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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여는 수요일] 터미널 2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7.07 05:50:00이홍섭 강릉고속버스터미널 기역자 모퉁이에서 앳된 여인이 갓난아이를 안고 울고 있다 울음이 멈추지 않자 누가 볼세라 기역자 모퉁이를 오가며 울고 있다 저 모퉁이가 다 닳을 동안 그녀가 떠나보낸 누군가는 다시 올 수 있을까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다며 그녀는 모퉁이를 오가며 울고 있는데 엄마 품에서 곤히 잠든 아이는 앳되고 앳되어 먼 훗날, 엄마의 저 울음을 기억할 수 없고 기역자 모퉁이만 댕그라니 남은 터미널 -
[시로 여는 수요일] 나팔꽃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6.30 05:50:00권대웅 문간방에서 세 들어 살던 젊은 부부 단칸방이어도 신혼이면 날마다 동방화촉(洞房華燭)인 것을 그 환한 꽃방에서 부지런히 문 열어주고 배웅하며 드나들더니 어느 새 문간방 반쯤 열려진 창문으로 갓 낳은 아이 야물딱지게 맺힌 까만 눈동자 똘망똘망 생겼어라 여름이 끝나갈 무렵 돈 모아 이사 나가고 싶었던 골목길 어머니 아버지가 살던 저 나팔꽃 방 속경사 났네요. 나라가 저출산으로 걱정인데 미래의 주인이 오셨네요 -
[시로 여는 수요일]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6.23 05:50:00윤재철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술값은 쟤들이 낼 거야 옆 자리 앉은 친구가 귀에 대고 소곤거린다 그때 나는 무슨 계시처럼 죽음을 떠올리고 빙긋이 웃는다 그래 죽을 때도 그러자 화장실 가는 것처럼 슬그머니 화장실 가서 안 오는 것처럼 슬그머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할 것도 없이 빗돌을 세우지 말라고 할 것도 없이 왁자지껄한 잡담 속을 치기배처럼 한 건 하고 흔적 없이 사라지면 돼 아무렴 외로워지는 거야 외 -
[시로 여는 수요일] 업어 준다는 것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6.16 05:50:00박서영 저수지에 빠졌던 검은 염소를 업고 노파가 방죽을 걸어가고 있다 등이 흠뻑 젖어들고 있다 가끔 고개를 돌려 염소와 눈을 맞추며 자장가까지 흥얼거렸다 누군가를 업어준다는 것은 희고 눈부신 그의 숨결을 듣는다는 것 그의 감춰진 울음이 몸에 스며든다는 것 서로를 찌르지 않고 받아준다는 것 쿵쿵거리는 그의 심장에 등줄기가 청진기처럼 닿는다는 것 누군가를 업어준다는 것은 약국의 흐릿한 창문을 닦듯 서로의 눈동 -
[시로 여는 수요일] 바지락 끓이는 여자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6.09 06:00:00려원 이혼서류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여자는 바지락을 씻어요 조개들은 입술을 꽉 다물고 있어요 더 이상 밀물이 들지 않는 해안도 있다고 중얼거리는 냄비를 가스레인지에 올려요 결막염 걸린 눈은 수평선에 걸린 노을처럼 붉어요 조바심이 서서히 끓어오르기 시작해요 거품을 뱉어낸 조개들이 입을 벌리고 부글부글 소리를 내요 밸브를 잠그고 깨소금을 뿌려요 아뿔싸, 국물을 떠올린 숟가락에 가슴에서 부글부글 올라온 눈물이 -
[시로 여는 수요일] 우리 춤춰요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6.02 06:00:00이순화 쓸쓸하다는 말 대신에 사랑한다는 말 대신에 우리 춤춰요 그대를 멀리 두고 나는 여기서 스치는 바람과 춤춰요 떠도는 공기와 춤춰요 두 팔과 두 다리와 쓸쓸한 저녁과 춤춰요 찻잔과 연필과 식탁 위 시든 꽃잎과 나는 벌써 이렇게 취해 있는 걸요 어둠이 발등을 두 무릎을 적시기 전에 또 하루가 저물어 서쪽 별들이 벼랑 끝으로 몰리기 전에 모든 추락하는 것에 손을 얹어 춤춰요 그대를 멀리 두고 나는 여기서 내 긴 머 -
[시로 여는 수요일] 모란의 연(緣)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5.26 06:00:00류시화 어느 생에선가 내가 몇 번이나 당신 집 앞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선 것을 이 모란이 안다 겹겹의 꽃잎마다 머뭇거림이 머물러 있다 당신은 본 적 없겠지만 가끔 내 심장은 바닥에 떨어진 모란의 붉은 잎이다 돌 위에 흩어져서도 사흘은 더 눈이 아픈 우리 둘만이 아는 봄은 어디에 있는가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소란으로부터 멀리 있는 어느 생에선가 내가 당신으로 인해 스무 날 하고도 몇 날 불탄 적이 있다는 것을 불 -
