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27일, 미국 국무부는 콜롬비아 구스타보 페트로 대통령의 비자를 전격 취소했다. 동맹국 대통령의 입국 자격을 박탈한 것은 전례 없는 조치였다. 유엔 총회 참석 계기 뉴욕 집회에서 그가 미군 병사들에게 “트럼프 대통령의 명령을 거부하라(Refuse President Trump’s orders)”, “인류의 명령을 따르라(Follow humanity’s orders)”고 촉구한 것이 직접적 이유였다. 미국은 이를 곧바로 “경솔하고 선동적”(reckless and incendiary) 행동으로 규정했다. 콜롬비아 외교부는 즉각 이번 조치가 국제법과 외교 관례를 위반한 것이라며 문제를 제기했지만, 본질은 단순한 비자 문제가 아니라 미국의 분명한 외교적 경고였다.
그럼에도 페트로 대통령은 사태를 가볍게 받아넘겼다. 그는 자신이 유럽 시민권을 보유하고 있어 미국 무비자 전자여행허가제(ESTA)로도 입국할 수 있다고 언급하며, 미국의 경고를 희화화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미국의 강력한 메시지와 대통령의 가벼운 반응이 극명하게 대비되면서 논란은 더욱 확산되었다.
물론 이번 발언을 단순히 경솔함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국제무대에서 미국의 정책에 정면으로 맞서 목소리를 낸 것은 흔치 않은 용기였다. 페트로 대통령은 지지층에게 ‘원칙 있는 지도자’라는 인상을 주었고, 라틴아메리카 좌파 진영에서는 그 상징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그러나 지지층에게는 원칙 있는 지도자로 비쳤지만, 국익의 관점에서는 외교적 고립과 경제적 비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더 크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작전은 인도주의 위기를 심화한다는 국제사회의 비판에 직면해 있다. 이런 맥락에서 페트로 대통령의 메시지는 지지층 결집에는 효과가 있었을지 몰라도, 국가적 과제를 앞둔 콜롬비아에 꼭 필요한 선택이었는지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언론 반응도 엇갈렸다. 콜롬비아의 엘 에스펙타도르(El Espectador), 베네수엘라의 텔레수르(Telesur), 아르헨티나의 파히나 12(Pagina/12) 등은 대통령 발언을 ‘표현의 자유’ 차원에서 옹호했다. 반면 엘 티엠포(El Tiempo), 세마나(Semana), 페루의 엘 코메르시오(El Comercio) 등 주류 매체는 외교·경제적 부담을 경고했다. 가디언(The Guardian) 은 “표현의 자유와 외교적 책임의 충돌”로, 엘 파이스(El Pais) 는 “콜롬비아 외교에 무거운 부담을 남겼다”고 평가했다.
이번 사태는 정치적·외교적 파장을 넘어 금융시장에도 불안 요인이 되고 있다. IMF의 81억 달러 유연신용공여(FCL)가 조건부로 전환되면서 콜롬비아는 필요할 때 자금을 확보하기가 더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이는 신용도 의구심을 키우며, 투자자 신뢰 위축 → 차입 비용 상승 → 환율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다. 페루 경제지 헤스티온(Gestion) 은 투자와 조달 조건 악화를 경고했고, 콜롬비아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은 11%대를 유지하고 있다(TradingEconomics). 블룸버그는 “기업 채권 발행이 70% 이상 급감했다”며 재정 불확실성이 이미 현실화됐다고 지적했다(Bloomberg).
역사적으로 콜롬비아는 대표적 친미 국가였다. 미국은 2000~2018년 플랜 콜롬비아(Plan Colombia) 를 통해 100억 달러 이상을 지원했다. 이후 규모는 줄었지만 군사·치안 협력과 연례 원조(연 4억 달러 안팎)는 유지되고 있다. 콜롬비아 대외정책의 근간이 미국과의 협력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번 사태는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양국 관계를 뒤흔드는 상징적 사건으로 기록될 수 있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은 여권이 “제국에 맞서 소신을 드러낸 대통령”을, 야권이 “국익을 해친 무모한 발언”을 내세우며 공방을 벌일 가능성이 크다. 그 과정에서 국론은 분열되고 금융시장의 불안도 커질 수 있다. 국제사회 일부는 이번 사태를 반미 행보나 친중 전환의 신호로 해석할 수 있어, 외교적 고립과 경제적 비용이 동시에 확대될 위험이 있다.
이번 사건은 단순한 외교 해프닝이 아니다. 표현의 자유라는 깃발이, 아이러니하게도 콜롬비아 경제와 외교의 발목을 잡는 족쇄로 바뀔 수 있음을 보여준다. 순간의 함성과 박수는 곧 사라지지만, 신뢰를 잃은 국익의 비용은 오래 남는다. 지금 콜롬비아에 필요한 것은 순간의 함성이 아니라, 국익을 지켜낼 절제된 언어와 신중한 외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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