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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이 사라지다 ... 로마 약탈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5.06 09:48:241527년 5월6일, 신성로마제국 군대가 로마로 쳐들어왔다. ‘로마제국의 후신’을 자처했던 신성로마제국이 왜 로마를 침공했을까. 교황과 황제의 대립, 유럽을 지배하던 합스부르크 가문과 프랑스의 해묵은 원한과 알력 탓이다. ‘로마’가 ‘로마’를 친 이날의 사건은 역사의 분수령으로 기억된다. 시대를 이끌었던 이탈리아 르네상스도 이로써 끝났다. 로마 진격의 전초전은 1519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선거와 1525년의 파비아 전투.* 두 번 다 합스부르크 가문과 프랑스의 대결 구도였다.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북유럽과 영국, 프랑스를 제외하고는 서유럽과 중부유럽 전체가 합스부르크의 강역이었으니까. 할아버지 시대부터 시작된 수차례 정략결혼의 결과로 거대한 영토를 물려받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 5세는 한껏 욕심을 부렸다. 먼저 친할아버지가 갖고 있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지위를 노렸다. 허울 뿐이었어도 서구세계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로마 교황 다음으로 정치적 권위를 인정받는 자리. 선거로 뽑히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를 할아버지에 이어 차지하려던 그는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에게 도전받았다. 19세의 카를 5세보다 여섯 살 많았던 프랑수아 1세는 합스부르크가를 극도로 혐오하는 인물이었다. 스페인제국 견제를 위해 이교도인 오스만 투르크와 비밀 동맹까지 맺을 정도였다. 프랑수아 1세와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술레이만 1세는 동갑이었다. 선거 초반에서는 프랑수아 1세가 유리해 보였으나 결국 카를 5세가 이겼다. 돈의 힘으로. 세계최초의 다국적기업이자 당대 최고의 금융그룹이었던 ‘푸거’ 가문(Fugger family)에서 빌린 85만 플로린이라는 거금으로 뿌린 무제한의 뇌물이 통한 것. 선거전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틀어져 19년 동안 크고 작은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연거푸 카를 5세에게 당한 프랑수아 1세는 이를 갈았다. 최초로 화승총이 승패를 결정한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도 패전해 막대한 몸값을 지불한 프랑수아 1세는 동맹을 찾았다. 프랑수아 1세가 풀려나는 조건으로 약속했던 이탈리아 포기 무효를 선언하며 교황 클레멘스 7세와 동맹을 맺자 분노한 카를 5세는 군대를 로마로 보냈다. 결과는 예고된 것이었다. 스페인군 6,000명과 독일 용병단 1만6,000여명으로 구성된 황제군에 비해 교황의 군사는 5,000명에도 못미쳤다. 패전의 와중에서도 스위스 용병들은 죽음도 마다하지 않고 교황의 생명을 지켜내 명성을 떨쳤다.** 황제군은 싸움이 끝난 뒤에도 로마를 철저하게 밟았다. 관례였던 약탈기간 3일보다 닷새 많은 8일간 마음대로 약탈했다. 점령기간인 6개월 내내 로마가 붙탔다고 한다. 독일 용병들이 광기 어린 약탈에 나선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첫째 루터교 신자가 많아 가톨릭의 본산인 로마에 대한 원한이 있었다. 고향 땅의 수많은 신교도 농민들이 죄없이 죽었던 독일농민전쟁 직후여서 복수심에 불탔다. 두 번째로 지휘부가 무너져 통제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용병단장은 로마 진격 바로 전에 급사하고 스페인군 최고사령관도 초전에 전사해 약탈을 제어할 명령체계가 사라졌다. 세 번째로 보상 심리가 강했다. 카를 5세가 약속한 용병 급료가 제대로 안 나와 불만이 크게 높아진 상황에서 병사들은 로마를 털고 찌르고 불태웠다. 로마의 민간인 4만5,000여명이 이 때문에 죽거나 집을 잃었다. 고대 로마로부터 내려져 온 건축물과 고문서도 불탔다. 410년께 서고트족이 로마를 점령하고 약탈했을 때보다 피해가 훨씬 컸다. 도시의 파괴를 넘어 로마문명의 자취를 쓸어버렸던 ‘로마의 약탈(Sack of Rome)’은 역사에 많은 파장을 일으켰다. 무엇보다 종교 간 증오감이 커졌다. 참전수당을 약탈로 찾으려던 용병단의 중추가 신교도였다는 점 때문에 반(反)종교개혁의 공감대가 퍼졌다. 거액의 몸값을 내고 목숨을 건진 교황은 메디치 가문 출신 대공녀를 프랑스로 시집 보내는 등 프랑스와의 관계를 더욱 다졌다. 프랑스 역사의 최대 비극 중 하나인 위그노(신교도) 대학살도 메디치 가문 출신인 두 명의 프랑스 왕비가 주도했다. *** 교황의 패전은 영국의 종교까지 바꿔 놓았다. 영국 국왕 헨리 8세는 시녀 앤 블린과 결혼하고 싶어 왕비 캐서린(스페인 공주 출신으로 형수였으나 형이 죽은 뒤 스페인과 관계를 의식해 형수와 결혼)과 이혼을 허락해 달라고 교황에게 청원을 넣었다. 감금 상태였던 교황 클레맨스 7세는 카를 5세의 눈치를 살펴야 하던 처지. 카를 5세는 이모인 캐서린 왕비가 내쳐지기를 원치 않아 결국 교황은 이혼을 불허했다. 헨리 8세는 이에 반발해 1534년 수장령을 내렸다. 영국 교회의 수장은 교황이 아니라 영국 국왕이라는 내용의 수장령으로 영국의 국교는 가톨릭에서 성공회로 바뀌었다. 역사의 가정은 부질없는 짓이라지만 아주 가끔은 사건의 의미를 보다 명료하게 만들어준다. 로마의 약탈이 없었다면 영국의 역사와 종교도 요즘과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1525년 2월 이탈리아 북부의 파비아(Pavia)에서 프랑스와 스페인 간의 파비아전투는 화승총이 본격 사용된 최초 전투로 손꼽힌다. 이탈리아 지배권을 둘러싼 이 전투의 시작 직전 병력은 프랑스 2만 3,500명 대 스페인 2만3,000명. 엇비슷했지만 내용에서는 프랑스가 앞섰다. 스페인보다 3배 이상 많은 53문의 대포를 보유한데다 승패를 결정 짓는다는 기병도 6,500명 대 4,000명으로 1.62배 많았다. 