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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5.12.24 05:00:00누군가에게 팔짱을 내주고 싶은 날 그리하여 이따금 어깨도 부대끼며 짐짓 휘청대는 걸음이라도 진심으로 놀라 하며 곧추세워주기도 하면서 그렇게 발걸음 맞춰 마냥 걷다가 따뜻한 불빛을 가진 찻집이라도 있다면 손잡이를 함께 열고 들어서서 내 얘기보다 그의 얘기를 더 많이 들어주고 싶은 날 혼자 앞서 성큼성큼 걸어온 날이 누군가에게 문득 미안해지는 날 -오인태석양이 뉘엿뉘엿 넘어갈 때에는 누구나 걸음을 멈추게 된다. -
오후에 피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5.12.16 18:02:32너를 기다리는 이 시간 한 아이가 태어나고 한 남자가 임종을 맞고 한 여자가 결혼식을 하고 그러고도 시간은 남아 너는 오지 않고 꽃은 피지 않고 모래시계를 뒤집어놓고 나는 다시 기다리기 시작하고 시간은 힐끗거리며 지나가고 손가락 사이로 새는 모래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소란스런 시간 찻잔 든 손들은 바삐 오르내리며 의뭉한 눈길을 주고받으며 그러고도 시간은 남아 생애가 저무는 더딘 오후에 탁자 위 소국 한 송이 혼 -
벌레 먹은 나뭇잎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5.12.09 16:59:55나뭇잎은 벌레 먹어서 예쁘다 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은 어쩐지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밉다 떡갈나무 잎에 벌레 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예쁘다 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은 잘못인 줄 안다 그러나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이생진 벌레 먹은 나뭇잎은 벌레를 먹은 나뭇잎이 아니다. 개구리 먹은 뱀은 개구리를 먹은 뱀이지만. 벌레 먹은 나뭇잎은 벌레에게 먹힌 -
쌀을 쏟고는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5.12.02 18:07:34밥을 안치려다 쌀을 쏟고는 망연히 바라본다 급물살에 고무신 한 짝을 잃고는 해가 지도록 개울물을 바라보던 어린 시절도 그랬다 산감이 된 아버지 산소 근처에 핀 산벚나무꽃을 바라보는 봄밤도 그랬다 망연하다는 게 더 망연해지는 요즘 쌀을 쏟듯 갑자기 나도 모르게 마음을 어딘가에 쏟아놓고 멍하니 앉아 창밖 소나무나 건넌산 상고대를 보면서 나는 더 망연해진다 -김남극 쏟은 쌀이야 다시 쓸어 담으면 되고, 떠내려간 고 -
‘오늘’만큼 신선한 이름은 없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5.11.25 18:07:58잠옷도 벗지 못하고 펄럭이는 나뭇잎으로 하루는 아침마다 새 옷을 갈아입고 도착한다 아침엔 아카시아 꽃의 말을 베끼고 싶어 처음 닿은 햇빛으로 새 언어를 만든다 오늘이라는 말은 언제나 새 언어다 약속 위엔 무슨 색종이를 얹어 놓을까 한 방울 진한 잉크빛 그리움 제 이름 부르면 앞다투어 피는 꽃들은 오늘 하루 내가 가꿀 이름이다 오늘 날씨를 묻느라 새들의 입이 바쁘고 풀의 얼굴 만지며 오는 햇빛의 발걸음이 젖어 있 -
수직의 배반자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5.11.04 18:06:10엘리베이터는 수직으로 운동하지만 동력은 회전체다 도르래가 쇠줄을 돌려 직선의 운동력을 만든다 미세한 힘들이 수직의 탄 듯 만 듯한 승차감을 탄생시킨다, 수직의 어머니는 곡선 맞물려 돌아가는 곡선의 아귀힘으로 수직이 산다 하여 방자해진 수직은 자주 모체를 은폐한다 편리함 아늑함 속도전 그 따위 밑에 숨어서 어떤 가증스런 수작이란 걸 숨기며 내달린다 이제 계단도 옵션인 양 걷는 시대 거기서부터 형기가 시작될지 -
서풍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5.10.29 05:00:00서리빛을 함북 띠고 하늘 끝없이 푸른 데서 왔다 강바닥에 깔려 있다가 갈대꽃 하얀 우를 스쳐서 장사의 큰 칼집에 숨어서는 귀향가는 손의 돛대도 불어주고 젊은 과부의 뺨도 희든 날 대밭에 벌레소릴 가꾸어놓고 회한을 사시나무 잎처럼 흔드는 네 오면 불길한 것 같어 좋아라서리빛을 띠었다지만 함북이라는 말 넉넉해서 좋다. 하늘 끝없이 푸른 데서 왔다니 우리의 출생처럼 신비롭다. 강바닥에도 깔려 있다가 갈대꽃 위도 스 -
