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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최고의 상선?’ 사바나호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3.23 06:00:41예쁘면 돈이 들까. 그랬다. 화객선(貨客船) 사바나호((NS Savannaha)는 가장 강하고 아름다운 배로 손꼽혔지만 비쌌다. 건조비가 그렇거니와 운영비로 골머리를 앓았다. 사바나호는 등장할 때부터 화제를 뿌렸다. 첫선을 보인 시기가 1962년 3월 23일. 세계최대 조선소였던 뉴저지주 캄텐 조선소에는 사상 최초의 원자력 상선인 사바나호의 진수식을 보려는 관중들이 몰려들었다. * 드라이 도크를 빠져 나온 사바나호는 델라웨어 강에 사뿐히 떴다. 진수식을 지켜본 관중들은 탄성을 질렀다. 길이 181.66 m, 1만 3,599톤(총톤수 기준)의 거대한 하얀색 선체는 마치 요트처럼 미끈한 선체를 뽐냈다. 외양 뿐 아니라 내용도 근사했다. 당시 첨단기술이 총동원된 호화판. 영화관 두 개와 수영장에 도서관까지 딸렸다. 사바나호 건조는 홍보 전략에서 비롯됐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주창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국정목표를 알리는 데 원자력 상선만한 재료도 없었다. 화물선보다는 날렵한 여객선처럼 외양을 꾸민 이유도 전시효과를 노렸기 때문이다. 소련이 1957년 원자력 쇄빙선 ‘레닌호’를 띄운 것도 사바나의 건조계획을 앞당겼다. 건조 비용은 총 4,690만 달러. 요즘 돈으로 33억5,488만 달러(미숙련공 임금 상승률 기준)에 달하는 금액이다. 원자로 탑재 비용 2,830만 달러를 빼도 일반 상선의 네 배나 되는 비용이 들어갔다. 사바나호의 선주인 미국 수산청은 홍보용으로 십분 활용했다. 우리나라에도 1967년 여름 부산항과 인천항에 입항, 화제를 뿌린 적도 있다. 문제는 과도한 운영비. 폼 나는 유선형 구조를 고집한 탓에 선적 용량이 적어 일반 상선과 화물 운송료 경쟁에서 뒤질 수 밖에 없었다. 핵 안전교육까지 이수한 승무원 인건비도 일반 화물선 선원 평균의 세 배였다. 승객도 거의 유치하지 못했다. 초호화 시설을 갖췄어도 여객 승선 정원 60명을 채운 적이 거의 없었다. 승객들이 방사능 누출 가능성을 우려한 탓이다. 승무원 수가 승객보다 언제나 많았다. 마침 국제 유가도 저렴한 시대여서 화석 연료를 사용하는 일반 화물선보다 4배의 운영비 부담에 허덕였다. 연간 400만 달러의 적자에 시달리던 선주 미국 해양수산청은 급기야 1972년 운항을 중지시켰다. 퇴역한 사바나는 유사시 동원 상선으로 보관 중이다. 냉전 시기에 건조된 다른 원자력 상선도 비슷한 최후를 맞았다. 독일이 1964년 건조한 1만6,870톤급 원자력선 ‘오토 한’호 역시 경쟁에 밀려 1979년 동력원을 디젤엔진으로 바꿔 달았다. 수차례 이름이 바뀌며 1999년까지 운항되던 이 배는 2009년 고철로 인도에 팔려, 해체되고 말았다. 원자력 냉동선으로 1970년 건조된 일본의 8, 240톤 짜리 ‘무쓰’호는 반핵운동 때문에 시운전만 계속하고 상업운전에는 한 번도 활용되지 못한 채 1992년 생명을 잃었다. 건조에서 시험 운항, 해체에 이르는 25년 동안 일본이 투입한 직접 비용만 약 12억 달러. 현재 운행 중인 원자력 상선은 러시아의 쇄빙선 3척(3척 별도로 보관 중)이 전부다. 원자력을 동력으로 삼은 민간 선박은 비용 대 효율 측면에서 경쟁력이 없다고 판명됐지만 유가가 오를 때마다 원자력 상선을 건조하는 논의가 고개를 든다. 우리나라에서도 태평양을 나흘 만에 주파할 수 있는 초고속 초대형 30만톤급 원자력 컨테이너선을 건조해 해운 경쟁력을 높이자는 아이디어가 제시된 적이 있다. 원자력 상선 건조 논의에서 간과한 사실 하나. 민간 원자력 선을 운용했던 미국과 독일, 소련, 일본 등 네 나라가 원자로 해체 비용은 외부에 밝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예비역 민간 상선대에서 보관 중인 사바나호의 원자로에 탑재된 잔여 연료가 미미한 수준이나마 2030년까지 핵반응을 계속한다는 보고도 있다./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 * ‘사바나’라는 이름은 미국에서는 흔하다. 여성 이름 100위권에 들어있고 주마다 같은 이름의 도시가 적지 않다. 미국 원주민 쇼니(Shawnee)족에서 나왔다는 게 정설. 식민지 시절부터 가장 오래된 도시의 하나로 꼽히는 사바나시(조지아주)도 쇼니족의 근거지였다. 선박으로서 ‘사바나’도 원자력 상선이 처음이 아니다. 남북전쟁기에 남부군의 증기선과 철갑함, 냉전시기인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활약한 미해군의 4만톤급 유류보급함도 같은 선명을 썼다. 원조는 1818년 건조된 사바나호(SS Savannah). 증기선으로는 처음으로 대서양 항해에 나섰던 선박이다. 1819년 봄 미국 조지아주 사바나 항을 출발한 사바나호는 범선에 증기엔진을 단 기범선. 당초 쾌속 범선으로 설계됐으나 건조 도중에 탈착이 가능한 90마력 짜리 증기엔진 두 대를 설치하고 배의 양현에 외륜을 달았다. 먼로 대통령의 격려 속에 대서양 횡단에 나선 이 배는 29일 11시간 만에 목적지인 영국 리버풀항에 도착할 때까지 숱한 화제를 뿌렸다. 증기엔진의 힘으로 운항할 때(총 80시간)는 부근의 선박들이 사바나호에 불이 난 것으로 여기고 도와주려고 모여들었다. 선원들은 ‘우아한 바람’ 대신 소음과 연기를 내는 증기기관을 싫어했다고. 일부 영국인들은 불안에 떨었다. 프랑스의 지원으로 독립한 뒤 미영전쟁(1812년)의 앙금이 남은 미국인들이 세인트헬레나섬에 유배돼 있는 나폴레옹을 탈출시키기 위해 쾌속 증기선을 동원했다는 낭설이 퍼졌기 때문이다. 항해 도중 검문하려는 영국 해군을 속도로 따돌린 적도 있다. 소문과 달리 사바나호는 영국을 거쳐 스웨덴과 러시아, 노르웨이와 핀란드를 지나 미국으로 돌아왔다.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는 차르(황제)로부터 건조비용의 2.6배가 넘는 10만 달러에 팔라는 제의까지 받았다. 성공적인 항해와 달리 사바나호는 불운을 맞았다. 대화재와 불황이 겹쳐 증기 엔진은 제철소에 팔려나가고 헐값에 매각된 선박 자체도 1821년 암초를 만나 좌초하고 말았다. 사바나호는 짧은 생(3년)을 마쳤으나 두 가지 흔적을 남겼다. 미국 의회는 영국 증기선보다 17년(미국 증기선이 대서양 항로에 본격 투입된 시기는 사바나호의 항해 이후 30년 뒤부터다) 앞서 대서양을 항해한 사바나호를 기려 1933년 사바나호의 출항일(5월 22일)을 해운의 날로 정했다. 또 하나는 본문에 소개한 원자력 상선 사바나호. 세계 최초의 원자력 상선 ‘사바나호’의 이름에는 대서양을 증기선으로 처음 넘었다는 미국인들의 자부심이 깔려 있다. -
랜드 런, 톰 크루즈가 말 달린 이유는?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3.22 06:00:47‘초원의 집’과 ‘파 앤드 어웨이(Far And Away)’. 1972년부터 10년간 장기 방영된 미국 드라마와 1992년 할리우드 개봉작이다. 둘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땅(the land), 땅이 공통의 주제다. 일요일 아침마다 잔잔한 감동을 주던 ‘초원의 집’은 미국 정부가 거의 공짜로 불하한 공유지에 자리 잡은 개척민 가족의 얘기를 그렸다. 영화 ‘파 앤드 어웨이’는 땅에 대한 희망을 담았다. 니콜 키드먼에게 ‘땅이 없는 남자에게는 영혼도 없어요’라는 말을 듣고 낙심했던 가난한 청년 톰 크루즈의 몽환적인 상상 속에서 이 영화는 끝난다. 톰 크루즈의 상상은 단순한 망상이 아니라 실제였다. 땅을 원하면 먼저 깃발을 꽂는 사람이 임자이던 시절이 있었다. 가장 극적인 땅 불하는 1889년 오클라호마주에서 일어났다. 3월 22일 정오. 기병대 장교가 권총을 하늘로 들어 올렸다. ‘탕!’ 소리와 함께 대기 중이던 군중들은 말이나 마차를 몰고 전속력으로 뛰어나갔다. 좋은 땅을 찾기 위해서다. 오클라호마주 곳곳에 마련된 행사 장소에 모였던 사람은 무려 5만여명. 광활한 대지가 흔들렸다. 무엇이 사람들을 내달리게 했을까. 두 가지다. 땅과 선착순. 어떤 땅이든 먼저 깃발을 꽂는 자에게 내준다니 숨이 터져라 달렸다. 한 사람당 160에이커(약 19만 5,970평)씩 불하된 토지의 가격은 공짜나 다름없었다. 5년간 경작하면 토지 무상 불하. 6개월만 경작해도 에이커당 1달러 25센트라는 초저가로 토지를 구입할 자격을 줬다. 미개척지 불하의 법적 근거는 1862년 링컨 대통령이 만든 홈스테드법(Homestead Act·자영농지법). 자영농에게 토지를 불하하며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어 주목을 끌었지만 실은 해묵은 과제였다. 19세기초부터 요구가 많았다. 특히 개척민들의 목소리가 컸다. 공유지는 모든 미국인의 공유재산이니까 무상분배해야 한다는 개척민들의 요구는 통했을까. 반대다. 묵살됐다. 북부는 가뜩이나 모자란 공장 노동력이 서부로 이동할 것을 우려했다. 남부는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북부세력의 서부 확대를 도끼눈으로 쳐다봤다. 돈을 주고 토지를 사서 먼저 이주한 개척민과의 형평성도 문제로 떠올랐다. 