결과는 프랑스의 참패. 자신감에 가득 찬 프랑스는 새벽 5시부터 선공을 퍼부었으나 4시간 뒤 나타난 결과는 반대였다. 승리한 스페인은 500여명의 인명피해를 입은 반면 프랑스군은 1만2,000여명이 죽거나 다쳤다. 국왕 프랑수와1세도 포로로 잡혔다. 비결은 3,000명에 이르는 화승총 부대. 농민 출신 소총병들은 창병과 협력해가며 전신에 판금 갑옷을 두른 프랑스 귀족기사단을 괴멸시켰다. 요즘 가격으로 환산해 단가 600달러짜리 화승총이 수만달러짜리 중장갑 기병을 무찌른 것이다. 포로로 잡힌 프랑수아1세는 세는데만 4개월 걸렸다는 1차분 몸값 120만 크라운을 지불하고야 겨우 풀려났다. 프랑스는 이탈리아에 대한 기득권도 잃었다. 그러나 두 나라 경제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막대한 배상금을 챙긴 스페인은 쇠락하고 프랑스는 힘을 되찾았다. 승리에 취한 스페인이 끊임없이 전쟁을 벌인 탓이다. 산업기반도 인력부족으로 무너져 배상금은 프랑스 제품을 수입하는 데 들어갔다. ** 스위스 용병이 교황의 근접 경호를 맡기 시작한 시기는 1506년. 오늘날이야 손꼽히는 부자나라지만 당시 스위스는 척박한 산악지방에서 먹고 살기가 힘들었기에 남자들은 일찌감치 국제 용병으로 이름을 날렸다. 계약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랐다던 스위스 용병들은 교황의 군대가 항복한 상황에서 189명 중 147명이 전사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포위망을 뚫는 데 성공, 교황을 안전지대로 피신시켰다. 교황청 근위대를 스위스군 전역자로만 뽑는 전통이 이때 생겼다. 당대 최고 재산가였던 메디치 가문 출신인 교황은 자기의 목숨을 구해준 스위스 용병들을 각별하게 챙겼다. 용병을 근위대로 격상시키고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한 군복에 메디치가의 상징 색상인 노랑과 파랑색을 입힌 것도 메디치 가문의 일원으로 우대한다는 애정의 표시였다. 요즘에도 스위스 근위대는 보초병뿐 아니라 교황의 근접 경호까지 맡는다. 병력이라야 110명에 불과한 스위스 근위대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군대다. 신참 병사의 월급이 우리 돈으로 200만원 정도인 스위스 근위대는 휴일이면 10만여명의 관광객을 끌어당기는 달러 박스다. *** 메디치 가문 출신인 두 명의 프랑스 왕비는 발레와 프랑스 요리의 전파자로도 평가받는다. 메디치 가문의 눈 요깃거리가 발레로 발전하고 프랑스 요리의 형성에도 메디치 가문 출신의 왕비들이 데려온 요리사들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
싱코 데 마요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5.05 06:00:00멕시코와 미국 남부지역은 이맘때면 축제 분위기에 젖는다. 화려한 멕시코 민속 의상을 차려 입은 대열이 시가를 누비고 온갖 산해진미가 관광객을 부른다. 축제의 이름은 ‘싱코 데 마요(Cinco De Mayo)’. 100만명의 관광객이 몰린다는 싱코 데 마요는 스페인어로 ‘5월 5일’인데 무엇을 기념하는 축제일까. 어린이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 멕시코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싱코 데 마요의 기원은 1862년 5월5일. 멕시코 중남부 푸에블라에서 프랑스 침략군과 전투가 발생했던 날이다. 멕시코군은 병력과 장비의 열세에도 프랑스군을 무찔렀다. 정규군 6,040명에 신형 대포 12문을 갖춘 프랑스군이 구식무기로 무장한 4,500여 멕시코군과 맞붙은 결과는 참패. 실전 경험이 많은 멕시코군을 얕잡아본 지휘관의 자만 탓에 462명이 죽고 300명 부상에 8명이 포로로 잡혔다. 멕시코의 피해는 83명 전사, 141명 부상. 멕시코인들은 승리의 감격에 몸을 떨었다. 스페인의 황금 사냥꾼 에르난 코르테스가 아스텍 제국을 무너뜨린 1521년 이래 가혹한 수탈에 시달린지 300여년. 독립전쟁으로 겨우 나라를 세웠으나 1848년 미국에 영토의 절반을 빼앗긴 오욕의 역사 뒤에 찾아온 한 줄기 빛이었기 때문이다. 교회와 군부, 지주 계급이 기득권을 유지하려 이합집산하며 분열된 나라에서 세계를 호령하던 프랑스군과 서전에서 대승했으니 기쁨이 컸다. 프랑스가 멕시코를 침공했던 명분은 돈. 채무를 갚으라는 구상권 행사가 빌미였다. 독립전쟁 직후 수립된 멕시코 제1제정이 부패로 무너지고 내전 끝에 들어선 민중 기반의 공화정은 경제난에 시달렸다. 산타 아나의 독재정권을 물리치고 집권한 베니토 후아레스 정권이 추진한 각종 민주개혁은 경제권을 움켜쥔 교회와 군부, 지주 계급의 반발과 저항에 부딪혔다. 당시 멕시코 인구 900만명 가운데 순수 인디오 500만명과 원주민과 유럽 혼혈인 메스티소 300만명은 정부를 지지했어도 토지와 상권을 장악한 상류층 백인 100만명은 세금조차 내지 않았다. 경제난이 깊어지자 멕시코는 1861년 채무불이행과 원금 및 이자의 2년간 지급정지를 선언할 수 밖에 없었다. 모라토리엄 선언 반년 뒤 채무국들은 군대를 보냈다. 멕시코 동부의 최대 항구도시인 베라크루즈항에 스페인군 6,000명을 시작으로 영국군 800명, 알제리 보병 600명을 포함한 프랑스군 2,600명이 차례로 상륙해 멕시코에 채무를 상환하라고 윽박질렀다. 외국 군대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풍토병에 시달리던 외국 군대가 멕시코 정부와 협상해 군대를 철수하는 데도 프랑스는 오히려 파병 규모를 7,000명으로 늘렸다. 프랑스의 통치자 나폴레옹 3세는 돈보다 새로운 영토에 관심이 있었다. 멕시코가 계산한 프랑스의 채권은 300만 페소. 프랑스는 멕시코의 실질 채무액이 1,500만 페소라고 우겼지만 영국의 채권 6,900만 페소보다는 훨씬 적었는데도 채무를 빌미로 멕시코에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려 들었다. 러시아와 크림반도를 놓고 싸우고, 이탈리아 통일전쟁에 개입하며 알제리와 서부 아프리카, 중국 남부와 베트남까지 침략했던 야심가 나폴레옹 3세는 정복을 원했다. 결국 푸에블라의 서전 승리 기쁨도 잠시. 멕시코는 3만8,000명으로 불어난 프랑스군에 점령당하고 말았다. 1864년에는 나폴레옹의 혈통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던 합스부르크가의 요제프 대공을 막시밀리아노 1세로 추대했다. 