 생산적 금융의 의미는.
△한국의 금융은 지나치게 부동산에 자금이 쏠려 있다. 기업으로 향할 자금이 아파트에 묶여 있다. 제조업 최강국인 한국에서 기업으로 돈이 돌지 않기 때문에 경제에서 생산을 담당하는 기업 부문으로 자금의 물길을 돌리려는 것이 생산적 금융이다. 앞으로 은행의 부동산 대출을 낮추고 기업으로 자금이 향하게 할 다양한 조치가 필요하다. 규제와 인센티브를 적절히 활용하면 자금 시장이 대전환될 것이다. 가계부채도 장기적 관점에서 안정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주식시장 밸류업, 150조 원 규모 국민펀드, 벤처 투자의 획기적인 확대 등 복합 처방이 나올 것이다.
-지금 시대에 가장 필요한 리더십은.
△모든 문제는 사람이 만들고 해결도 사람이 하는 것이다. 수축사회도 사람이 만들었고, 결국 사람만이 해결할 수 있다. 이 과정을 주도하는 것은 리더다. 그런데 21세기 들어 한국의 리더들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한국의 성장을 이끌던 베이비부머들이 대거 은퇴하면서 리더 세대의 공백이 생긴 것도 이유지만 리더답지 못한 리더들이 탐욕만 부린 것이 더 큰 원인이다. 경영학에서 계획은 10%, 실행은 90%라고 한다. 실행 부문에 집중한 리더들이 정치·경제계의 주류가 돼야만 우리 사회의 과제를 해결할 수 있다. 임기 연장, 성과 보수, 보신주의, 파벌에 의존한 리더들이 많아지면 한국의 미래는 없다.
He is…
1963년 충남 연기군에서 태어나 서강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1986년 증권 업계의 사관학교로 불리는 대우증권에 입사해 재직한 30년 동안 주로 투자 분석과 경제 전망을 담당하는 리서치센터에 있었다. 2014년에는 대우증권 공채 출신 첫 최고경영자(CEO)에 올랐다. 2016년 말 퇴사한 후 혜안리서치를 설립하고 저술 활동과 강의에 몰두하다 정계에 입문했다. 21대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에 당선돼 정무·기획재정위원회 등에서 활동했다. 의원직을 마치고 다시 연구실로 돌아와 차기작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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