지역별 계층별로 이해가 엇갈려 입법되지 않았던 법을 통과시킨 것은 전쟁. 남북전쟁이 터지자 링컨 대통령은 서부에 당근을 주고 정치적 지지를 얻으려는 계산에서 법을 통과시켰다. 남부의 탈퇴로 반대세력도 거의 없었다. 늘어나는 이민에게 일자리를 주고 동북부 산업자본의 공산품 수요기반을 조성하며 영토를 늘려줄 서부 개척을 촉진한다는 다목적 카드인 홈스테드법은 하원 107대16, 상원 33대7의 표 차이로 의회를 가볍게 통과할 수 있었다. 홈스테드법의 본격적인 실행 대상은 오클라호마주 일대 188만여 에이커. 1만 2,000여 가구가 땅을 얻었다. 단위 면적당 생산량을 오늘날 한국의 절반 이하로 잡아도 쌀로 친다면 가구당 2,500~3,000가마(80㎏들이 기준)의 소출을 낼 수 있는 농지를 얻은 꼴이다.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20세기 초반까지 이어진 랜드 런은 수많은 성공 신화를 낳았다. 1934년까지 농민들에게 불하된 땅은 남한 면적의 33배 규모인 2억7,000만에이커. 줄잡아 200만명 이상이 이 법의 혜택을 입었다. 미국 농업의 경쟁력이 여기서 나왔다. 농업기계화가 일찍이 달성된 것도 이 법으로 탄생한 수많은 대형농의 수요 덕분이다. 부작용도 따랐다. 미개척지의 사유재산화가 사적 무장을 낳고 총기 확산과 미국인의 호전적 기질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천석꾼 이상의 꿈을 안고 기름진 땅을 향해 달린 ‘랜드 런(Land Run)’의 이면에는 투기꾼들의 부추김도 있었다. 투기꾼들은 자원과 목재사업에 투자하기 위해 가족을 동원해 땅을 확보하거나 땅을 불하받은 정착민들을 꼬드겨 이면 약정으로 땅을 사들였다. 결과적으로 토지 불하자의 40%만 정착에 성공했다. 불하 면적과 랜드 런의 규모는 20세기 들어 작아지고 가격도 올랐지만 경제의 동력으로 폭발적 성장을 이끌었다. 유럽 기준이라면 영주에 해당할 정도의 기름진 내 농토를 소유할 수 있다는 희망은 끊임없이 밀려드는 이민행렬을 낳았다. 국제적인 명성도 얻었다.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가 홈스테드법과 랜드런을 모방했으니까. 백인들은 애써 감췄으나 아픔도 컸다. 가장 큰 피해 집단은 터전을 빼앗기고 학살당한 아메리카 원주민. 소유개념만 없었을 뿐 대대로 살아온 땅을 빼앗기고 쫓겨났다. 미국 정부가 촉토족과 체로키족 등의 거주공간이라고 설정한 인디언 준주마저 물밀듯 들어오는 백인들에게 내주고 말았다. 오클라호마주 사람을 일컫는 별칭이 ‘the sooners(먼저 차지한 사람들)’인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백인들의 희망과 성공의 이면에는 ‘언제나 먼저 빼앗긴 원주민들의 비극’이 깔려 있다./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
나폴레옹 법전…역사는 되풀이되나?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3.21 06:00:30‘평생 40번 싸워 이겼다는 명예는 워털루의 패배로 사라졌다. 그러나 영원히 남을 게 하나 있다. 그 것은 나의 민법전이다.’ 세인트헬레나섬에서 죽어가던 나폴레옹이 남긴 말이다. 군사전략의 천재라는 나폴레옹이 스스로 뽑은 최고 업적인 민법전은 이렇게 불린다. ‘나폴레옹 법전(Code Napoleon).’ 나폴레옹의 예견대로 나폴레옹 법전의 생명력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촉발된 전쟁을 경험한 유럽국가들은 물론 근대화에 나서는 국가들이 나폴레옹 법전을 모범으로 삼았다. 19세기 초반부터 독립운동을 펼친 중남미 국가들과 서구를 따라 가려는 중동국가들이 나폴레옹 법전을 모태로 국가의 틀을 짰다. 나폴레옹 법전의 최대 특징은 관습법을 폐지했다는 점. 성직자와 귀족의 특권을 인정하는 관습법을 아예 금지시켜 버렸다. 나폴레옹 법전 제정 직전 프랑스의 민법 체계는 한 마디로 우후죽순에 뒤죽박죽. 전국에 걸쳐 약 300여개의 민법이 통용되고 있었다. 북부는 고대 게르만족과 프랑크족으로부터 내려오는 관습법에 의존한 반면 이탈리아와 국경을 맞댄 남부는 로마법을 따랐다. 특히 결혼과 가정생활은 로마교황청의 통제 속에서 교회법을 준용했다.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수백 개로 분열된 프랑스의 사회통합을 위해 단일 법률이 필요하다는 견해는 진작부터 있었지만 막상 실행력은 권력으로부터 나왔다. 1799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자마자 나폴레옹 통령은 4명의 민법 전문가에게 이미 시행중이던 36개 법률을 합치는 작업을 맡긴 뒤 종신통령이던 1804년 3월 21일 ‘프랑스 민법전’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다. 특징은 세 가지. 소유권의 절대성과 계약의 자유, 과실책임주의를 담았다. 소유권을 인정한 대목은 근대 시민사회의 정착과 사유권 제도의 인정, 자본주의의 발달로 이어졌다. 나폴레옹 실각 후 봉건제로 회귀하려는 옛 토지귀족층의 집요한 노력이 실패한 것도 민법전이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소유권의 인정을 강조한 대목은 분량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전체 2,281개의 조문 가운데 ‘소유권의 취득’과 관련한 조항이 1,569개 조문에 이른다. 경제사가 윌리엄 번스타인은 역저 ‘부의 탄생’에서 개개인의 재산권을 지켜줄 법치제도의 유무야말로 나라의 흥망성쇠를 정하는 첫째 조건이라고 강조한다. 나폴레옹 법전은 피의 프랑스 혁명이 낳은 자본주의적 유산인 셈이다. 나폴레옹 법전은 간결하고 논리적인 문체로도 유명하다. ‘적과 흑’을 쓴 문호 스탕달이 문장연습을 위해 매일 읽었을 정도다.* 이름도 많다. 제정 당시에는 ‘민법전’으로 불리다 ‘나폴레옹 법전’(황제 즉위)을 거쳐 ‘프랑스 민법전’(나폴레옹 실각)으로 되돌아 온 뒤에도 ‘나폴레옹 법전’(나폴레옹 3세 등극)과 ‘민법전’(3공화국 출범)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나 ‘나폴레옹 법전’으로 통칭되고 있다. 나폴레옹 법전은 영속성으로도 이름이 높다. 나폴레옹 시대에 제정된 민사소송법(1808), 상법(1807), 치죄법(治罪法·1808), 형법전(1810) 등도 한때 나폴레옹 법전이라는 명칭 아래 포함됐었으나 무도 사라지거나 크게 개정되고 온전히 남은 것은 민법전 하나 뿐이다. 제정 당시 2,281개 조가 1971년과 1976년에 부동산개발 계약과 공유재산권 행사와 관련된 2개조가 추가돼 2,283개 항으로 늘어났을 뿐이다.** 프랑스에서도 나폴레옹 법전을 손봐야 한다는 움직임이 없지 않았다. 1904년 법 제정 100주년을 맞이해 61명의 위원회가 구성됐으나 반대가 더 컸다. 1926년에는 프랑스·이탈리아 공동의 민법안이 마련됐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2차대전 이후 드골 대통령이 마련했던 민법개정안도 의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자고 나면 법을 고치고, 정부 입법이 막히면 ‘여야 의원들을 꼬셔 의원입법’으로 법을 쏟아내는 풍토에서 보자니 부럽다. 뿐이랴. 죽었거나 시민들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는 법들도 생겨나고 있는 판국이니…. 루이 나폴레옹과 그 조카인 나폴레옹 3세 시대를 연구했던 한 철학자 겸 경제학자가 남긴 말이 귓전을 어지럽힌다. ‘역사란 가끔 되풀이되는데 처음에는 비극으로, 나중에는 희극으로 찾아온다’./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 반대 견해도 있다. 스탕달이 나폴레옹 법전을 매일 탐독한 진짜 이유는 문장을 배우거나 익히기 위해서라 아니라 무미건조한 법 조항을 읽으면서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서라는 견해가 존재한다. ** 실제로는 프랑스 민법의 조항이 더욱 많다고 한다. 부득이한 경우 기존의 조문에 ‘항(項)’을 붙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골격은 유지되고 있다. -