멕시코 제2제정이 탄생한 것이다. ** 막시밀리아노 1세는 인디오 농민의 친구를 자처하며 나름대로 개혁정치를 펼쳤지만 상황 변화가 일어났다. 프랑스군은 1867년 완전 철수하고 황제 자신도 총살형 당하며 인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 멕시코에 새로운 제국을 세우겠다며 기세등등하던 나폴레옹 3세의 야욕이 꺾인 이유는 두 가지. 먼저 남북전쟁을 마친 미국이 꺼렸다. 유럽의 호전적 강대국인 프랑스 제국의 지배를 받는 멕시코가 달갑지 않았다. 남북전쟁 와중에도 프랑스에 철군을 요구한 미국은 종전 후에는 직접적인 군사개입 가능성까지 흘리며 프랑스를 압박했다. 결정적으로 국력이 뻗어나던 프로이센과 전쟁이 코앞에 다가왔다. 결국 멕시코 주둔 프랑스군은 본토를 지키려 전원 돌아갔다. **** 프랑스군이 패퇴한 진짜 요인은 따로 있다. 5년간 30만~50만명이 희생될 만큼 끈질겼던 멕시코 민중의 저항 때문이다. 흥겨운 싱코 데 마요 축제에는 조국을 구해냈다는 긍지가 깔려 있다. 남의 것을 빼앗겠다는 권력자의 욕심은 유한할 뿐 아니라 몰락을 재촉해도 나의 것을 지키겠다는 민초들의 의지는 역사 속에서 영원히 빛난다. 멕시코 민중에게 찬사를!/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어린이날(Children‘s Day)의 제정과 유래, 휴일 여부는 나라마다 다르다. 국제 어린이의 날은 6월1일. 1925년 제네바에서 열린 아동 복지를 위한 세계 회의가 만들었다. 대부분의 공산주의 국가가 이날을 어린이날로 기념하는 통에 국제 어린이날은 동구권에서 제정한 것으로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사실과 다르다. 유엔과 유네스코가 1954년에 정한 세계 어린이날은 11월20일. 5월5일을 어린이날로 지정한 국가는 엄밀히 따져 우리나라뿐이다. 1922년부터 소년운동단체와 언론사 등이 5월 1일을 ‘소년일’으로 기념하다 소파 방정환을 비롯한 일본 유학생들이 만든 색동회를 통해 널리 퍼졌다. 노동절과 겹친다는 지적에 따라 1927년부터 5월의 첫째 일요일로 옮겨 기념행사를 치렀다. 일제강점기 말기인 1939년부터 중단된 어린이날은 1946년 부활해 1961년 제정된 ‘아동복지법’에 의해 5월5일로 굳어졌다. 공휴일 지정은 1975년부터. 일본도 5월5일이 어린이날이지만 ‘남자 어린이의 날’이다. ‘여자 어린이의 날’은 3월 3일. ** 요제프 대공은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동생으로 자애롭고 용맹스러웠던 인물로 기억된다. 오스트리아 해군에 복무하며 솔선수범하는 제독으로 이름 높았다.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총독을 지내던 중 나폴레옹 3세의 초빙에 응해 막시밀리아노 1세라는 이름의 멕시코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는 프란츠 카를 대공과 바이에른 공주 출신인 조피의 둘째 아들로 1831년 출생했지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직계 손자라는 루머가 끊임없이 따라 다녔다. 나이 40세의 나폴레옹 1세가 오스트리아로 진격한 뒤 첫째 부인 조세핀과 이혼하고 새로운 황후로 맞이한 18세의 마리아 루이즈가 낳은 아들이 나폴레옹 2세다. 막시밀라아노 1세의 아버지인 프란츠 카를 대공은 마리아 루이즈의 남동생. 누나의 아들인 나폴레옹 2세를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빼고 ‘라이히슈타트 공작 프란츠’라고 부른다는 조건으로 맡아 한동안 같이 살았다. 막시밀리아노 1세의 외사촌형인 나폴레옹 2세와 어머니 조피가 워낙 친하게 지내 이런 소문이 따라 붙은 것으로 보인다. 막시밀리아노 1세가 태어나자마자 나폴레옹 2세가 사망한 뒤에 조피가 우울하고 냉정한 사람으로 변했다는 점도 소문을 더욱 퍼지게 만들었다. 역사가 사이에서는 정황상 루머일 뿐이라는 해석이 우세하다. *** 과연 막시밀리아노 1세가 20세의 나폴레옹 2세와 6세 연상 외숙모 사이의 불륜으로 잉태된 아들인지는 여전히 미스터리의 영역으로 남아 있지만 멕시코 황제로서 그는 자애롭게 통치하려 애썼다. 베니토 후아레스의 개혁 조치들도 이어받았다. 강제노역을 폐지하려 노력해 토지를 소유한 대주주집단의 반발도 샀다. 후아레스 정권이 몰수했던 막대한 교회 보유 토지도 돌려주지 않아 가톨릭 성직자 집단과도 대립각을 세웠다. 기득권층의 비협조로 국고가 바닥나자 개인 재산을 썼다. 패배가 확실해졌어도 주변의 퇴위와 망명 권유를 뿌리치고 총사령관을 맡아 끝까지 싸웠다. 막시밀리아노 1세가 항복한 뒤 유럽의 군주들과 문호 빅토르 위고, 이탈리아 통일의 영웅 주세페 가리발디가 살려달라는 청원서를 넣었으나 끝내 총살당했다. 세계 각국의 탄원에도 ‘황제’를 그대로 두면 후환이 될 것이라며 총살을 집행한 대목은 그가 민중의 신망을 잃지 않았다는 방증의 하나다. **** 나폴레옹 3세는 결국 프로이센과 전쟁에서 패하며 몰락하고 말았다. -
장영자 사건 - '정의사회 구현, 좋아하네'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5.04 06:00:001982년 5월 4일,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이철희·장영자 부부를 구속, 수사 중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혐의는 외국환관리법 위반. 명동 암달러시장과 미국 캘리포니아 등지에서 80만 달러를 모았다는 혐의였다. 검찰의 당시 발표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는데도 세상은 발칵 뒤집혔다. 처음에는 대통령의 주변부 인물이 사건의 중심이어서 관심을 끌었다. 장영자(당시 38세)가 누구인가. 청와대 안주인 이순자씨 삼촌 이규광의 처제였다. 남편 이철희(당시 59세)는 중앙정보부 차장과 유정회 국회의원을 지냈던 인물. 대통령 친인척의 관련 여부로 관심을 모았던 사건은 시간이 지날수록 폭발력이 커졌다. 권력을 등에 업은 듯한 금융 사기였던데다 피해 규모가 대형이었기 때문이다. ‘단군 이래 최대 금융사기’라는 표현까지 나왔다. 검찰 수사가 진행될수록 사람들은 놀랐다. 사채시장의 큰손이던 장영자(당시 38세)는 자금압박에 시달리는 회사와 접촉해 무이자로 현금을 빌려주고 2~9배에 이르는 약속어음을 받아냈다. 