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난 동창들과 있었던 일이다. 미술관을 가본 적 없다는 친구에게 “그래도 미술은 좋아하지”라고 물었더니 친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학교 다닐 때부터 싫어했어.”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미술은 어렵고, 특정한 지식이 있어야만 접근할 수 있으며 평가와 시험의 기억으로만 남았다는 게 좌중의 평가다. 친구의 이 경험은 미술에 대한 개인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예술을 배우고 접해온 사회적 방식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미술관은 오랫동안 공공의 공간이라 불려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되 누구나 편안하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은 아니었다. 작품 앞에서 무엇을 느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설명문은 전문용어로 가득 차 있으며 잘 모르면 질문조차 주저하게 만드는 분위기 속에서 미술관은 점차 엘리트 문화의 공간으로 굳어졌다. 미술관은 예술을 보호하는 장소가 됐지만 동시에 예술을 삶으로부터 분리하는 장치처럼 됐다.
칼 세이건은 “인간은 우주가 스스로 자신을 보기 위해 만든 존재”라고 했다. 미술관 또한 사회가 자신을 스스로 성찰하는 하나의 언어로 살아간다. 개인의 감정, 시대의 불안, 공동체의 기억은 언제나 예술을 통해 먼저 모습을 드러내왔다. 만약 다수의 시민이 이 언어에 접근하지 못한다면 예술은 공적 사유의 장이 아니라 소수의 소유물이 되고 만다. 이 지점에서 ‘모두를 위한 미술관’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예술이 모두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는 근본적인 가치와 철학의 문제로 다가온다.
미술관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작품의 보존을 위한 장소인가, 전문가의 학문적 기관인가, 아니면 시민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공공의 장인가. 물론 미술관의 전문성은 중요하다. 그러나 전문성이 배타성으로 작동하는 순간, 공공성은 제자리를 잃게 된다. ‘모두를 위한 미술관’이란 작품의 수준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이해의 문턱을 낮추는 일이다. 정답을 요구하지 않고 해석의 다양성을 허용하며 미술관이 경험과 해석의 장이 될 때 관람자는 수동적 감상자가 아니라 능동적 참여자가 된다. ‘모두를 위한 미술관’이란 바로 이 전환의 공간이다. 21세기에 들어와 바뀌고 있는 미술관의 새로운 모습이기도 하다.
오늘날 미술관은 더 이상 ‘조용히 감상하는 성전’으로 자족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시민들이 머물고, 참여하고, 사유하는 문화적 공공장소가 돼야 한다. 빠른 변화의 시대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과 감각을 해석하는 능력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 미술관은 잠시 멈춰 서서 보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드문 장소이며 이 경험은 특권이 아닌 우리 모두의 것이다.
아직 한국의 미술관 문화는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미술을 이해하고 누리는 사회적 기반이 충분히 형성되지 못해서다. 건강한 미술 생태계가 사다리꼴 구조라면 그 토대가 되는 것은 폭넓은 미술 애호가층일 것이다. 언젠가 미술을 싫어한다고 했던 친구가 “잘은 모르지만, 그냥 보고 있으면 좋더라”라고 말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19세기 영국의 사상가 존 러스킨은 “예술은 인간의 마음을 형성하고 그 마음은 사회를 형성한다”고 했다. 미술관은 예술을 통해 사람들의 사고와 감정·태도를 변화시킬 수 있는 공간이다. 그것이 미술관의 가치이며 ‘모두를 위한 미술관’이 돼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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