금수해제…파티는 끝났나?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3.18 06:00:001974년 3월 18일, 오스트리아 수도 빈. 세계가 숨을 죽이고 한 사람의 입을 지켜봤다. 아메드 자키 야마니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상. 사진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가운데 야마니가 입을 열었다. “석유 수출국기구(OPEC) 회원국들은 원유 가격을 동결하고 미국에 대한 석유수출금지도 해제합니다.” 인류가 동시에 겪은 최초의 에너지 위기인 제 1차 석유위기는 이날을 고비로 진정 국면에 들어섰다. 1973년 10월 발발한 4차 중동전 이래 아랍국가들을 중심으로 산유국들이 석유자원 무기화를 선언한 지 5개월 만이다. 석유금수 해제를 주도한 나라는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 빈 회의에 참가한 9개 아랍산유국기구(OAPEC) 가입국 가운데 쿠에이트와 리비아 등 5개국이 가격 인상을 주장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가격동결과 금수해제 방안을 이끌어냈다. 석유 무기화의 제안자이며 최대 수혜자였던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이 더 이상의 석유위기는 오히려 해가 된다며 ‘아랍 형제국’들을 적극 설득한 점도 해제 결정의 뒷심으로 작용했다. 사다트의 설득 논리는 이랬다. ‘감산과 가격 인상을 계속하는 한 숨어 있는 기름과 새로운 유전이 나오게 돼 있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시장을 잠식 당할 뿐이다.’ 이게 먹혔다. 1차 석유위기는 불과 5개월 만에 끝났지만 세계경제에 막대한 타격을 안겼다. 친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석유수출을 막은 1973년 10월 중순 이래 인상 폭은 무려 4배. 배럴당 3.01달러에서 11.65달러로 치솟았다. 소비국들은 인플레이션 심화와 국제수지 악화, 불황과 실업 증가라는 사중고를 겪었다. 미국의 소비자들도 타격 받았다. ‘대미 석유수출을 금지한 탓에 한 겨울에 폐업하는 주유소들이 늘어났다. 소비자들은 수십 ㎞씩 이동해 겨우 찾아낸 휘발유 판매 주요소에서 장시간 줄을 서서 기다렸다. 기름을 찾으러 돌아다니고 추위에 차 안에서 난방을 킨 채 기다리느라 휘발유 소비는 오히려 더 늘었다.’(앤선니 샘슨 저 ‘석유를 지배하는 자들은 누구인가’에서) 산유국들은 돈을 벌었을까. 글쎄다. 물론 겉으로는 수입이 많아졌다. 산유국들의 석유수출 수입이 1972년 230억 달러에서 1977년 1,400억 달러로 늘어났어도 외화내빈. 두 가지 경로를 통해 오일 달러는 다시 미국으로 되돌아갔다. 첫째는 환율 변동. 달러 가치가 떨어지니 실질 소득이 줄었다. 두 번째는 무기 판매로 미국은 막대한 무기를 중동에 팔았다. 이스라엘은 미국제 고성능 무기가 이슬람 국가에 넘어갈 때마다 미국에 항의했으나 미국제 무기는 주로 내란이나 자국민 탄압, ‘이슬람 형제국끼리 전쟁’에 쓰였다. 정작 돈을 번 당사자들은 석유 메이저와 일본. 미국 5개사, 영국·프랑스 1개사씩 ‘세계를 움직이는 7공주(the seven sisters)’라고 불리던 7개 국제 석유메이저들은 판매량이 줄었어도 마진폭이 커져 돈 방석에 앉았다. 세계적인 석유 위기와 절약 분위기는 일본산 소형차와 절약형 가전제품군에게 세계로 파고드는 계기를 안겨줬다. ‘가볍고 짧으며 얇고 작은’ 이른바 경단박소(經短薄小)의 일제 전자제품은 이후 20여년간 세계시장을 휩쓸었다. 일본이 거둔 이익은 ‘새발의 피’였다는 시각도 있다. 경제사가인 윌리엄 앵달은 저서 ‘석유 지정학이 파헤친 20세기 세계사의 진실’에서 석유파동을 야기한 1973년의 4차 중동전 발발 5개월 전에 미국과 영국의 석유·금융자본이 모여 유가의 4배 인상에 따른 국제금융의 틀을 미리 짰다는 점을 관련 문서를 들어 강조한다. 미국과 영국이 주도하는 앵글로 색슨의 세계지배 전략의 하부구조로 석유위기가 빚어졌다는 것이다. 언론인 출신인 제임스 노먼은 한 걸음 더 나간다. 원유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헤게모니를 다룬 책 ‘오일 카드’에는 1980년대 저유가·저환율·저금리의 3저 시대가 산유국으로 부상한 소련의 해체를 앞당겼다는 대목이 나온다. 노먼이 지목한 다음 차례는 중국이다. 원유 관련 저자 가운데 가장 중립적이고 권위를 인정받는 다니얼 예긴도 1992년 논픽션부문 플러처상을 수상한 명저 ‘황금의 샘(원제 prize)’에서 석유위기는 중동 산유국끼리의 주도권 쟁탈과 석유 이권을 지키려는 강대국이 이해 다툼을 벌인 결과로 풀이했다. 리처드 하인버거는 1차 석유 위기를 ‘황금 시기가 마무리된 사건’이라며 인류는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탄탄한 성장 가도를 달리던 시대가 종말을 맞이했다고 봤다. 두 차례 석유파동에서 탄화수소(석탄에서 석유까지 광물자원) 시대의 마무리를 예견한 그가 쓴 책의 제목은 유명한 문구로 굳어졌다. ‘파티는 끝났다(the Party is over)’ 정말로 파티가 끝났을까. 과거 같으면 저유가는 무조건 좋은 신호였는데 오늘날 저유가를 걱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세상은 석유위기 당시보다 나아졌은가. 국제 원유가격을 끌어내린 미국의 오일샌드는 환경 파괴 논란에도 위력이 여전하다. 대체에너지 개발 의욕도 꺾였다. 산유국들은 사다트 대통령이 빈 회의 즈음에 강조한 ‘숨어있는 석유의 저주’가 주는 직격탄을 맞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의 올해 적자 예상액은 1,000억 달러에 근접한다. 지금 속도로 까먹다간 사우디의 외환보유액 6,160억 달러도 5년 후 소진된다는 경고도 나왔다. 석유라는 관점에서만 볼 때 변하지 않은 것은 하나 뿐이다. 앵글로 색슨의 지배력. 석유 위기를 맞았던 한국은 사정이 어떠했을까. 어려웠다. 1973년 14.9%를 기록했던 경제성장률이 1974년 8.0%, 1975년에는 7.1%로 떨어졌다. 국제수지 적자폭도 5억6,000만달러에서 19억3,000만달러로 확대되고 도매물가가 42.1%, 소비자물가가 24.3%씩 올랐다. 사회도 어지러웠다. 정권을 비판하는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 중앙정보부를 동원한 광고탄압에 동아일보가 무릎을 꿇던 봄의 입구에서 정부는 서민들을 달래기 위해 세제개편안을 내놓았다. 종합소득세 도입(실제 도입은 1976년)을 발표하며 내건 정책목표가 소득재분배와 공평 과세였다. 42년 전의 정책 목표가 오늘날 어디쯤 있는지 모르겠다. 다행이었던 점은 솟아날 구멍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중동 특수를 타고 벌어들인 오일 달러로 당시 우리 경제는 탈출구를 찾았다. 그렇다면 요즘은? 경제의 어려움을 타개할 대안이 절실하다. ‘대박’이라던 통일의 가능성도 개성공단 폐쇄로 엷어진 마당이니…. 파티는 정말 끝났나?/권홍우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hongw@@sed.co.kr -
고무줄 잔혹사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3.17 06:00:00고무줄이 없는 세상. 상상이 잘 안된다. 생활과 너무도 밀접하기에…. 고무줄이 없었다면 아이들도 제대로 키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기저귀에서 고무줄 놀이, 새총, 머리 끈에 이르기까지 고무줄에 의존했었으니까. 어른들의 세상도 마찬가지다. 물건을 간단하게 모으는 데서 치과 치료까지 고무줄의 쓰임새는 넓고도 넓다. 간단하면서도 생활 편의를 주는 고무줄을 사용한 세월은 길게 잡아야 200여년 안짝. 서구에 고무가 전해진 시간을 헤아려도 523년에 불과하다. 유럽의 관점에서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가 2차 항해(1493년)에서 이스파뇰라섬(아이티와 도미니카공화국)의 원주민들이 갖고 노는 고무공을 본 게 서구문명과 고무와의 첫 만남이었다. 탄력이 뛰어난 물질 정도로만 인식되던 고무가 생활의 도구로서 들어온 시기는 18세기 중반 무렵. 영국에서다. 영국인들은 고무를 문지르면 연필로 쓴 문서를 지울 수 있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챘다. 고무의 영어 이름 ‘rubber’가 여기서 나왔다. ‘문지르다’의 뜻의 ‘rub’에 기능격 접사(er)을 붙인 것. ‘rubber’라는 단어를 공식적으로 처음 사용한 사람은 산소의 존재를 발견한 과학자이자 신학자, 유물론적 철학자, 자유주의 정치학자로 유명한 조지프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 1733 ~1804)라는 설이 유력하다. 지우개로서 기능을 확인한 고무는 용도를 넓혀나갔다. 프랑스 몽골피에 형제는 1783년 비단에 고무를 입혀서 만든 기구를 하늘에 띄웠다. 남아메리카 원주민을 본받아 고무 덧신과 고무병도 선보였다. 오늘의 주제인 고무줄이 바로 고무병에서 비롯됐다. 영국의 고무산업을 일으킨 인물로 평가받는 토머스 핸콕이 1823년의 어느 날 고무병을 얇은 폭으로 잘라 여러 용도로 요긴하게 써먹었다는 게 시초다. 핸콕은 증기기관차 제작자이며 고무절단기의 발명가인 동생 월터와 함께 형제 발명가로 이름이 높았어도 정작 독점권은 챙기지 못했다. 특허권을 가져간 인물은 스티븐 페리(Stephen Perry). 핸콕의 공장에서 일했다고 전해지는 페리는 1845년 3월 17일, 영국 특허를 따냈다. 페리의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고무줄은 생활 곳곳으로 파고 들었다. 연필 지우개와 쿠션의 기능을 넘어 의복과 포장, 사무실의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다. 고무의 수요증대는 생각하지도 못한 효과도 낳았다. 국제 정치와 노동력 이동에도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마침 미국인 발명가 찰스 굿이어가 1839년 발견한 가황처리법이 퍼지던 상황. 