장 씨는 남편의 경력을 들먹이며 “우리 돈은 특수자금이니 비밀을 지키라”는 말을 덧붙였다. 공영토건에는 빌려준 현금의 9배나 되는 1,279억원의 약속어음을 받아냈다. 약속어음을 할인해 다른 회사에 빌려주는 과정을 되풀이하며 받은 어음 총액이 7,111억원. 여기서 6,404억원 어치를 할인받아 썼다. 장영자 사건은 많은 사람들의 목을 날렸다. 은행장 두 명과 기업체 간부, 전직 기관원, 대통령의 처삼촌에 이르기까지 구속된 인원만 31명.* 대형 상장업체로 장 씨와 거래했던 일신제강과 공영토건은 부도가 났다. 사건은 초기부터 권력 배후설이 끊이지 않았다. 시중은행이 담보도 안 잡고 수백억원을 개인에게 대출해줬다는 사실부터 미심쩍었다. 과연 최고 권력이 개입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주목할만한 사실이 하나 있다. 대통령 주변의 권력자들이 대거 권력을 잃었다는 점이다. 가장 먼저 ‘장 여인이 수상하다’는 보고서를 전두환 대통령에게 올렸던 유학성 국가안전기획부장은 ‘영부인도 자중해야 한다’고 말한 뒤 부장직에서 물러났다.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도 옷을 벗었다. 연루 혐의를 받았던 권정달 민정당 사무총장도 사표를 냈다. 5공의 창업공신으로 ‘실세 중의 실세’라던 허화평 정무수석과 허삼수 사정수석도 이 사건을 철저하게 수사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후부터 몰락의 길을 걸었다. 수사가 진행되며 권력형 비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경찰관 8명에게도 불똥이 튀었다. 1981년 5월 이철희·장영자 부부의 청담동 자택에 3인조 강도가 들어 ‘한국에 하나 밖에 없다는 3캐럿 짜리 물방울 다이아몬드 반지’와 현금을 털었다. 경찰은 쉬쉬하며 최정예 형사들로 전담팀을 꾸려 6개월 만에 범인을 잡아냈다. 장영자는 ‘유공경찰관’ 8명을 집에 불러 일렬로 세운 뒤 한 명씩 이름을 호명해가며 50만원이 든 사례금 봉투를 나눠줬다. 결국 이들은 전말이 밝혀지며 경찰에서 쫓겨났다. 억울했겠지만 50만원이면 큰돈이었다. 대학등록금이 약 30만원이었으니까. ** 이렇게 저렇게 터지는 사건의 진상과 후폭풍은 5공 정권의 도덕성에 내상을 안겼다. 당연히 정권의 권위도 뿌리부터 흔들렸다. 마침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경찰관 하나가 경남 의령에서 소총과 수류탄을 난사해 62명이 죽고 33명이 부상하는 사건이 발생한 게 4월 말. 흉흉해진 민심과 사채시장 위축 등으로 더욱 어려운 경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정권은 각종 경제 대책을 쏟아냈다. 제 1탄이 나온 게 5월 7일. 단자사(투자금융회사·1996년 종금사로 전환)에 긴급자금 500억원을 지원하고 중소기업 지원에 2,000억원을 책정했다. 급락하는 주가의 안정을 위해 기관투자가들에게 주식 매입 확대를 다그쳤다. 이어 6월28일에는 더욱 획기적인 조치가 나왔다. ‘금리 4.5%P 인하, 법인세율 33~38%에서 20%로 대폭 감축’을 골자로 하는 6·28 경기활성화 조치는 해외출장 중인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그럴 리 없으니 다시 알아보라’는 지시를 내렸을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정부의 과감한 결단에는 자신감과 위기감이 복합 작용했다. 3공 시절부터 내려온 고질적인 물가급등세는 잡았다는 확신을 가졌지만 수출부진과 경제난은 좀처럼 풀리지 않는 가운데 정국 전환점이 필요하다는 조바심에서 초대형 대책을 잇따라 선보였다. 6·28조치 발표 불과 닷새 뒤에는 보다 메가톤급 대책이 나왔다. ‘금융실명제의 실시와 사금융 양성화’ 등을 담은 7·3조치가 그것이다. 문제는 의욕만 앞섰다는 점. 주무부처 장관조차 몰랐다. 뿐만 아니라 6·28조치가 나오기 불과 닷새 전에는 재무부가 법인세를 올린다는 세제 개혁안을 발표했을 만큼 정부 부처끼리 손발이 맞지 않았다. 민심 이반이 눈에 보이는 상황에서 뭔가 대책이 필요했던 청와대의 독주와 물먹은 관료들의 불만, 금융실명제에 대한 여당과 기업인들의 반발로 연이어 나온 초대형 경제대책은 곧 빛을 잃었다. 금융실명제의 생명이 꺼지고 법인세 인하도 없던 일이 돼버렸다. 장영자 사건과 잇단 경제 정책 실책의 후유증은 국민경제가 그대로 떠안았다. 저금리와 실명제 추진에 거액의 자금이 제도권에서 빠져나가 부동산 투기를 확산시켰다. 1982년에는 기업공개가 단 한 건도 없을 정도로 증시도 힘을 못 썼다. 얼마 뒤에 굴러들어온 3저 호황이 없었다면 전두환 정권의 경제는 대형 조치의 후유증으로 몰락했을지도 모른다. 5공은 운이 좋았다. 최종심에서 법정 최고형인 15년형을 선고받은 장영자·이철희 부부는 10년 가까운 감옥살이 끝에 풀려났다. 출소한 뒤에 이들은 자신들이 ‘정치적 희생양’으로 억울하게 옥살이했다고 토로했다. 검찰이 발표하기 며칠 전인 1982년 4월29일 자신들을 구속하기 전까지는 1원 한 장 부도나지 않았는데 둘을 한꺼번에 구속해 문제가 발생한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과연 검찰과 국세청이 손을 안 댔다면 이들의 수건돌리기 게임은 지속될 수 있었을까. 장영자·이철희 부부의 주장대로 그들이 정치적 희생양이었다면 누가 기획하고 연출했을까. 설이 많다. 5공 실세들이 주도하다 전두환 대통령 내외에게 미움을 샀다는 설과 최고 권력층의 비자금 루트였다는 해석이 동시에 존재한다. 분명한 점은 두 가지다. 국민들의 숫자 감각을 무디게 만들 만큼 대형 부패사건이 꼬리를 물었다는 점이 첫 번째. 두 번째는 대통령 자신들이 부패의 장본인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검찰이 밝혀냈던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조성한 비자금 규모가 최대 1조 4,000억원…. ‘단군 이래 최대’였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당시 금융계는 두 가지 프레임으로 장영자 사건을 대했다고 한다. 반성과 반발. 금융 비리를 반성하면서도 정권에 대해서는 반발감이 커졌다. 1980년 7월 중순 ‘금융계 숙정(肅正)’이라는 이름 아래 은행과 보험, 증권사에서 임직원 431명이 쫓겨나는 사태를 겪은 뒤끝. 장영자 사건을 보며 금융계 종사자들이 느낀 감회는 남달랐다. 