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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화 기자의 그림 이야기] 피카소를 낳은 色의 구도자 세잔

세잔은 색으로 대상을 구분하는 입체파의 시조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그림은
서양의 경험적 사고와 이성적인 사고를 동양적 성찰과 번뇌로 바꾸어 가면서 색이라는 감각으로 확대 재상해 냈다. 이로 인해 당시의 젊은 화가들은 그를 신비한 동양인으로 부르기도 했다.

자연을 원통과 구체, 그리고 원추형으로 해석하라는 세잔의 말은 피카소와 브라크 등 입체파의 거장을 낳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 한마디로 세잔은 천재 화가 피카소를 낳은 색의 구도자인 셈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현실이 아니다. 현실은 보는 순간 분산되며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만다.”

이는 입체파(Cubism)의 시조로 평가받는 폴 세잔(1839~1906)이 말년에 남긴 말이다. 색(色)으로 대상을 구분하는 새로운 시도를 감행한 대가(大家)다운 언급이다.

많은 거장들이 그러했듯이 세잔 역시 생전에는 그의 예술세계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인상파와 동시대를 산 세잔은 인상파의 영향을 받았지만 자연에서 찾은 색과 선, 그리고 면에 대한 진실을 파고들었었다.

그의 화풍은 피카소, 브라크 등으로 이어지는 등 현대미술의 든든한 자양분이 되면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세잔은 자연의 관찰자이자 자연에 숨겨진 진실과 존재를 캔버스에 담아내기 위한 실험가이기도 했다. 그는 현대미술의 아버지로 평가받고 있는데, 그것에 특별한 비결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묵묵히 하늘과 땅을 바라보며 나무를 흔드는 바람을 관찰했다. 그리고 빛의 변화에 따라 바뀌는 주변 풍경을 명상하는 듯 바라보며 캔버스에 옮기는 과정을 반복했다.

부유한 환경, 그러나 쉽지 않았던 화가 인생

런던조약에 의해 벨기에의 독립이 인정되고, 루이 자크 다게르에 의해 최초의 상업적 사진기술인 은판사진(daguerreo type)이 발명됐던 1839년. 프랑스 엑상프로방스 오페라가(街) 28번지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정확히는 1월 19일.

모자 상인인 루이 오귀스트 세잔과 안 엘리자베t스 오노린 오베르 사이에서 태어난 이 사내아이는 사생아였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결혼이라는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남녀가 동거하면서 아이를 낳고 살다가 뒤늦게 결혼하거나 헤어지는 경우가 흔했다.

그가 9살되던 해 아버지는 펠릭스 알렉시 은행을 인수해 풍요로운 가정을 꾸렸다. 덕분에 그는 프랑스 최고 교육기관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그는 브르주아 자녀들이 주로 다녔던 부르봉 중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세잔은 평생의 벗인 한 살 아래의 에밀 졸라를 만난다.

정재계에 인맥이 탄탄했던 아버지 덕분에 세잔은 프랑스 와 프로이센 간 전쟁이 터졌을 때 의무복무도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타고난 성품은 버릴 수가 없었을까. 항상 생각에 빠져있었던 그는 평생 우울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지만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관이 되기 위해 법학대학에 입학했다.

그렇지만 하기 싫은 일은 오래 가지 못하는 법. 입학한 지 2년 후인 1860년 중퇴하고 만다.

세잔의 아버지는 “화가가 되겠다고? 바보 같은 소리 말라고 해. 인간은 빵으로 살고 재능으로는 죽는 거야” 라며 반대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예술을 직업으로 인정하는 부모는 흔치 않았던 것 같다.

세잔은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로서의 인생을 택한다. 그리고는 국립미술대학 입학을 준비한다.

하지만 세상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림을 평생의 업(業)으로 선택하고 처음 치른 국립미술대학 입학시험은 낙방이라는 쓴 경험으로 돌아왔다. 하는 수 없이 세잔은 아버지 은행에서 일했다.

2년간 은행에서 일 해보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힘들어 했던 그는 22살이 되던 해 은행을 그만두고 파리로 떠난다. 이때부터 르느와르, 마네 등과 사귀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잔의 그림은 당시 파리 화단에서 퇴짜 맞기 일쑤였다.

세잔은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애를 낳고 살았던 아버지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 싫어했다. 하지만 서른두 살이 되던 1871년 그 역시 젊은 여인 오르탕 피케와 결혼하지 않고 장남 폴을 낳는다. 17년이나 산후에야 결혼하지만 말이다.

그 해 세잔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매년 40만 프랑이라는 큰돈을 쓰고 살 수 있을 정도의 유산을 세잔에게 남긴다.