천연고무에 유황을 섞어 가열해 탄력과 딱딱함을 갖춘 고무가 등장하며 각종 기계류의 충격 흡수재는 물론 자전거와 자동차용 수요까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수요는 공급을 부르는 법. 고무가 돈이 된다는 사실에 주목한 영국인들은 브라질에서만 자라던 고무나무 종자를 대량으로 밀반출해 온실에서 묘목을 키운 뒤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등지에 거대 농장을 차렸다. 선진국 자본이 열대지역에 투자되는 플랜테이션 농업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퍼졌다. 현지인 인력이 딸리자 영국은 중국인들을 꼬셨다. 중국 남부의 노동자들의 대거 이주로 거대한 동남아 화교집단이 형성된 게 바로 이 시기다. 동남아로 이주한 화교들은 초기에 극심한 고생을 겪었으나 그래도 사정이 나은 편. 아프리카에서는 고무나무 잔혹사가 펼쳐졌다. 겉으로는 리빙스턴과 스탠리의 ‘국제 아프리카 문명탐험대’를 후원하는 인도주의자로 행세했지만 속으로는 아프리카 중부에 거대한 사적(私的) 식민지를 구축한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는 잔혹하게 고무를 짜냈다. 벨기에 본토의 80배가 넘는 아프리카 콩고 일대를 손에 넣은 그의 대리인들은 상아와 고무·야자유 채취 할당량에 미달하는 원주민의 손발을 생으로 잘랐다. 아담 호크쉴드 교수(UC버클리대)는 저서 ‘레오폴드왕의 유령’을 통해 벨기에가 이 지역에서 학살 당한 원주민을 1,000만명으로 추산한다. 철저하게 수탈 당한 콩고의 역사는 과거형일까. 형태만 달라졌을 뿐 지금도 진행 중이다. 콩고와 르완다 일대는 20세기 초까지 지역간 종족간 갈등이 없던 지역이었으나 벨기에가 식민통치를 위해 부족간 분열책을 쓴 결과 종족간 증오심이 싹트고 걸핏하면 인종 청소경쟁이 일어나고 있다. 상대 부족의 손목을 자르는 야만적 행위도 벨기에 식민수탈이 남긴 유습이다. 고무를 얼마나 짜냈는지 이 지역의 고무 나무는 이미 20세기 초반에 씨가 말랐다. 각국은 오스트레일리아와 남아메리카에도 고무나무 이식을 추진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오늘날에는 전세계 고무나무의 90% 이상이 타이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에서 자란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서쪽으로 계속 진군한 데에도 보르네이의 석유와 말레이시아의 고무를 차지하겠다는 자원에 대한 열망도 깔려 있었다. 군 장비를 개발하고 유지하는 데 고무는 어느덧 필수재로 자리 잡았던 까닭이다. 수요는 발명을 촉진한다고 일본의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점령은 미국을 자극해 합성고무의 탄생을 앞당겼다. 2차 대전 동안 미국이 전략물자용으로 개발한 합성고무는 오늘날 전세계 고무 수요의 약 75%를 차지하지만 넘보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 고무줄만큼은 여전히 천연고무에서만 나온다. 탄성이 커야 하기 때문이다. 고무줄은 어디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어도 거대 소비자는 따로 있다. 세계 최대의 고무줄 소비자는 미국 우체국과 포장업체들이다. 고무줄의 용도가 더 늘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마치 고무줄처럼…. 아프리카에서도 고무 생산이 다시 늘어날 것이라는 소식도 들린다. 기술 새치기와 씨앗 훔치기, 노동력 빼앗기로 점철된 고무줄과 고무의 역사가 반복되지는 않겠지만 확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고무를 서구에 알려준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고무나무를 ‘카우축(caoutchouc)’라고 불렀다고 한다. ‘눈물 흘리는 나무’라는 뜻이다. 고무에는 눈물이 담겨 있다./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
망국의 회한이 서린 손탁호텔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3.16 06:00:00피아 구분 없이 모이고 친미·친러파 대신들이 친일파로 변해간 공간이 있다. 고종과 독립협회의 우국지사는 물론 이토 히로부미와 재정고문 재임 3년간 대한제국의 재정을 거덜 낸 메가타 다네타로도 이 곳에서 편히 쉬었다. 여기는 어디인가. 이름이 많다. 손택부인가(孫澤夫人家), 손택저(孫澤邸), 손택양저(孫澤孃邸), 손탁빈관(孫澤賓館), 한성빈관, 손택낭저(孫澤娘邸), 손택양가(孫澤孃家), 손택양씨가(孫澤孃氏家), 손택양사저(孫澤孃私邸), 손택양저(孫澤孃邸), 손택양관저(孫澤孃館邸), 손택양여관(孫澤孃旅館), 궁내부 용달여관(宮內部 用達旅館), 정동화부인가(貞洞花夫人家), 정동화부인옥(貞洞花夫人屋), 정동화옥(貞洞華屋)…. * 무수히 많은 이름들은 한 건물을 지칭한다. 손탁호텔. 프랑스계 독일 여성 앙트와네트 손탁(Antoniette Sontag, 1854~1925)이 운영한 호텔이다. 프랑스인으로 태어났으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1871)으로 알사스 지방이 독일에 병합되며 독일인으로 국적인 바뀐 손탁의 개인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거의 없다. 주한 러시아 공사 위베르를 따라 1885년 한성에 들어왔다는 정도가 전부다. 조선 땅에 처음 발들일 당시 미혼이었는지 미망인이었는지, 이혼녀인지도 불확실하고 한자의 가차(假借)로 표시되는 조선 이름도 많았다. 손택(孫澤 또는 孫宅), 송다기(宋多奇), 송탁(宋卓)…. 확실한 점은 당시 나이. 31세였다. 한자로 표시되는 이름과 영업점의 상호가 많았다는 점은 조선사회가 그에 대한 관심이 많았음을 보여주지만 통용되는 이름은 따로 있었다. ‘미스 손탁(Miss Sontag).’ 위베르의 처형인지, 사촌 처형인지도 불분명했으나 그는 프랑스어와 독일어, 영어에 능통하고 조선말도 익혀 조선에서의 입지를 넓혀 나갔다. 손탁의 손을 거친 서양식 요리에 맛들린 고종은 그를 각별하게 여겨 궁내부 관원 자리도 내줬다. 명성황후도 서양 소식을 들려주고 화장술까지 알려주는 손탁을 총애했다고 전해진다. 자연스레 조선에서 손탁의 입지는 점점 변해갔다. 음식을 만드는 찬모(饌母)에서 왕실의 참모(參謀)로. 고종은 손탁에게 정동의 방 5개짜리 한옥까지 내려줬다. 내부를 서양식으로 고친 손탁의 집은 곧 한성 외교가의 사교장으로 바뀌었다. 명성왕후를 잃고 불안해하던 고종이 거처를 러시아대사관으로 옮긴 아관파천에도 손탁이 간여했다는 주장이 있다. 휴가차 약 2년 유럽에 다녀온 손탁은 왕실로부터 더욱 큰 환대를 받았다. 환궁한 고종은 손탁에게 1898년 3월 16일자로 ‘노고에 보답하는 뜻(以表其勞事)’이 담긴 ‘양관하사증서’를 내리고 1902년에는 서양식 벽돌건물도 지어줬다. 근대식 호텔인 손탁빈관은 사무실이 없던 독립협회 지도자들도 애용했다.** 일본을 견제하려는 친미파와 친러파들의 모임인 정동구락부(貞洞클럽)도 주로 손탁빈관에서 모임을 가졌다. 일본을 배격하려던 이완용 등 젊은 관료들은 얼마 안 지나 친일파로 변해 일본 편에 섰다. 우국지사들이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던 손탁호텔도 친일파들의 소굴로 바뀌어 갔다. ‘미스 손탁’도 마침내 조선 땅을 뜨기로 마음 먹었다. 1909년, 손탁은 호텔을 프랑스인이게 팔고 조선을 떠났다. 귀국할 때 나이가 55세. 24년을 머물며 손탁은 적지 않은 재산을 모았다고 전해진다. 왕실의 서양 물품 구입에 모두 관여하고 왕실 소유 재산을 하사받아 매각하는 방식으로 돈을 불렸다. 손탁은 ‘부정하게 돈 벌었다’라는 질시를 못마땅하게 여겼다지만 ‘망해가는 조선을 위한 벽안의 동지’는 결코 아니었던 것 같다.*** 손탁의 단골 중에는 일본인들도 적지 않았다. 대한제국의 재정을 말아먹은 탁지부 고문 메가티는 손탁호텔에서 황실의 돈으로 마음껏 마시고 먹었다. 이토가 투숙하며 조선 대신들을 불러내 회유, 협박한 장소도 손탁호텔이다. 깨끗하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다. 고종의 독일인 의사 리하르트 분쉬의 일기에는 손탁이 의료 계산서를 위조해 1,000원씩 단위로 궁정 돈을 타냈다는 대목이 나온다. 관찰사(도지사격) 월급이 40원, 군수가 28원이던 시절, 1,000원이면 대단히 큰 금액인데 손탁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는 것이다. 손탁의 행적은 조선 땅을 떠나서도 불분명하다. 프랑스 칸느에서 여생을 보내려 했건만 조선에서 모은 돈을 예금했던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생하는 통에 빈털터리로 전락해 객사했다는 설 이외에 알려진 게 없다.**** 세월이 흘러 손탁도 손탁호텔(이화 100주년 기념관 자리가 손탁호텔 터)도 흔적조차 없으나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성향은 비슷해 보인다. 