금융계 숙정은 국가보위특별위원회가 민심을 강제로 수습하기 위해 동원한 이른바 ‘사회 정화’ 라는 이름 아래 ‘삼청교육대’와 ‘비리 공직자 추방’과 같은 맥락에서 취급됐다. 숙정의 압력을 피할 수 있던 곳은 해외교포 자본으로 설립된 한 회사의 대주주가 신군부와 끈이 닿아 업계 전체가 특혜를 입은 단자업계 뿐이었다. 정의사회를 만들겠다며 금융인들을 숙정한 뒤 물이 맑아졌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신군부와 친했던 어떤 인사는 금융권의 황제로 행세했다. 하루아침에 대리에서 부장으로 승진해 결국 은행장 자리까지 오른 사람도 있다. 정치적 의도가 담긴 국보위의 숙정은 금융 혼란으로 이어졌다. 장영자·이철희 부부의 어음 사기 사건과 명성 사건 같은 권력형 금융 부조리가 터진 게 바로 5공 시절이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 서울 명동 금융회사에 근무하는 넥타이 부대가 거리를 매웠던 데에도 5공과 권력형 금융비리에 대한 불신과 반발이 깔려 있다. ** 장영자 사건은 온 국민에게 ‘물방울 다이아몬드 반지’라는 게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웃지 못할 일은 물방울 다이아몬드가 다시 등장했다는 점. 1982년 11월, 경찰은 대도(大盜) 조세형을 체포했는데 압수품 가운데 물방울 모양과 보트 모양으로 가공한 다이아몬드 2개가 나왔다. 크기도 컸다. 각각 5.75캐럿과 5.6캐럿. 불과 5개월 전 장영자 사건이 교육 시켜준 물방울 다이아몬드를 기억하고 있던 국민들은 한국에 단 하나라던 장영자의 물방울 다이아몬드보다 더 큰 것이 있었다는 점에 놀라고 도둑 당하고도 쉬쉬했다는 점에 더욱 놀랐다. 국민들은 ‘정의사회 구현’을 강조하는 정권을 속으로 비웃었다. ‘정의사회 구현, 좋아하네’ 물방울 다이아몬드 얘기 3탄은 장영자 사건 29년 만에 등장했다. 2007년 대통령선거 당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 진영에서 BBK 의혹을 막아내는데 기여했고 감사위원을 지낸 검사 출신의 인사가 부산저축은행 로비와 관련해 물방울 다이아몬드를 받았다는 논란이 2011년을 달궜었다. 이쯤 되면 한국에서 물방울 다이아몬드는 ‘신의 눈물’이 아니라 ‘신의 저주’인지도 모른다. -
고야, '5월3일의 학살'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5.03 06:00:00마드리드 시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발단은 외국인 국왕 임명. 인기는 없었어도 멀쩡한 왕을 폐위하고 나폴레옹의 형인 조세프 보나파르트가 스페인 국왕으로 부임한다는 소식에 마드리드가 들끓었다. 마침 인권 신장과 대혁명의 사도라고 믿었던 프랑스군의 압제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던 터. 불만은 곧 봉기로 이어졌다. 항거하는 스페인 민중을 프랑스군은 총칼로 짓밟았다. 스페인 낭만주의 화풍의 대가 프란시스코 고야는 6년 뒤 이를 화폭에 옮기고 이런 제목을 붙였다. ‘1808년 5월 2일’. 고야가 붙인 이름 대신 ‘마드리드의 봉기’ 또는 ‘5월 2일의 봉기’로 불리는 스페인 시민들의 봉기는 피를 불렀다. 동료들이 죽어 나가자(31~150명) 프랑스군은 더욱 무자비한 탄압에 나섰다. 시민 500여명이 죽임을 당한 가운데 공개 처형 당한 사람만 113명. 고야는 이 역시 화폭에 담았다. 제목 ‘1808년 5월 3일.’ ‘5월 3일, 쁘린씨뻬 피오 언덕의 총살’로도 불리는 이 작품은 당시 상황을 적나라하게 전해준다. 두 팔을 벌리고 총살형을 맞이하는 흰색 상의를 입은 남자의 손바닥에 못 자국이 보인다. 죄 없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보는 듯하다. 반대편 사형 집행자들은 양심의 가책 탓인지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총검을 들이대고 있다. 고야가 그린 학살 장면은 20세기 미술계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에도 영향을 미쳤다. 고야의 그림은 경제사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프랑스군이 스페인에 진주한 배경은 대륙 봉쇄령. 나폴레옹이 영국 경제의 숨통을 죄기 위해 단행한 경제적 봉쇄조치는 거꾸로 영국의 이익을 불려준 반면 유럽 대륙의 물자 부족을 야기했다. 수요는 공급을 낳게 마련. 스웨덴과 스페인, 포루투갈 등지에서 밀수가 뒤따랐다. 분노한 나폴레옹은 밀수의 중심지이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군대를 보내고 결국 학살극까지 벌어졌다. 스페인의 저항은 나폴레옹 몰락의 서곡이었다. 실은 프랑스군대가 마드리드에 진입하던 무렵이 영광의 최절정기. 나폴레옹 용병술의 백미라는 아우스터리츠 전투(1805.12)의 성과를 담아낸 결과물인 틸지트조약(1807.7)을 통해 러시아까지 머리를 조아리고 들어왔기 때문일까. 기고만장한 나폴레옹은 영국과 밀무역을 하는 포르투갈을 응징하겠다며 스페인에 진주하더니 마침내 자기 형을 국왕으로 앉혔다. 프랑스군은 전국적으로 확산된 민중 봉기에 밀렸다. 조세프가 마드리드에서 쫓겨나자 나폴레옹은 직접 20만 대병력을 지휘해 스페인을 되찾았다. 오스트리아의 저항 움직임에 나폴레옹은 걱정하는 형 조세프에게 ‘오스트리아를 혼내주고 늦어도 한 달 반이면 돌아올 것’이라며 전장으로 떠났으나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 1809년 7월 바그람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크게 무찔렀는데 왜 돌아오지 않았을까. ‘혈통’에 대한 미련 탓이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진주한 나폴레옹은 1810년 합스부르크가문의 대공녀 마리 루이즈와 결혼해 이듬해 아들을 얻었다. 나이 40세였던 나폴레옹은 띠동갑인 18세 신부와 파리에 머물며 스페인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폴레옹이 없는 동안 스페인의 상황은 프랑스군 입장에서는 한 마디로 수렁. 온 국민이 뭉쳐서 끈질기게 저항하는 통에 스페인은 프랑스군의 무덤으로 변해갔다.* 나폴레옹 전쟁 초기 청년장교였던 칼 폰 클라우체비츠는 ‘전쟁론’에서 ‘무장한 인민의 침략군에 대한 저항, 즉 인민전쟁의 시초가 스페인 민중의 저항’이라고 봤다. 