[시로 여는 수요일] 맨발로 걸어보면 알 수 있는 것들 2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5.12 06:00:00최 영 맨발로 걸어보면 알 수 있다 나무들이 신발을 신지 않고 땅 속을 천천히 걷고 있다는 것을 맨발로 걸어보면 알 수 있다 꽃, 나비, 새, 바람, 하늘도 맨발이라는 것을 맨발로 걸어보면 알 수 있다 인간들만 신발을 신었다는 것을 꽃집에 가보면 알 수 있다. 꽃과 나무들이 신발을 신고 있다는 것을. 값싼 플라스틱 신발부터 고급 세라믹 신발을 신은 식물들이 화사한 여행을 꿈꾸고 있다. 아직 걸음이 서툴러 외발로 서 있지 -
[시로 여는 수요일] 우리나라 어머니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5.05 06:00:00김준태 우리나라 어머니는 당신 입맛 따로 없네! 시고, 짜고, 맵고, 달고, 쓴맛 가리지 않으시네 자식새끼 키우다 보면 신 것 좋아한 놈이 있고 짠 것 좋아한 놈이 있어 매운 것 좋아한 놈 있어 단 것 좋아한 놈이 있고 쓴 것 좋아한 놈이 있어 우리나라 어머니는 당신 입맛 따로 없네! 진 밥 무른 밥도 자식들 입맛에 맞추네 자식새끼 다섯이면 다섯 입맛 맞춰 주고 자식새끼 열 놈이면 열 놈 입맛 맞춰 사시네.다른 나라 어머니 -
[시로 여는 수요일] 들똥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4.28 06:10:00김혜수 꽃구경 나온 아낙이 무덤자락에 다급한 들똥을 눈다 뒤를 온통 들킨 들킨 줄도 모르는 이승이 저승을 향해 허연 볼기짝 치켜들고 끙끙댄다 완성되지 못한 문장 끝에 찍힌 물음표를 닮은 황금색 들똥 갓 지은 밥처럼 모락모락 김을 피워 올리며 무덤 한쪽을 뜨듯하게 데운다 간만에 친목회 대절버스 타고 꽃구경 나와 들똥을 누는 저 아낙도 누군가 내지른 물음표다 질문에 화답하듯 숲이 내지른 철쭉이며 산벚꽃이며 산수유 -
[시로 여는 수요일] 사월 비빔밥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4.20 11:16:57박남수 햇살 한 줌 주세요. 새순도 몇 잎 넣어주세요. 바람 잔잔한 오후 한 큰술에 산목련 향은 두 방울만 새들의 합창을 실은 아기병아리 걸음은 열 걸음이 좋겠어요. 수줍은 아랫마을 순이 생각을 듬뿍 넣을래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마음을 고명으로 얹어주세요. 햇살이야 얼마든지 목련잎으로 한 스푼 넣으렴. 새순이야 얼마든지 다래순, 찔레순 연두 연두하게 넣으렴. 나른한 오후엔 춤추는 수양버들 가지도 잠잠하게 해줄 -
[시로 여는 수요일] 니나노 난실로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4.14 05:40:00송진권 아니요 조금만 더 울고 갈게요 당신 먼저 가요 지금 나는 그때 내가 아니고 내 노래도 그때 부르던 노래가 아니죠 나를 살지 못해 나는 내가 아니었어요 당신도 그리웠던 당신이 아니었어요 신발 벗어 물에 띄우고 그림자 벗어 꽃 핀 나무에 걸어두고 꽃 꺾어 채에 달고 북 치며 가요 니나노 난실로 내가 돌아가요 명사십리 해당화는 벌써 다 졌어요 마량리 동백꽃도 다 떨어지구요 이 몸을 해가지고 내가 가요 니나노 난실 -
[시로 여는 수요일] 흰 눈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4.07 05:30:00공광규 겨울에 다 내리지 못한 눈은 매화나무 가지에 앉고 그래도 남은 눈은 벚나무 가지에 앉는다. 거기에 다 못 앉으면 조팝나무 가지에 앉고 그래도 남은 눈은 이팝나무 가지에 앉는다. 거기에 또 다 못 앉으면 쥐똥나무 울타리나 산딸나무 가지에 앉고 거기에 다 못 앉으면 아까시나무 가지에 앉다가 그래도 남은 눈은 찔레나무 가지에 앉는다. 앉다가 앉다가 더 앉을 곳이 없는 눈은 할머니가 꽃나무 가지인 줄만 알고 성긴 -
[시로 여는 수요일] 늦은 후회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3.31 05:50:00박현 문어는 닮아감이 두렵지 않아 옆에 선 이 생명의 은인 삼는다 검어졌다 희어졌다 빛이 바래도 제 본성 잃지 않고 의연히 산다 산사 가는 길가의 크고 작은 돌 나무를 건너뛰는 다람쥐 놈도 제 몫을 감당하고 당당히 산다 도무지 나란 인사 저만 못하여 나는 나일 뿐임을 자꾸 잊는다 내가 걸은 걸음 끝 남은 흔적이 얼마나 빛나는지 알려 않은 채 키 크고 번질번질한 사람 꼭 짚어 남의 빈주먹 크다고 부러워 운다 나는 나일 -
[시로 여는 수요일] 소의 입장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1.03.24 05:40:00허영자 아픔을 머금은 내 흰 피는 모두 어디로 흘러갔나? 우유라는 이름으로 불고기 육회 산적 너비아니 육포 장조림 떡갈비… 갈비탕 설렁탕 곰탕 내장탕 족탕 꼬리탕 사골탕… 스테이크 스튜 로스트 커틀릿 햄버그… 목심 등심 안심 채끝 우둔살 설도 사태 갈비 양지머리 앞다릿살 안창살 부챗살 살치살 업진살 토시살 치마살 제비추리 모두 인간들이 내 살과 뼈로 만들어 먹는 음식이고 입맛대로 조각조각 내 몸에 붙여준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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