친미와 친러, 친일로 변신하며 살아남아 떵떵거리는 자들과 일개 찬모에 휘둘렸던 국왕,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과연 무엇이 다를까. 한국어를 구사하는 서양인이면 연예인급의 조명을 받는 세태…. 종족의 부끄러운 단면이 참으로 끈질지게 이어진다./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 이순우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지음, 손탁호텔 143쪽 ** 손탁호텔을 국내 최초의 서양식 호텔로 소개하는 책자도 있으나 실은 개항장인 제물포(인천)에는 1884년부터 4~5개의 소규모 서양식호텔이 선보였다. 한성에서도 서울호텔과 팔레호텔 등이 있었다. ‘최초’라는 점보다는 정치인들이 모이고 권력의 변화에 따라 손님의 주류도 같이 변해간 역사의 현장이라는 점에서 손탁호텔은 의미가 있다. *** 손탁이 조선을 도왔다는 인식은 결정적으로 1976년 국립극장에서 초연된 이래 뮤지컬로도 제작된 희극 ‘손탁호텔’의 영향이 커 보인다. 극에서는 서재필을 남성으로서 흠모한 손탁이 독립신문 3,000부 돌파 연회를 손탁호텔에서 개최한다는 설정이 나오지만 설정일 뿐이다. 한성에서 지내던 24년간 손탁의 염문은 발견되지 않는다. 유별나게도 손탁호텔과 관련해서는 검증되지 않는 자료들이 많이 돌아다닌다. 조선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라는 평가는 약과에 불과하다. 영국 수상을 지낸 윈스턴 처칠이 신문기자 시절 묵었으며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도 투숙객이라는 기록이 신문매체를 비롯해 여기저기에서 발견되지만 근거를 찾을 수 없었다. **** 다만 객사설은 친러시아파가 분명했던 손탁에 대한 반감이 컸던 일본인들이 남긴 기록에 의한 것이어서 의심의 여지는 있다. 손탁이 양자로 삼아 한성을 떠날 때 데리고 갔던 조선인 청년은 훗날 고국으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 역시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없다. 손탁은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유력 양반가문에도 ‘딸을 내어주면 양녀로 삼겠다’는 제의를 했는데 그 가문은 ‘이렇게 어지러운 세상에 사느니 차라리 서양인의 양녀로 들여보낼까’라고 고민했던 기록이 있다. 손탁의 양반가문 여식 양녀 입양은 성사되지는 않았다. -
미군 쿠데타 미수 사건 - 워싱턴은 왜 국부로 추앙받는가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3.15 06:00:00미국 건국(1776년) 240주년, 대륙군(Continental Army·미군의 전신) 창설로부터는 241년 동안 이어지는 기록이 하나 있다. 무(無) 군사정변. 미국 정부나 미군, 정보기관이 외국에서 쿠데타(coup d’Etat)를 사주한 적은 있어도 본토에서는 한 차례도 없었다. 다만 시도는 없지 않았다. 크게 세 차례. 독립전쟁 막바지인 1783년, 남북전쟁 직후인 1866년 북군 청년 장교들의 모의, 급격한 개혁을 추진하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사상을 의심한 군 장성들의 1934년 쿠데타 기도 등의 고비를 미국은 넘겼다. 공통점은 하나같이 돈과 관련 있었다는 점. 대륙군의 엘리트 장교들이 주동이 된 1783년의 ‘뉴버그 음모(Newburgh Conspiracy)’는 더욱 그랬다. 최초의 쿠데타 시도인 뉴버그 음모의 실패는 민주주의 전통의 확립과 더불어 잘 보이지 않는 두 가지 흔적을 남겼다. 첫째, 미국에서 쿠데타가 발생하지 않는 모범으로 작용했다는 점. 둘째로는 ‘국부 워싱턴’이라는 빛나는 유산을 얻었다. 최고사령관 워싱턴 장군이 군의 정당한 불만을 슬기롭게 제어한 덕분에 미국의 민주주의가 안착하고 ‘문민 통제의 우위’가 확고하게 뿌리내렸다. 타임머신을 타고 233년 전인 1783년으로 되돌아 가보자. 대륙군 사령부가 위치한 뉴버그(Newburgh·오늘날 뉴욕주 오렌지 카운티 뉴버그시)가 부글부글 들끓었다. 세계 최강 영국과 독립전쟁을 벌인지 8년째. 평화와 봄이 목전에 왔건만 군인들의 마음은 평화도 봄도 아니었다. 앞길이 막막했던 탓이다. 봉급은커녕 약속했던 연금마저 불투명한 터에 종전으로 군의 해체를 앞뒀던 상황. 불만과 위기감이 급속도로 퍼졌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젊은 시절을 굶주리고 헐벗은 채 전쟁터에서 보냈다는 말인가.’ 불만은 시간이 흐를수록 무력을 갖고 있을 때 행사하자는 방향으로 모여졌다. 쿠데타! 대륙군의 불만은 당위성이 있었다. 영국군과 독일용병 8,081명을 포로로 잡고 대포 244문과 소총 수만정을 노획하는 대승을 거둔 1781년 10월 요크타운 전투 이후 전황은 사실상 소강 상태. 한때 104개 대대에 달했던 대륙군 병력도 차츰 줄어들고 간헐적인 소규모 전투만 벌어지는 가운데 대륙군에 돈이 떨어졌다. 물론 자금난은 어제 오늘의 상황이 아니었다. 독립 13개주의 연합체인 대륙회의가 중앙정부처럼 존재했어도 요즘의 국제연합(UN)같이 징세 권한은 없던 터. 대륙회의가 1775년 특별 발행한 불태환지폐인 ‘컨티넨탈’은 1780년에는 액면가치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컨티넨탈 지폐를 봉급으로 받은 군인들의 삶은 더욱 곤궁해졌다. ‘쓸모 없다’는 뜻의 숙어 ‘As worthless as a Continental’(컨티넨탈 지폐처럼 가치 없는)이 생기는 마당에 대륙회의는 1780년 8월, 군인들의 불만을 무마하려 따른 카드를 꺼냈다. ‘당장은 돈을 못 주는 대신 전쟁이 끝나면 군이 해체돼 제대하더라도 평생토록 봉급의 절반씩을 연금으로 주겠다.’ 군인들은 워싱턴 사령관의 종용으로 대륙회의가 마련한 ‘평생 절반연금(half pay for life)’ 약속을 믿었지만 신뢰는 갈수록 얇아갔다. 13개주가 돈을 갹출하지 않아 대륙회의라고 방법이 없었다. 워싱턴 장군의 부관 출신인 알렉산더 해밀턴 등이 주도해 대륙회의가 관세를 걷어 군인들의 봉급을 충당하자는 방안도 12개 주가 찬성한 가운데 가장 작은 주인 로드아일랜드가 반대해 무산돼 버렸다. 애가 탄 장교들은 사령관인 워싱턴 장군에게 매달렸다. 워싱턴의 부관 출신인 루이스 니콜라 대령은 사령관에게 ‘왕관 편지(Crown Letter)’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될 편지를 보냈다. “온갖 어려움을 겪어온 군인들의 인내는 한계에 이르렀습니다. 군은 대륙회의가 군인들의 불만을 해소하지 않고 이전의 연금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전쟁이 끝나도 군을 해산하지 않을 것입니다. 동료 장교들은 ‘새로운 차원의 피와 혼란의 상태가 불가피하다’고 공공연히 말합니다. 저는 공화정이 좋지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모습에 실망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지금 이 나라에는 공화국의 지혜보다 군주국의 에너지가 훨씬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총사령관님께서 미국 최초의 군주가 되어주기를 간청합니다.”* 요컨데 ‘군의 쿠데타를 통해 왕으로 등극하라’는 요청을 워싱턴은 점잖은 어조로 물리치면서도 속으로 적잖게 놀랐다. 군의 불만을 익히 알고 있어 처우 개선을 위해 노력했었으나 엘리트 장교들까지 행동에 나서기 직전이라는 분위기는 몰랐기 때문이다. 니콜라 대령은 워싱턴 장군에게 세 차례 편지를 보내며 사죄했건만 정작 한번 표출된 장교단의 분통 터진 마음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 ‘워싱턴 장군은 너무 온건해 쿠데타를 도모할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장교들이 쿠데타의 상징으로 내세운 인물은 호레이쇼 로이드 게이츠(Horatio Lloyd Gates) 장군으로 대륙군이 거둔 최초의 의미 있는 전투인 사라토가 전투(1777년 9월)의 영웅. 대패를 기록한 캠던 전투(1780년 8월)에서는 비겁하게 패주했다는 비판에 시달렸던 그는 대륙회의 청문회에 섰으나 무혐의 판결을 받고 쉬다가 워싱턴의 지목에 의해 대륙군 부사령관으로 임명됐던 인물이다. 게이츠 장군은 남다른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그럴 만 했다. 군사적 경험이 많지 않은 민병대 출신의 대륙군 지휘부와 달리 그는 영국 정규군 경험을 갖고 있었다. 어머니가 영국 귀족의 가정부였던 연줄로 1745년 육군 중위로 입대한 이래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1748)과 7년 전쟁(1756~1763)에 참전, 유럽과 캐나다 전역에서 전쟁을 치른 영국군 소령 출신. 나이도 워싱턴보다 6살 많았다. 케이츠 장군을 축으로 하는 장교단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1782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고위 장교 3명을 대륙회의에 보내 ‘대륙회의가 관세안을 통과시켜 봉급과 연금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었는데 이젠 방법이 없다. 