하긴 나폴레옹이 정신 차리고 전쟁터에 나왔어도 상황이 달라질 여지는 크지 않았다. 무려 35만명이라는 프랑스군이 발목이 묶인 상태였으니까. 지형 자체가 평원에서 기동전과 병과 간 협동작전에 의한 섬멸전을 주특기로 삼는 프랑스군이 가장 싫어하는 산악 지역이 대부분이었다. 포병과 기병대 운용이 제약받는 상황에서 게릴라(guerrilla)로 변한 시민과 성직자, 농민들의 기습을 받아 전력이 약해졌다.** 결국 스페인군과 포르투갈·영국의 연합군은 1814년까지 계속된 ‘반도전쟁’에서 소부대 기습전략으로 나폴레옹의 35만 대군을 무찔렀다.*** 약 4만명의 영국군을 지휘하며 ‘반도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국군 웨즐리 육군 소장은 승전을 거듭하며 공작 작위까지 따냈다. 엘바섬을 탈출해 100일 천하를 누린 나폴레옹의 마지막 싸움인 워털루 전투에서 승리를 따낸 웰링턴 공작이 바로 아일랜드 출신의 빈한한 귀족이었던 아서 웨즐리 장군이다. 세인트 헬레나섬에서 나폴레옹은 “스페인의 궤양이 나를 괴롭혔다”고 한탄했다지만 중요한 전장을 마다하고 ‘후대에게 프랑스 제국 황제의 적통에 걸맞는 혈통을 찾아준다며 결혼 놀음에 빠져 있던 본인을 책망할 수 밖에. 프랑스군은 러시아 원정에 앞서 이미 스페인에서 진이 빠지고 골병들었던 셈이다. 스페인 민중들은 끊임없이 프랑스군을 괴롭혔다. 프랑스군은 질서와 치안 유지, 주둔지 방어, 병참선 안전 확보에 병력을 투입하느라 지쳐갔다. 스페인에 주둔했던 프랑스군이 언제나 영국과 스페인, 포르투갈의 정규군보다 많았으면서도 항상 적은 병력으로 싸울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게릴라들로 인해 분산을 강요받았기 때문이다. 포르투갈에서도 적군인 프랑스군과 싸우며 근대적 시민의식이 보다 뚜렷해졌다. 더욱이 개전 초기 본토를 버리고 식민지인 브라질로 이주한 왕실에 대한 불신도 깊어졌다. 브라질 역시 비슷한 시대적 배경을 공유한다. 나폴레옹에 쫓겨 브라질 식민지로 피신했던 포르투갈 왕실이 본국으로 귀국할 때 홀로 남았던 왕세자는 1822년 ‘독립이냐 죽음이냐’를 외치며 독립을 선포한 게 독립 국가로서 브라질의 첫 아침이다. 만약 나폴레옹이 혁명의 전파자에 만족하며 피붙이들을 유럽 각국의 꼭두각시 왕으로 옹립하지 않았다면, 자기 자식에게 물려줄 고귀한 혈통에 매달리지 않았다면 역사는 달라졌을까. 역사가 반복해서 들려주는 무수한 교훈에도 사람들은 오직 나와 내 가문의 피만이 가장 확실한 보전수단이라고 믿는다. 되먹지 못한 재벌 3세, 4세들과 나폴레옹가의 몰락이 머리 속을 오간다./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한창 많을 때는 35만명선에 달했던 스페인·포르투갈 주둔 프랑스군은 연인원 27만~30만명이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20만명은 프랑스인, 나머지는 동맹국 군대의 전사자라고. ** ‘스페인어로 ‘작은 전쟁’을 의미하는 ‘게릴라(Guerrilla)’라는 용어가 바로 이때(1809년)부터 쓰였다. *** 이 전쟁에 대한 명칭부터 나라마다 다르다. 스페인은 ‘독립전쟁’이라 부르고 영국에서는 ‘(이베리아) 반도전쟁’이라고 쓰며 프랑스는 ‘에스빠냐 전쟁’이라고 한다. 전쟁의 성격에 대해서도 각국의 입장이 조금씩 차이난다. 스페인은 애국시민들의 게릴라 활동을 부각하는 반면 영국은 웨즐리 장군의 영국군이 주류였고 게릴라는 오히려 작전에 반대가 됐던 ‘오합지졸’로 격하하는 경향이 짙다. 프랑스는 ‘게릴라’의 전력을 과대평가하는 한편으로 게릴라의 비인도적이고 잔인한 측면을 강조하는 데 무게를 둔다. -
바운티 호의 반란, 그 숨은 얘기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4.28 07:01:381789년 4월 28일 새벽 5시 무렵, 남태평양. 타히티섬과 호주 중간 부근 해역을 항진하던 영국 군함 바운티호에서 선상 반란이 일어났다. 선원들을 함부로 대하고 폭언을 일삼던 함장에 대한 항거였다. 반란을 주도한 항해사 크리스천은 유혈 사태 없이 배를 장악하고 블라이 함장을 보트에 실어 바다에 내려놓았다. 선원 45명 중에서 반란에 동조하지 않겠다던 준사관과 부사관 17명도 함장과 함께 쪽배에 실렸다. 세 차례나 영화로 만들어졌기 때문일까. 선상 반란의 장면이 낯설지 않다. 영화 뿐 아니다. 소설과 연극도 많다. 남태평양에는 이들에 대한 얘기가 마치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온다. 영화나 소설의 주제는 간단하다. 억압과 정의의 대립, 영국 해군 수병과 원주민 여인 간의 사랑. 시대에 따라 보는 시각이 조금씩 달랐을 뿐이나 실제 사건의 배경과 내용은 보다 복잡하다. 파장도 적지 않았다. 바운티호는 애초엔 군함이 아니었다. 1784년 건조돼 민간 상선으로 쓰이던 배를 영국 해군은 1787년 매입하고 뜯어고쳤다. 개조의 주안점은 화물칸 확대. 함장실조차 온실로 바꿨다. 직사광선이 적재물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며 유리도 불투명한 간유리로 바꿔 끼웠다. 화물칸의 습도를 유지하는 원시적 장치까지 넣었다. 도대체 무엇을 적재하려고 배를 고쳤을까. 답은 빵나무. 바운티호의 공식 임무는 측량이었으나 진짜 목적은 남태평양 특산물인 ‘빵나무(breadfruit)’ 묘목의 운송에 있었다. 조리하면 빵과 비슷한 맛을 내는 열매가 달린 빵나무 묘목의 행선지는 서인도제도였다. 설탕의 원료인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노예들에게 비싼 곡물 대신 빵나무를 먹여 수익을 늘리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영국과 전쟁 끝에 독립한 미국으로부터 식량 공급이 어려워진 가운데 사탕수수 재배업자들과 무역업자들은 해군을 움직였다. ‘베시아’라는 상선을 사들여 군함 겸 묘목운반선으로 개조한 것도 상인들이 압력이 통했기 때문이다. 영국 해군은 개조된 상선의 이름을 바운티호로 바꾸고 함장에 윌리엄 블라이를 앉혔다. 블라이는 적임자처럼 보였다. 제임스 쿡 선장 밑에서 세계를 처음으로 일주한 경험이 있던 인물이었기에. 블라이도 반겼다. 미국 독립전쟁이 끝나고 단행된 군축으로 신분이 예비역으로 바뀌어 급여가 절반 이상 깎인 뒤 무역선에서 일하던 블라이는 현역 복귀와 특별 상여 지급을 약속받았다. 문제는 바운티호의 근무 여건. 이런저런 기구를 많이 싣는 통에 선원들의 주거 환경이 나빠져 불만이 차올랐다. 