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과 중국이 외교장관 회담을 통해 지역·국제 정세 사안에 대한 공조를 과시했다. 이달 초 중국 전승절을 계기로 6년 만에 북중 정상이 만난 후 양국 관계가 더욱 긴밀해지는 모습이다. ‘교류(exchange)’를 시발점으로 하는 ‘END 이니셔티브’ 한반도 평화 구상을 천명한 이재명 정부로서는 중국의 전략적 가치가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다음 달 말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물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한이 기정사실화된 만큼 우리 정부의 ‘페이스 메이커’ 역할 또한 더욱 중요해질 것으로 보인다.
조선중앙통신은 29일 중국을 방문 중인 최선희 북한 외무상이 전날 왕이 중국 외교부장과 회동한 것을 보도하면서 “국제 및 지역 문제와 관련한 깊이 있는 의견 교환이 있었으며 완전한 견해 일치”를 봤다고 전했다. 중국 외교부도 왕 부장이 “조선(북한)과 함께 국제·지역 사무에서 협조와 호흡 맞추기를 강화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고 발표했다.
구체적인 의제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북한의 대미 정책과 북미 대화 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APEC 정상회의에서 한중·미중 정상회담이 열릴 가능성이 높은 만큼 북한 입장에서는 중국을 통해 자신들의 의견을 전달할 필요가 있다. 중국도 이를 통해 한반도 문제 해결에 있어서 자신의 역할을 대내외에 드러낼 수 있다.
양측 모두 미국을 겨냥한 메시지를 내면서도 미묘한 온도 차를 드러낸 데도 이런 배경이 깔린 것으로 보인다. 중국 외교부에 따르면 왕 부장은 “모든 형식의 패권주의에 반대한다”며 미국을 겨냥한 발언을 했고 최 외무상도 “일방주의와 강권 정치를 저지하겠다”고 화답했지만 북한 보도에서 이 부분은 생략됐다.
미국이 북한과의 대화 의지를 드러내는 상황에서 중국은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드러내며 대미 협상력 확보를 시도하고, 북한은 미국과의 대화·접촉 가능성을 열어 놓은 셈이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석좌교수는 “북한은 미국에 대한 자극을 차단하려는 의도를 담았고, 중국은 북중 공조를 통한 대미 대화·압박 투트랙을 강조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외교 전문가는 “안보·경제 측면에서 북한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나라가 중국인 만큼 미국으로서도 북미 대화를 위해서는 중국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라며 “미국이 북한과 대화에 나서고 이를 중국이 조력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미국과의 무역 협상에도 영향을 주려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처럼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움직임이 물밑에서 분주해지고 있는 가운데 APEC 준비와 함께 미중 정상을 맞이해야 하는 우리 정부는 이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자제하는 분위기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이날 서울 용산 대통령실 기자 간담회에서 북중 외교장관 회담에 대해 “북중 정상회담 후속 협의로 본다”며 “전승절 이후 북중 간 관계가 가까워지고 다양한 차원에서의 협력 방안이 논의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APEC을 계기로 한 북미 정상 만남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보면 북한의 태도에서 변화를 느낄 수는 없다”며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다만 북한과의 단계적인 관계 개선을 기대하는 상황에서 북한이 주변국과의 접촉을 늘리는 것을 긍정적인 신호로 볼 수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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