뉴버그에서 화약통이 폭발할 것’이라는 으름장을 놓았다. 상황은 도리어 더 나빠졌다. 대륙회의의 재정을 맡아 개인 신용으로 800만 달러를 짜냈던 로버트 모리스가 ‘더 이상 돈이 없다’며 두 손 들고 관세안을 비준했던 버지니아주와 뉴잉글랜드도 반대로 돌아서 연금을 받게 될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졌다. 평생 연금이 아닌 적절한 액수의 총액으로 수령하자는 대체안도 대륙회의에서 무산되고, 종전을 위한 강화회담이 열리던 프랑스 파리에서 타결 소식을 속속 들어오니 군인들의 머리는 ‘빈털터리로 군복을 벗는다’는 위기감으로 꽉 찼다. 워싱턴의 부관 출신으로 미리 제대해 대륙회의 의원으로 일하며 훗날 초대 재무장관으로 명성을 날린 알렉산더 해밀턴도 워싱턴에게 편지를 보냈다. ‘아무런 대책이 없이 평화가 온다면 군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할 수도 있고, 군대는 사령관님의 온건한 성향에 불만이 많다.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 달라’는 내용이었다. 위기가 짙어지고 대륙회의의 강경파 의원들은 대륙군의 쿠데타를 저지할 또 다른 군대의 소집을 준비하는 가운데 장교단이 익명의 성명서를 냈다. ‘우리에게 더 많은 인내심을 요구하는 사람을 의심하자.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선포돼 군대가 해산된다면 우리는 불응할 것이다. 우리는 뛰어난 리더의 지휘 아래 원하는 세상을 얻을 수 있다!’는 골자의 성명서는 장병들을 뒤흔들었다. 워싱턴 장군은 문제의 성명서를 명문이라고 평가하면서도 명령을 내렸다. ‘성명서에 적시된 화요일의 장교단 집회를 불허한다. 대신 토요일 집회를 허가하되, 본관은 참석하지 않는다. 사회는 게이츠 장군이 맡는다.’ 쿠데타 세력은 또 다시 성명서를 퍼트렸다. ‘마침내 워싱턴 사령관도 거사에 찬성하고 동참한다는 뜻을 밝혔다’라는 내용이 새로 들어갔다. 워싱턴은 과연 동조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회합을 나흘 뒤로 미룬 이유는 장교단의 분노를 한 숨 가라 앉히려는 전술이 숨어 있었다. 집회일이었던 1783년 3월 15일 회의에도 ‘게이츠 장군이 사회를 보라’고 했던 명령과 달리 워싱턴 자신이 직접 나타났다. 뉴버그 사령부의 회의장소로 쓰였던 ‘템플(temple)’이라는 건물(252㎡·약 76평)에 모인 장교들이 긴장한 순간, 워싱턴은 입을 뗐다. “나는 여러분의 헌신과 희생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명서는 이성과 선의보다는 감정과 울화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군과 시민을 분리시키는 게 옳다는 말인가요? 그 선동가의 말이 맞다면 우리는 자유를 잃고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될 것입니다. 대륙회의는 늦더라도 결국 정당하게 일을 처리해줄 것이라 믿습니다. 성장하는 이 나라를 내란에 빠트리지 맙시다.” 워싱턴의 연설에도 장교들은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되레 회의장에 불만의 기운이 감돌고 누군가 ‘사령관을 체포하라’고 선동한다면 먹혀 들어갈 분위기 속에서 워싱턴은 주머니에서 편지 하나를 꺼냈다. 군대의 불만을 해결하겠다는 내용이 적힌 대륙회의의 한 의원이 보낸 편지였다. 편지와 함께 워싱턴은 안경을 끼며 미안한 심정으로 양해를 구했다. “여러분! 내가 안경 쓰는 것을 이해해 주십시오. 조국을 위해 싸우는 동안 머리는 백발이 되고 눈은 장님이 될 정도로 침침해졌습니다.” 솔직하고 꾸밈없는 워싱턴의 말 한마디는 장교단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말보다 장면이 먹혀들었다. 총사령관이 안경을 쓴 모습을 처음 본 장교들은 속으로 흐느꼈다. 편지 낭독을 마친 사령관은 모든 것을 장교단의 뜻에 맡긴다며 회의장을 떠났다. 장교들은 결국 쿠데타 계획을 접었다. 군대가 쿠데타 계획을 포기했다는 소식을 들은 대륙회의는 군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려던 계획을 백지로 돌렸다. 훗날 미국의 4대 대통령에 오른 제임스 메디슨은 이날의 사건을 ‘하늘 가득 모였던 전쟁의 먹구름이 가셨다’고 일기에 썼다. 며칠 뒤 대륙회의는 장교단에 제안 하나를 내놓았다. 대체안을 실행하되 앞으로 구성될 연방 정부가 지급 능력을 갖출 때 상환하는 유가증권으로 5년간 지불을 유예한다는 내용이었다. 군은 이를 받아들였다. 만약에 워싱턴이 왕이 되려고 했거나 쿠데타를 방조했다면 역사를 어떻게 흘렀을까. 미국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작가인 스티븐 엠브로스가 지은 ‘만약에’의 한 토막. ‘만약에 조지 워싱턴이 뉴버그의 음모를 저지하지 못했다면?’편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워싱턴이 군대의 마음으로 돌려 놓는데 실패했다면 독립전쟁은 복잡하게 얽힐 수도 있었다. 군은 의회로 진군해 총 뿌리를 겨누고 계약조건을 강요했을 것이다. 주(州)들은, 특히 버지니아와 메사추세츠 같이 큰 주들은 그런 강압적 거래의 승인을 거부했을 것이다. 군대가 복종을 강요하라고 시도했다면 내란이 발발했을 것이다. 불안정한 아메리카 연방은 붕괴되고 뉴욕에 함대와 지상군을 주둔시켰던 영국군은 당연히 전쟁을 재개하려고 했을 것이다. 어떤 주는 영국 편으로 되돌아가고, 뉴저지와 뉴욕같이 영국을 강력히 지지하는 몇몇 주들은 무법의 대륙군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영국군과 방어동맹을 맺을 것이다. 이런 위기는 결국 아메리카의 독립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총사령관 워싱턴은 1783년 11월 말께 영국군이 뉴욕에서 물러난 뒤 12월 고별 연설과 함께 대륙회의에 칼을 반납하고 민간인으로 돌아갔다. 군권을 쥐고 있던 워싱턴이 민간 정부에 모든 것을 돌려준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영국 국왕 조지 3세는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미 합중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된 뒤에도 워싱턴은 3연임을 바라는 청원들을 민주주의의 장래에 해가 될 수 있다며 물리쳤다. 국가의 비밀을 지키려 자서전 집필도 마다한 채 죽을 때까지 그는 농부로 살았다. 토마스 제퍼슨(초대 국무장관, 3대 대통령)은 이런 말을 남겼다. “단 한 사람의 자제와 덕성이 대부분의 다른 혁명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려는 자유를 파괴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과 달리 우리의 혁명이 그렇게 막을 내리는 것을 막았다.” 워싱턴 한 사람으로 인해 신생 국가 미국은 쿠데타와 왕정 국가 수립을 피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미군 쿠데타 미수 사건을 뒤지며 233년의 시차를 넘어 이 땅을 생각한다. 대비된다. 집권을 위해 민족에 반역한 친일파를 중용하고, 영구집권을 노려 전쟁의 와중에서도 국회를 군경으로 포위한 채 수학의 일반원칙까지 뛰어넘는 해괴한 산식(사사오입)으로 헌법을 뜯어고쳤던 어느 초대 대통령과. 쿠데타로 점철된 이 땅의 역사는 또 어떤가. 미국인들이 워싱턴을 국부(國父)로 존경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부럽다. 참 부럽다./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 편지 내용은 한국서양문화사학회 발간 서양사학연구 제 36집(2015년 9월) ‘독립전쟁기 뉴버그 쿠데타 음모 미수 사건과 조지 워싱턴(The Newburgh Coup Conspiracy in the American Revolution War and George Washington)’에서 발췌했다. 편지 외에도 워싱턴 장군의 3월 15일 연설 내용을 비롯해 나의 조사 능력을 벗어나는 많은 부분을 참고했음을 밝힌다. 건양대학교 기초교양교육대학 김형곤 교수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 군인들에게 약속했던 연금은 제대로 지켜졌을까. 그렇지 않다. 1786년 8월 말께 매사추세츠 펠헴 마을에서 발생한 셰이즈의 반란(Shays‘ Rebellion)은 연금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독립전쟁 영웅이었으나 봉급은 물론 참전수당을 받지 못해 빈농으로 전락한 퇴역 대위 대니얼 셰일즈는 매사추세츠 주정부가 가구당 20파운드(요즘 가치 약 300만원)의 인두세를 부과하자 봉기를 이끌었다. 반란군은 순식간에 1,800명으로 불어났는데 셰이즈와 같은 처지의 퇴역군인이 많았던 탓이다. 반란군 일부는 경제난 탈출을 위해 영국의 지배로 돌아가자는 주장까지 앞세웠다. 농민반란군은 이듬해 2월 상인들의 자금으로 조직된 4,400여명의 진압군이 쏜 대포 두 방에 9명의 사망자를 낸 채 산산이 흩어졌지만 소기의 성과를 이뤘다. 주마다 반란의 파급을 막기 위해 세금 경감, 채무 변제 등의 후속 조치를 내놓았다. 사형선고를 받았던 주모자들도 사면을 받았다. 반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반성은 미국 헌법 제정(1787년)과 연방정부 탄생(1789년)으로 이어졌다. 셰이스 반란이 신생국가의 성격을 13개 독립주의 느슨한 동맹체에서 연방국가로 탈바꿈시킨 셈이다. 반란이 자양분 역할을 했기 때문일까. 토머스 제퍼슨은 당시 이런 말을 남겼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때때로 애국자와 압제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 -