더욱이 민간인 생물학자 2명을 포함해 모두 46명인 선원 중에는 해병이 한 명도 없었다. * 블라이가 항로를 단축하다며 시도했던 위험지역 돌파가 실패하자 선원들의 함장에 대한 불신이 한껏 높아졌지만 바로 천국이 찾아왔다. 타히티에 상륙한 것이다. 타이티에서 선원들은 5개월 동안 빵나무 묘목을 기르며 원주민 여인들과 달콤한 시간을 가졌다. 목표인 빵나무 묘목 1,015개를 실은 바운티호가 출발할 때 수병들과 정이 든 타히티 여인들은 애타게 눈물 흘렸다. 출항 24일째 선상 반란을 일으킨 크리스천 등 주모자들은 배를 몰아 남태평양 섬을 돌다 5개월 만에 타히티로 돌아갔다. 여기에서 하선한 인원이 15명. 남은 주모자들은 여인 14명을 포함한 타히티인 20명을 태우고는 어디론가 떠났다. 어딘가에 내리자마자 그들은 두 가지 이유에서 배를 태웠다. 내부 배신자가 생겨서 탈출하는 경우와 항명 탈영병을 잡으려는 영국 해군을 피하기 위해 배를 불사른 반란 주모자들의 소식은 오랫동안 끊겼다. 블라이 함장은 어떻게 됐을까.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식량이라고 고작 5일분만 실었던 보트에 탄 18명 중 17명이 섬과 섬의 열매로 연명하고 피지주민 등의 도움을 받아가며 6,500㎞ 바다를 항해해 구조받았다.** 블라이 함장 일행이 런던에 귀환한 1790년 3월 영국은 대대적인 환영 행사를 펼쳤다. 프랑스 혁명이 터져 언제 영국으로 번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블라이 일행은 ‘불굴의 정신을 지닌 영웅’으로 포장돼 국민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영국은 한 걸음 더 나갔다. ‘선상반란은 반드시 제압한다’는 전통을 지키려 524톤짜리 쾌속함 ‘판도라’호를 타히티에 급파해 14명을 잡아들였다. 귀환하던 중 풍랑을 만나 4명이 죽고 결국 10명이 영국에 호송돼 재판받았다. 무죄 4명과 사면 3명에 3명은 교수형. 블라이 함장은 승승장구했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사우스 웨일스의 총독까지 맡았다. 럼주 불법거래를 근절하라는 임무를 받고 부임한 그는 가혹하게 병사들을 대해 다시금 반란을 야기했다. 1808년 1월 호주 주둔 영국 군대의 병사들이 술의 공평한 배분을 주장하며 일으킨 ‘럼주 반란’의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 바로 블라이다.*** 사라졌던 크리스천 일행에 대해서는 온갖 얘기가 떠돌았다. 피케엇 섬에 숨어 들어간 그들의 존재는 은신 150여년 만에 바운티호의 불탄 잔해가 발견되면서 공식 확인됐다. 섬에 들어온 그들은 치정에 얽혀 서로 죽이고 죽었다. 주모자 크리스천도 타히티계 남성에게 살해 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신앙심이 깊었던 한 사람만 살아남았다. 피케엇 섬에는 후손 50여명이 살고 있으나 연속된 근친혼으로 크고 작은 병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바운티호 사건은 각 개인보다 영국 사회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 영국이 노예제도를 공식폐지(1833년)하는 데도 작용했다. 600여척의 전함을 보유한 해군이 작은 민간상선 ‘베시아’호를 1,950파운드에 구입해 개조비용 4,456파운드를 들여 군함 바운티호로 바꾼 연유에서부터 밀수업자들이 판치던 노예무역에 관여한 이유를 추궁하는 과정은 노예폐지론의 목소리를 높여줬다. 바운티호 사건은 워낙 유명해서인지 다양한 분석 틀에 의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호주의 문화인류학자인 그렉 드닝은 선상반란의 원인을 ‘언어 세계의 예의를 공격했기 때문’이라고 봤다. 선원들과 의사 소통에서 주파수가 안 맞는 언어를 구사했기 때문에 선장의 선장다움을 실현하지 못했고 결국 반란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렉 드닝의 시각에서 우리를 본다. 언어 세계의 예의는 존중되고 소통구조는 온전한가. 말단 공무원부터 대통령까지 공직자다운가.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당시 영국 해군에서 승선 해병의 평소 임무는 선내 감찰과 선상 반란 제압 및 함장 경호. 함장의 권위를 상징하는 존재이기도 했던 해병이 승선했다면 크리스천의 선상반란도 무혈이 아니라 피를 봤을 가능성이 높았다고 한다. ** 블라이 일행이 기적처럼 귀환하는데 도움을 줬던 피지는 구조적인 비극으로 접어들었다. 블라이 일행이 쉬는 와중에서도 제작한 해안지도와 마을의 기록을 토대로 마음씨 고운 영국인 선교사가 들어오고, 뒤따라 찾아온 영국 상인들은 원주민들에게 총을 팔았다. 내전으로 힘이 약해진 원주민들은 1874년 영국에 굴복하고 결국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영국인들은 피지에 사탕수수 농장을 개척한다며 낙천적 기질의 피지인을 기피하고 인도인 노동자들을 대거 불러들였다. 오늘날 피지 인구의 절반씩을 양분하는 토착 피지인들과 인도계 피지인들은 불구대천의 원수로 싸우고 있다. 피지에게는 블라이 일행을 도와줄 게 아니라 상어밥이 되도록 내쫓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블라이는 호주 지방의 총독직에서 밀려나는 부침을 겪었어도 나폴레옹 전쟁에서 공을 세운 덕분에 승진을 거듭해 해군 소장까지 올랐다. *** 호주 주둔 영국군이 정량 지급을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다는 점은 영국 사회의 반성과 성찰을 불렀다. 새로 부임한 식민지 총독 매쿼리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비상수단을 썼다. 죄수들을 사면하고 심지어 관리로 등용했다. 런던은 경악했으나 백인 사회안에서나마 사람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엷어진 호주는 도약을 전기를 맞았다. -