세잔은 집안에서 계절의 변화를 즐길 수 있을 만큼 넓은 정원과 화려하고 기품이 있던 아버지의 저택을 팔고 평생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곳으로 이사를 간다. 우울한 성품을 달랠 수 있었던 길은 오직 그림을 그리는 것 밖에 없었다.

출세를 위한 세상과의 교감 대신 자연과의 대화를 통해 진리를 찾으려 했던 그는 죽는 그날까지 붓을 놓지 않고 자연 속에 파묻혀 살았다. 1906년 당뇨로 악화된 건강에도 불구하고 그는 작업을 계속해 나갔다.

그 해 10월 15일 세잔은 그림을 그리다 비를 맞고 쓰러져 지나가던 농부에게 발견됐다. 그리고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원통, 구체, 원추형으로 해석한 자연

끝없이 밀려드는 창작의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도 세잔은 확신에 차 있었다. 하나의 정물화를 완성하기 위해 100번이 넘는 작업을 마다하지 않았고, 초상화를 그릴 때는 모델을 수 백 번 씩 자리에 앉히기도 했다.

그는 말년에 잠시 찾아온 친구들과의 교류를 제외하고는 줄곧 혼자서 작업했다. 제자도 없었고 가족의 응원이나 살롱 심사위원의 격려는 더더욱 없었다.

고독한 채로 그림만 그려왔던 그의 작업 방식은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작업을 통해 진실을 터득하려 했던 세잔의 인생은 마치 진리를 찾아가는 구도자의 삶과 닮아 있다.

그가 그림에 몰두했던 1860년대는 선과 면을 중시하는 전통 회화에 반기를 들고 선을 무시하며 빛을 강조했던 인상파(Impressionism)가 등장했던 시기다. 예술적 혼란이자 격변의 시대였다. 서양미술사의 한 획을 그었던 마네와 모네의 그림조차 당시 주류 화단을 이끌었던 살롱전에서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세잔은 인상파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인상파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젊은 시절 인상파 화가들의 전시회에 참여했지만 세상의 따가운 평판에 염증을 느끼고 고향인 엑스프로방스로 돌아가 스스로 느꼈던 예술적 문제점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아침에 일어나면 습관적으로 작업실에 들러 이젤과 캔버스를 메고 풍경 속으로 들어갔다. 짧게는 오전 11시까지, 길게는 그림자가 길어지는 오후 늦게까지 매일 작업을 했던 그가 찾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세잔 그림의 가장 큰 특징은 색과 공간 배치에 있다. 그림을 그리며 살겠다고 다짐했던 20대 초반 파리에 머무르는 동안 세잔은 루브르 박물관 등에 들러 수많은 선배들의 그림을 모사하면서 전통 회화의 큰 줄기를 섭렵했다.

세잔이 전통을 벗어나 세상에 없던 것을 만들어 낸 거장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은 선 대신 오로지 색으로 면을 구분하려 했던 시도가 독창적이었기 때문이다.

정물화로 유명했던 세잔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역사상 유명한 사과 셋을 꼽으라면 첫 번째가 이브의 사과이고, 두 번째는 뉴턴의 사과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가 바로 세잔의 사과다. 그 만큼 세잔의 정물화는 탁월했다.

당대 주류 화단에서는 번번이 거절당했지만 시대를 앞서갔던 사람의 눈에는 그 차이가 보이는 법. 프랑스의 상징파 화가로 평을 얻었던 모리스 드니는 당시 세잔의 사과를 보고 “잘 그리기만 한 사과를 보면 군침이 돌지만 세잔의 사과는 보는 사람의 마음에 말을 건넨다”고 했다.

그의 정물화는 완벽한 구성과 수채화와 같은 섬세한 색감, 그리고 정물 주변의 절묘한 공간처리가 독보적이다. 이 모든 것이 보는 사람에게 간결하면서도 단순하게 느껴진다는 게 세잔 정물화의 특징이다. 아무리 봐도 흠잡을 곳이 없다는 말이다.

그는 점차 전통적인 원근법에서 벗어나 빈 공간을 생생한 장면으로 변형해 간다. 그는 빛을 강조했던 인상파와 달리 공간과 대상의 관계를 염두에 두었다. 보이는 자연 그대로가 아니라 그 속에 담겨진 변하지 않는 진리를 담아내려 노력한 것이다.

비평가이자 큐레이터인 마리아 테레사 베네데티는 “마네의 야망이 빛의 효과를 활용해 보이는 이미지의 아름다움을 찬양한 것이라면 세잔은 형태를 상징적 모델로 보았고, 그 뒤에 숨겨진 우주의 질서를 인식하는데 관계된 외형으로 간주했다”고 평가했다.

완숙기에 접어들면서 그는 움직이는 풍광과 움직이지 않는 지형을 한꺼번에 표현하기 위한 노력에 힘을 쏟는다.