흑인의 눈물, 백인의 돈과 전쟁… 조면기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3.14 06:00:00건국에서 남북전쟁까지 미국의 정치와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을 단 한 명만 꼽으라면 누굴까. 역대 대통령들과 최고의 재무장관으로 기억되는 알렉산더 해밀턴, 76명에 이르는 역대 미국 재무장관 가운데 가장 긴 12년 9개월 동안 봉직한 앨버트 갤러틴 등의 쟁쟁한 인물들을 제칠만한 인물이 있다. 엘리 휘트니(Eli Whitney). 휘트니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미국의 서부 개발이 지연되고 남부 면화농장주들의 풍요가 없거나 늦춰질 수 있었다. 휘트니는 사후에 벌어진 남북전쟁의 향배에도 영향을 미쳤다. 비록 의도하지 않았어도 흑인 노예들의 삶도 휘트니의 발명 하나 때문에 더욱 비참해졌다. 도대체 무엇을 했길래. 두 가지 굵은 흔적을 남겼다. 조면기와 부품호환 시스템. 조면기부터 살펴보자. 메사추세츠의 농부 집안에서 1765년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기계를 두들기고 만드는 재능이 많았다. 어머니를 여윈 11세부터는 작업실에 틀어 앉았다. 시장의 흐름을 읽는 눈도 밝았는지 독립전쟁의 와중에 못이 부족하자 소년 휘트니는 아버지를 설득해 못을 제작하는 대장간도 만들었다. 직원을 고용할 만큼 번성한 못 공장을 뒤로 하고 다소 늦은 나이에 예일대에 진학해 법을 공부한 휘트니는 남부를 여행하던 중 독립전쟁의 영웅인 그린 장군의 미망인 집에 머물며 면화 농장을 처음 접했다. 당시 남부 농가들의 최대 고민은 판로 개척. 독립전쟁 뒤부터 인디고(염료)와 담배 등을 수입하던 영국으로부터의 주문이 끊겨 대체 작물과 새로운 시장이 절실해졌다. 농장주들은 북부와 동부에 들어서기 시작한 방직 공장에 납품할 면화에 주목했으나 이마저 쉽지 않았다. 당시 미국 면화의 주종은 솜이 긴 ‘장융면(長絨綿). 이집트면 또는 해도면으로 불리던 이 품종은 모래 토양이 필요해 바닷가나 섬, 강가에서나 자랐다. 육지면은 생장기간이 짧은 데다 재배도 까다롭지 않았으나 씨 빼기가 문제였다. 이집트면의 씨는 기원전 200년께 인도에서 발명됐다는 롤러로 간단하게 빼낼 수 있었으나 육지면의 끈적 끈적한 씨는 섬유질에서 떼어내기가 어려웠다. 젊고 건장한 흑인 노예가 하루에 130㎏, 어린 아이도 45㎏의 목화솜을 딸 수 있었으나 육지 면의 씨앗이 단단하고 질기며 끈적끈적해 하루 처리량은 0.5~0.8㎏에 불과했다. 1784년에는 어렵사리 영국 수입상을 구슬려 미국산 면화를 영국에 첫 수출했으나 ‘미국에서 면화를 수출했을리 만무하다’고 의심하며 통관을 늦춘 영국 세관 때문에 미국의 면화가 리버풀의 부두에 방치된 채 썩은 적도 있다. 기대도 컸지만 난관은 더 컸던 미국의 면화산업은 미망인의 농장에 머물던 휘트니가 ‘조면기(Cotton Gin)’를 발명한 이후 순풍을 맞았다. 1793년 3월 14일 특허를 얻은 기계구조는 간단했다. 판자와 크랭크축, 크고 작은 원통형 밀대, 벨트가 전부. 조면기는 노예의 1인당 생산성을 뛰게 만들었다. 30~50명이 들러 앉아 씨를 빼던 작업을 한 사람이 해치웠다. 대량 생산된 솜은 영국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영국은 미국산 목화로 만든 의류를 전세계에 뿌렸다. 영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등장하고 산업혁명의 위력을 실감한 각국이 산업화에 나선 것도 이 무렵이다.* 목화나무 재배가 돈이 되자 사람들의 생각도 바뀌었다. 휘트니의 조면기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흑인 노예에 대해 북부보다 더 동정적이던 남부 농장주들은 노예를 생산요소로 여겼다. 노예제도 폐지론은 쏙 들어가고 수탈과 인권 말살, 지독한 인종 차별이 고개를 들었다. 당연히 인간의 노동력 가격도 뛰었다. 목화를 따는 흑인 노예는 곧 돈이었으니까. 1790년 평균 300달러이던 노예 가격은 1850년 2,000달러로 뛰었다. 노예 수는 65만명에서 320만명으로 불어났다. 경제주도권과 노예제도를 둘러싼 남부와 북부의 갈등은 더욱 깊어져 결국 사상자 97만여명을 낸 남북전쟁으로 번졌다. 조면기 발명부터 남북전쟁 직전까지 미국 면화산업은 말 그대로 폭발적으로 커나갔다. 1793년 미국의 면화 생산량은 225만㎏. 세계 생산량의 1%에도 못미쳤으나 1860년에는 9,000만㎏으로 불어났다. 전세계 생산량 점유율도 70% 이상에 이르렀다. 하얀 인간 중심의 미국 남부는 검은 인간들이 흘린 눈물에 젖은 하얀 목화솜 덕분에 풍요를 맛봤다. 어마어마한 파급 효과를 낳은 조면기를 발명한 휘트니는 돈을 벌었을까. 반대다. 마음만 다쳤다. 불법 복제 탓. 농장주들은 이익의 일정액을 원하는 휘트니와 그 동업자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직접 만들어섰다. 숙달된 목수라면 불과 십수 달러의 재료비로 반나절이면 제작할 수 있는 간편한 구조가 역으로 돈을 버는 데는 실패를 안겨 준 셈이다. 휘트니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특허 소송에 넌덜머리를 냈으나 얻은 게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돈과 인맥. 우선 10만 달러가 생겼다. 로열티가 아니라 주 정부들이 제공한 일종의 보상금이 모인 돈이었다. 사우스캘리포니아주 정부가 특허권 침해를 보상하는 차원에서 지급한 5만 달러, 노스캐롤라이나주가 면화에 부과한 세금의 일부를 떼어내 준 3만 달러, 테네시주도 1만 달러…. 결코 적지 않은 자금을 가지고 휘트니는 다른 사업에 눈을 돌렸다. 물색한 끝에 결정한 게 총기 제작업. 경험도 자금도 없었으나 휘트니는 자신이 있었다. 정부의 소총 발주에 당당히 뛰어들어 1만 여정의 물량을 따냈다. 정치권 인맥이 결정적으로 휘트니를 도왔다. ‘미국 태생인데다 대학까지 나온 젊은 발명가’를 반겼던 신생 미국의 정치인 중에는 해밀튼 재무장관과 재퍼슨 국무장관도 있었다. 조면기를 발명하고도 제대로 로열티를 가져가지 못한 젊은 발명가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인지 미국 정부는 쉽게 소총 물량을 내줬다. 소총 사업에서 휘트니는 운도 좋았다. 마침 유럽을 휘젓는 나폴레옹이 언제 군대를 몰고 북미 대륙을 침입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미국 정부는 소총을 발주하고 그 물량을 휘트니가 따냈다.** 휘트니는 계약 불과 2년 만인 1980년 물량 납품을 마쳤다.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숙달된 장인을 보유한 총기 회사들의 연간 생산량은 500~700정 하던 시절, 연 5,000정씩 생산한 비결은 부품 호환. 총의 모든 부품을 장인이 하나 하나 만드는 게 아니라 장인은 기계도구를 사용해 대량생산한 부품을 비숙련공이 조립하는 방법으로 생산 수율을 극대화로 끌어올렸다. 일하느라 나이 51세가 되서야 유력 집안의 20세 연하 신부와 결혼한 그는 결혼생활을 9년만 누리고 60세 나이로 죽었다. 휘트니가 남긴 1남 2녀(원래 3녀 였으나 막내딸은 출산 중 사망)의 후손들은 널리 퍼졌다. 휘트니가 납품한 소총의 성능을 반신반의하는 국방성 관리들 앞에서 그는 박스 두 곳에서 10여 자루의 총을 꺼내 분해하고는 부품을 섞어놓은 후 재결합하는 이벤트까지 펼쳤다. 휘트니에 의해 북부의 총기생산이 규격화하며 호환성을 확보한 반면 이렇다 할 제조업이 없었던 남부는 나중에 총기공장을 만들면서도 규격화에 실패, 결국 전투에서 소총의 성능 차이로 나타나고 패배의 원인의 하나라는 분석도 없지 않다.*** 휘트니의 소총이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지 않은 가운데 존 스틸 고든 등 주류 경제사가들은 휘트니의 부품 호환성 확보를 ‘미국식 생산 양식의 원형 가운데 하나’로 지목한다. 