순두부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5.10.21 17:36:53새벽부터 비가 내리거나 천둥 치고 번개 치면 누군가 내가 그리워 저 산 너머에서 순두부 한 그릇 데워 펴 놓고 한없이 마당가를 바라볼 듯하여 마당가에 나가 감자꽃 보고 뒤란에 가 양귀비꽃 보고 창에 들이치는 빗물 보다가 문득 울음이 났다 울음이 그득한 저 빈 양푼처럼 나는 늘 서늘하다 천둥 스피커로 부르는데 왜 못 들은 체하는가. 번갯불 플래시로 비추며 찾는데 왜 후미진 골목으로만 숨어드는가. 모든 걸 용서할 테니 -
꼬부랭이 “ㄹ”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5.10.15 05:00:00전라도 하고 부르면 절라도가 네네 대답을 한다 횡단보도 하고 부르면 행단보도가 네네 대답을 한다 선생님이 아무리 잘 불러주셔도 항상 내가 정답이다 연필소녀의 검은 긴 머리가 찰랑찰랑 지우개소년의 색동저고리가 팔랑팔랑 망내야 커피 좀 타온나? 속 탄다 반장 형님의 더 큰 목소리 수업시간이다 -홍순애 평생 까막눈으로 살다가 처음 한글을 배운 어머니들이 쓴 시집 ‘엄마의 꽃시’에 실린 작품 중 하나다. 받아쓰기를 -
따뜻한 네모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5.10.01 05:00:00먼 산이 네모난 창으로 나를 들여다보고 있다 내가 따뜻해지는 걸 네모나게 들여다보고 있다 혼자 순댓집에 들러 막걸리 한 대접 마시고 막 들어온 내 잠도 네모나게 들여다보고 있다 산은 나를 네모 안에 들여놓고 막스 브루흐의 <콜 니드라이>를 수도꼭지처럼 틀어놓고 지그시 눈 감은 나를 네모 안에 들여놓고 배 위 어린 손자에게 그림책 읽어주는 나를 네모 안에 들여놓고 산은 나를 네모나게 읽는다 네모 안이 우물처럼 깊 -
명의(名醫)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5.09.23 17:44:11요즘 사람들 병은 모두 속병인겨 말을 못해서 생기는 병이지 사람들 말만 잘 들어줘도 명의 소리 듣는데 그걸 못 혀 아무 소리 하지 말고 자기 말만 들으래 내가 의사 양반 주치의인가? 홍 씨 할머니 처방전 들고 약국 들어서며 혼잣말처럼 하신 말씀 내 귀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말만 잘 들어줘도 명의라니, 곳곳에 돌부처가 왜 명의인지 알겠다. 교회 앞에 두 팔 벌리고 선 예수상이 왜 명의인지 알겠다. 돌부처가 소원 비는 중생 -
태양의 지문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5.09.17 05:00:00나는 한때 요셉이었다가 요한이었다가 십자가의 나무였다가 노랑을 삼킨 장미였다가 잠자리였다가 끌려간 목수였다가 선녀를 감금한 사냥꾼이었다가 슬리퍼로 온 동네 돌고 온 구름이었다가 아나키스트였다가 푸른 포구였다가 암호였다가 가을 묻은 햇살이었다가 절벽 끝 중력이었다가 생각을 절개한 알타미라의 짐승이었다 시적 화자의 전생담이 눈으로 보듯 생생하다. 사람, 동물, 식물은 물론 포구와 햇빛에 이르기까지 유정과 -
새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5.09.09 18:10:23이제까지 무수한 화살이 날았지만 아직도 새는 죽은 일이 없다. 주검의 껍데기를 허리에 차고, 포수들은 무료히 저녁이면 돌아온다. 이제까지 무수한 포탄이 날았지만 아직도 새들은 노래한다. 서울에서, 멀지 않은 교외에서 아직도 새들은 주장한다. 농 안에 갇힌 새라고 할지라도 하늘에 구우는 혀끝을 울리고 있다. 철조망으로도 수용소로도 그리고 원자탄으로도 새는 죽지 않는다. 더럽혀진 하늘에, 아직도 일군의 새들이 날고 -
살아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5.09.03 05:00:00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 하늘을 훨훨 나는 솔개가 아름답고 꾸불텅꾸불텅 땅을 기는 굼벵이가 아름답다 날렵하게 초원을 달리는 사슴이 아름답고 손수레에 매달려 힘겹게 산비탈을 올라가는 늙은이가 아름답다 돋는 해를 향해 활짝 옷을 벗는 나팔꽃이 아름답고 햇빛이 싫어 굴속에 숨죽이는 박쥐가 아름답다 붉은 노을 동무해 지는 해가 아름답다 아직 살아 있어, 오직 살아 있어 아름답다 머지않아 가마득히 사라질 것이어서 아 -
나룻배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5.08.26 18:10:15하늘 아래 첫 동네 티베트에서는 몸을 ‘루’라 한다 이 말의 함의는 ‘두고 가는 것’ 그렇습니다 이 육신 저세상 갈 때 두고 가는 것입니다 -김형식 강을 건넌 다음에는 나룻배를 두고 가야 할 것이다. 몸도 세상을 다 건너고 나면 두고 가는 것이다. 나룻배와 몸은 강과 세상을 건너고 나면 집착할 것이 아니다. 두고 갈 것이라 하여 함부로 대해서도 아니 될 것이다. 나룻배는 다른 손님이 올 것이니 깨끗이 흙을 털고, 떠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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