보이는 것 너머의 것을 캔버스에 담아내려고 했던 그의 독특한 예술관 때문이었을까. 사색적인 세잔을 두고 당시의 젊은 예술가들은 그를 ‘신비한 동양인’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의 그림은 서양의 경험적 사고와 이성적인 사고를 동양적 성찰과 번뇌로 바꿔가면서 색이라는 감각으로 확대 재생산해 냈다.

세잔의 말년 그림을 보면 예술적인 풍요로움이 느껴진다. 물에 반사된 강 건너의 풍경과 색채의 유연한 융합이 극치에 다다르게 된다.

1896년 그렸던 ‘안시의 호수’가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풍경에 불어넣은 숨결이 윤곽선의 점진적인 해방과 내적인 입체감에 운동성을 주어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는 구조적인 조합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갔다.

자연에는 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던 세잔은 나무를 흔드는 바람결까지 완벽하게 재현해 내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예술적 완성기에 접어든 그는 “자연을 원통과 구체(求體)와 원추형으로 해석하라”고 말하기에 이른다. 자연에 대한 세잔의 기하학적 해석은 후대 입체파를 만든 피카소와 브라크로 이어진다.

세잔, 그리고 피카소와 브라크

세잔이 세상을 떠나고 1년이 지난 1907년 가을. 프랑스의 한 살롱에서 세잔의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다. 인상파와 비슷해 보이면서도 훨씬 지적이고 야성미가 넘치는 세잔의 예술세계가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던 전시였다.

젊은 예술가들은 세잔의 회화 개념 중 특히 ‘원통과 구와 원뿔로 자연을 처리하고 사물의 각 측면을 중앙의 소실점으로 향하는 원근법에 맞춰놓으라’는 세잔의 충고에 주목했다. 그들 중에는 천재 화가 피카소와 브라크도 있었다.

전통적인 공간 개념을 무너뜨리고 사물들의 심층 구조를 새로이 발견한 세잔의 작업은 사물을 끊임없이 재배치하며 새로운 존재 방식을 창조해 내고자 했던 피카소에 의해 진화되기 시작했다.

방향과 시차를 무너뜨리며 과감한 실험을 했던 피카소는 1907년 세상을 놀라게 한 작품을 내 놓는다. 바로 ‘아비뇽의 처녀들’이다. 스페인의 집창촌이었던 아비뇽에서 만난 수많은 창녀들을 모델로 그린 이 작품은 현대미술의 전환점으로 기록되는 작품이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시선의 차이는 물론 2차원을 뛰어넘는 공간 해석 등이 평면 캔버스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재현해 낸 것이다.

다섯 명이 등장하는 이 그림은 가운데 두 여인의 모습과 가장자리 여인들의 모습이 다르다.

가운데 여인들은 형태가 다소 각이 졌다는 것 이외에는 인체의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만 오른쪽에 서 있는 여인과 앉아있는 여인의 모습은 기하학적인 동시에 2차원의 평면을 뛰어넘는다.

얼굴 정면과 옆면을 한 얼굴에 담는가 하면 몸통을 반대로 돌려놓는 등 적극적인 실험성을 보여줬다.

피카소가 세잔의 작품을 보고 기하학적 연구를 했다는 사실은 미술계에선 이미 상식이 됐다.

1908년 피카소의 ‘두 인물이 있는 풍경’은 그가 세잔의 완숙기 화풍을 어떻게 이어나갔으며 또 어떻게 변형했는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얼핏 보면 세잔의 마지막 시대에 그렸던 작품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화풍이 비슷하다.

1909년 피카소는 브라크와 공동으로 작업하면서 입체파 양식의 기본적인 발전을 더해가게 된다.

피카소는 세잔의 예술세계를 재해석해 형식적인 톱니바퀴의 조각처럼 이미지를 끼워 맞춘 기하학적 형태 속에서 현실세계의 생생한 움직임을 재현해 냈다.

평생 세상과 거리를 두고 제대로 된 전시회 한번 열지 않았지만 자신의 예술에 몰입하며 고독 속에서 스스로 예술적 화두를 풀려고 했던 폴 세잔. 예순이 넘어서도 이젤을 들고 사생을 하러 갔던 거장 세잔은 마지막까지 그의 부족함을 스스로 일깨웠다.

“나는 자연에 대한 통찰력을 갖춘 화가가 되었지만 감각에 퍼져있는 힘에 도달하지 못하고 자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색채의 풍부함도 지니지 못했다.”

인간과 자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과의 관계에 대해 고민했던 거장 세잔의 꿈은 입체파로 이어졌다. 세잔은 현대 회화의 위대한 선구자 중 한 명으로 추앙받으며 20세기 서양 미술사에 한 획을 긋게 된다.

장선화 서울경제 기자 ndia@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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