휘트니의 부품 규격화가 휘트니 2세가 운영하던 공장 일부를 빌려 무기사업을 시작한 사무엘 콜트를 통해 보다 발전하고 헨리 포드에 이르러 대량 생산 시스템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경제사가들의 분석이 맞다면 오늘날의 세계의 공장은 대부분 포드식 생산시스템이니 휘트니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는 셈이다./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 휘트니의 조면기는 인도와 중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미국은 원료의 공급지이자 생산지로서 발전한 반면 인도와 중국의 목화산업은 쪼그라 들었다. 의류산업의 역사를 거울 삼아 세계경제사를 설명한 책 ‘티셔츠 경제학’에서 피에트라 리볼리 조지타운대 교수는 왜 미국에서 면화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는지에 주목한다. 중국이나 인도, 이집트에도 흑인 노예와 비슷한 처지의 농노가 존재했는데 혁신이 미국에서만 일어난 것은 발명과 생산성 향상이 나의 몫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동기 부여 덕분이라는 것이다. ** 나폴레옹은 실제로 북미 대륙을 침공할 생각이 있었다. 1791년 생 도밍고 설탕 농장의 흑인노예들의 의한 봉기를 즈음한 프랑스는 초기에는 봉기 지도자 투생 투베르튀르에게 육군 소장 계급장 수여하며 회유하다 1801년에는 병력 4만 6,000명을 보내 진압에 나섰다. 프랑스군은 투생을 생포해 송환했으나 흑인 봉기군은 프랑스군을 물리치고 1805년 중남미 최초로 독립을 선포했다. 나폴레옹은 생 도밍고 반란을 단숨에 정리하고 북미로 진군해 미주 식민지로 삼아 ‘제 2 프랑스’를 건설할 생각이었다. 미국은 생 도밍고 흑인 봉기의 덕은 크게 본 셈이나 58년간 이 지역의 독립을 승인하지 않았다. *** 휘트니가 ‘아메리칸 시스템의 아버지’라는 해석에 대해서도 약간의 이론이 있다. ‘신화가 된 기업가들-타이쿤’을 지은 찰스 모리스는 ‘부품 호환성은 휘트니와 그 자손들이 만든 허상일 뿐 실은 프랑스에서 시작됐고 미국에서는 존 홀이라는 총포제조업자가 시발점이라고 강조한다. 여러 정의 총을 분해해 부품을 섞은 후 결합하는 시범도 휘트니 사후 9년이 지난 1834년 존 홀이 처음 시연했다고 모리스는 주장한다. 모리스에 따르면 국방 분야에서 미국이 완전하게 부품 호환성 확보에 나선 시기는 모건 금융가문이 자금을 대기 시작한 이후다. -
무기대여법의 손익계산서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3.11 06:00:00501억 달러.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이 연합국에 지원한 규모다. 지원 목록은 온갖 품목을 망라했다. 비행기와 전차 등 무기류가 절반 이상인 가운데 원유와 원자재, 육류를 비롯한 식량과 의복까지, 그야말로 군수품 일체가 미국과 동맹군으로 싸우는 연합국들에게 넘어갔다. 요즘 가치로는 최소한 6,590억 달러에 이르는 막대한 물자를 제공할 수 있었던 법적 근거는 무기대여법(Lend and Lease Act). 1941년 3월 11일, 루스벨트 대통령의 서명으로 이 법이 발효되기까지는 반대도 많았다. 유럽의 전쟁에 끼어들 필요가 없다며 전통적인 고립주의로 돌아가자는 반대 의견으로 하원에서는 단 한 표 차이로 법이 통과됐을 정도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반대하는 의회에 이런 논리를 펼쳤다. ‘불 난 옆집에서 소방 호스를 빌려달라고 하는데 우물쭈물하면 우리 집에 불이 옮겨 붙을 수밖에 없다. 소방 호스를 빌려줘 일단 불을 끈 다음에 돌려 받는 게 낫다.’ 우여곡절 끝에 법이 마련된 직후에도 루스벨트조차 지원 규모가 천문학적으로 늘어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의회가 처음 승인한 지원 규모도 70억 달러였다. 루스벨트의 당초 법 제정 목적은 다급해진 영국에 대한 지원. 프랑스가 무너진 마당에 독일 공군의 공습에 시달리던 영국은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었다. 히틀러에 양보해서라도 화친 조약을 맺자는 주장까지 나오던 터에 루스벨트는 영국을 돕기 위해 법을 만들었던 것이다. 무기대여법에 의해 ‘연합국의 병기창’으로 변신해가던 미국은 진주만 공습을 당한 뒤 중립에서 벗어나 직접 참전하면서 무기대여법의 지원 대상국도 크게 넓혔다. 민주주의 국가만을 지원대상으로 삼았던 법을 개정해 ‘자유를 위해 싸우는 나라’에게 미국제 무기를 제공하는 길도 열었다. 사회주의 국가 소련과 사우디아라비아같은 왕정국가도 이렇게 지원대상으로 들어왔다. 무기대여법과 함께 전시생산체제로 들어간 미국은 유례없는 생산능력을 뽐내며 과자라도 찍듯이 각종 무기를 토해냈다. 전쟁 중 제작한 비행기만 32만 4,750대. 항공모함(중형 포함, 소형 호위항모는 미포함)은 141척, 구축함 349척을 뽑았다. 7,185톤짜리 수송선을 3일 만에 건조한 적도 있다. 연합국이 쓴 석유 70억 배럴 중 60억 배럴도 미국 내 유전에서 나왔다. 민수용 자동차의 생산을 전면 중단하는 등 모든 산업시설을 군수산업으로 전환시킨 미국이 쏟아내는 전략 물자는 연합국을 입히고 먹이고 무장시켰다. 무기대여법의 최대 혜택 국가는 영국. 314억 달러 규모의 지원을 받았다. 소련에게도 113억 달러 상당의 군수품과 원자재가 들어갔다. 자유 프랑스는 32억 달러, 중국은 16억 달러 규모의 물자를 제공받았다. 미국이 얼마나 많은 전쟁물자를 연합국에게 줬는지는 소련에 대한 지원 목록으로 가늠할 수 있다. 각종 항공기 1만 4,795대, 전차 7,056량, 지프 5만 1,503대, 트럭 37만 5,883대, 오토바이 3만 5,170대, 트랙터 8,071대, 각종 포 8,218문, 기관총 13만 1,633정, 폭약 345,735톤, 화차 11,155량, 기관차 1,981량, 화물선 90척, 대잠함 105척, 어뢰정 197척, 선박용 엔진 7,784대, 식량 448만톤, 비철금속 80만톤, 석유제품 267만톤, 화학제품 84만톤, 면화 1억 689만톤, 가죽 4만 9,860톤, 타이어 379만개, 군화 1,542만쪽.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이 얄타회담의 만찬장에서 외쳤다는 건배사(‘미국의 전시생산능력를 위하여’)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연합국의 승리에 기여한 무기대여법은 루스벨트의 기대를 십분 충족시켰으나 전망은 조금 빗나갔다. 빌려간 소방호스는 불길을 잡느라 소모되고 그나마 남은 호스도 돌려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기대여법으로 인한 지원 금액을 제대로 갚은 나라는 거의 없었다는 얘기다. 오직 한 나라, 영국만 무기대여법으로 인한 대미 채무를 갚았다. 전쟁이 끝난 직후 미국의 영국에 대한 상환 요구액은 52억 달러. 레이더와 소나, 제트엔진 등 첨단 기술을 넘겨받고 전쟁 중에 영국이 거꾸로 미국에 제공한 물자나 시설, 편의를 차감한 금액을 50년간 연 2%의 이자로 분할상환하기로 상환협정을 맺었다. 영국은 재정 위기를 수 차례 겪으면서도 꾸준히 상환, 지난 2006년 말에서야 간신히 상환을 마쳤다. 소련은 영국과 대조적이다. 전후 미국이 소련에 요구한 상환 금액은 13억 달러였으나 소련은 1억 7,000만 달러만 갚겠다고 버텼다. 미국도 별다른 채근을 하지 않는 가운데 4반세기 가까이 채무를 잊고 지내던 소련은 흉작으로 미국산 밀 수입이 다급해진 1972년에서야 미·소무역협정을 맺으며 7억 2,200만 달러를 분할 상환하기로 약속했다. 약속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고 소련을 계승한 러시아는 약 6억 달러의 채무를 안고 있다. 중국(상환 부담은 대만)도 미상환 상태다. 막대한 무기를 퍼주고 그 대금을 돌려받지 못한 무기대여법의 손익계산서는 과연 적자일까. 장부상으로는 손해지만 실제로는 남았다. 무엇보다 미국은 잠재생산능력을 군수품 생산에 집중시킨 결과 전쟁을 겪으면서도 유일하게 경제가 성장할 수 있었다. 전쟁 전까지 17%였던 실업률은 종전 직전인 1944년 1.2%로 떨어졌다. 무기대여법은 완전고용과 경제성장을 이끈 보약이었던 셈이다. 무기대여법의 혜택을 받은 38개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도 높아졌다. 무기대여법은 후유증도 남겼다. 전쟁으로 미국 경제가 너무 커져 선진국이든 후진국이든 미국 경제의 생산력과 관계를 맺지 않고는 경제성장은커녕 재정의 유지마저 힘들어진 세상으로 접어들었다. 미국이 슈퍼 파워로서 지구촌에 군림하는 새로운 구도가 무기대여법을 통해 공고해졌다고 할 수 있다. 비대해진 미국의 군수산업은 전쟁 이전 수준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군산복합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국제 위기의 또 다른 요인으로 변해왔다. 피의 습성에 젖어간다고나 할까.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지구촌의 전쟁과 긴장도 전시경제체제를 거치며 덩치를 불린 미국 군수산업체의 이해관계와 무관하지 않으니.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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