밀턴의 열정과 혁명…1667년 실낙원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4.27 04:00:00‘실낙원(失樂園·Paradise Lost)’. 셰익스피어에 견줄 만한 영국 시인이라는 존 밀턴(1608~1674)의 대표작이다. 밀턴보다 44년 앞서 태어난 셰익스피어는 막대한 부동산을 제외하고도 창작으로만 연간 200파운드는 벌었다는데 밀턴은 대서사시 ‘실낙원’으로 인세(印稅)를 얼마나 가져갔을까. 대부분의 문헌에는 이렇게 나온다. ‘시력을 잃고 가난에 허덕이던 밀턴이 단돈 10파운드에 저작권을 넘겼다’고. 맞다. 한창 나이인 44세에 실명(失明)하고 반역자로 찍힌 52세부터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가난에 시달려 많지 않은 돈에 저작권을 출판업자에게 양도한 것도 맞다. 다만 저작권을 넘긴 대가로 받은 돈의 액수는 알려진 바와 다르다. 정확하게 10파운드가 아니라 5파운드. 1667년 4월 27일 작성된 계약서에는 ‘원고를 넘길 때 5파운드를 지급하며 초판이 매진되면 5파운드를 추가로 내준다. 추가 인쇄에 들어가 2판·3판·4판이 팔릴 때마다 5파운드씩 지급한다’고 명시돼 있다. 오늘날 영국 돈 5파운드면 우리 돈으로 약 8,400원. 빼어난 라틴어 문장으로 유럽 대륙에도 명성이 자자했던 밀턴이 왜 이렇게 계약했는지 의구심이 들겠지만 당시로서는 작가에게 다소 불리할 뿐 정상적인 계약이었다고 전해진다. 우선 349년 전의 돈 가치가 지금과 다르다. 소매물가상승률을 감안할 때 당시 5파운드의 가치는 요즘 2,807 파운드(약 884만원) 수준에 해당된다. 터무니없이 적은 금액은 아니었지만 밀턴의 이름 값에 비하면 만족스럽지 못할 계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따로 있다. 남다른 신념과 인생 역정, 정치 상황 탓이다. 박상익 우석대 교수(역사교육과)의 저서 ‘밀턴 평전-불굴의 이상주의자’에 따르면 밀턴은 평생 세 차례의 큰 위기를 겪었다. 어린 아내와의 이혼 논란과* 시력 상실, 왕정복고. 참수당한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의 귀환과 왕정복고(1660)는 밀턴의 말년을 옥죄었다. 밀턴은 공화정의 이론가였기 때문이다. 시력을 잃은 이유도 실은 공화정에 대한 신념에서 비롯됐다. 1650년 프랑스의 유명 논객이 ‘찰스 1세를 위한 변명’을 출간하자 크롬웰의 외국어 담당 비서관으로 일하던 밀턴은 ‘잉글랜드 국민을 위한 변명’ 출간으로 맞대응하고 ‘잉글랜드 국민을 위한 두 번째 변명’을 써나가던 1652년 두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아내의 도망으로 책에 파묻혀 살던 1644년부터 시력에 이상이 생겨 점점 악화하던 상황. 친구들은 집필을 만류했으나 밀턴은 듣지 않고 일에 매달린 끝에 맹인이 되고 말았다. 공화국 옹호에 두 눈을 바친 셈이다. 찰스 2세가 귀환하기 두 달 전에는 ‘자유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한 준비되고 쉬운 길’을 펴냈다. 권력의 무게 중심이 왕당파로 완전히 넘어간 마당, 공화국의 이상을 부르짖던 이들은 모두 국왕에게 넘어가고 오직 시력을 잃은 밀턴만 홀로 끝까지 싸웠던 것이다.** 돌아온 찰스 2세와 왕당파에게 밉보인 밀턴에게는 재산 상실과 자의반 타의반의 자택 감금, 체포와 감옥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때 ‘역적 20명’의 명단에 포함돼 중형을 당한 처지였던 밀턴은 ‘시력을 잃은 작가는 더 이상 왕정에 위험이 안 될 것’이며 ‘신이 이미 시력 상실이라는 징벌을 내린 마당에 잉글랜드 의회가 신보다 심한 벌을 내릴 수는 없다’는 이유로 풀려났다. 사면 이후에도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혀 끊임없이 감시받던 그에게는 불행이 한꺼번에 찾아왔다. 첫째 아내에 이어 두 번째 아내와도 출산 후유증으로 사별하는 아픔을 겪었다. 혼자 어린 딸들을 키우면서도 밀턴은 대작 ‘실낙원’을 구술해 딸들과 세 번째 아내가 받아 적은 끝에 1665년에는 탈고를 마쳤다. 정작 출고까지는 2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런던 대역병(1665)과 대화재(1666)로 출판 여건이 좋지 않았던데다 출판사들이 ‘정치범 밀턴’을 꺼렸기 때문이다. 런던의 끄트머리에 살던 밀턴은 대화재로 인해 얼마 안 남은 재산까지 잃었다. 가까스로 5파운드를 받고 출판계약을 한 밀턴이 추가 인세 5파운드를 받은 시기는 만 2년 뒤인 1669년 4월. ‘실낙원’ 초판 1,300권이 매진된 뒤다.*** 적지만 밀턴은 이 돈으로 최저의 생계를 꾸리며 사망(66세) 전까지 거작 ‘복낙원(復樂園·Paradise Regained)’과 ‘투사 삼손(Samson Agonistes)’을 저술했다. 밀턴 사후에 유가족이 받은 ‘실낙원’ 인세라야 8파운드. 생전의 밀턴이 받았던 인세 총액과 합쳐 18파운드에 불과하지만 작품 ‘실낙원’은 영원히 빛난다. 빅토리아 시대를 풍미한 영국 윌리엄 워즈워드는 1802년 밀턴을 기리며 ‘런던’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밀턴, 그대야 말로 우리 시대에 살아있어야 할 사람/ 지금 영국은 고인 물이 썩어가는 늪 같나니/ 교회도, 군대도, 문학도, 가정도, 웅장한 부호의 저택도/ 마음 속의 행복을 잃었도다./ 아, 우리를 일으켜주오, 우리에게 돌아오라.” 무엇이 낭만주의의 거장인 워즈워드로 하여금 밀턴의 존재를 갈구하게 만들었을까. 프랑스 혁명을 지켜보며 낭만주의와 순수보다는 사회 변혁에 관심이 많았던 청년 워즈워드에게 밀턴이 지켰던 소신과 혁명을 향한 열정, 의지가 그리웠으리라. 밀턴은 믿었다. 신의 가장 훌륭한 종은 지식이 뛰어나거나 재산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주어진 굴레를 그대로 지고 가는 자라고. 그리고 그렇게 살았다. 서사시인으로, 혁명의 논객으로 불꽃처럼 뜨겁게.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밀턴은 국왕 찰스 1세와 의회 간 내전의 기운이 무르익던 1642년 봄 33세의 다소 늦은 나이에 결혼했다. 상대는 왕당파 집안에서 자란 16세의 메리 파월. 둘은 사랑의 열정으로 결혼했으나 신부는 두 달 만에 친정으로 돌아가 3년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아내의 공백 동안 밀턴은 이혼을 옹호하는 팸플릿 네 편을 써 평생 ‘이혼 주창자’라는 오명 속에 살았다. 정작 이혼의 정당성을 주장한 밀턴은 이혼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세 번 결혼했으나 두 번의 사별에 따른 결과였다. 첫 번째 아내와는 시력을 상실한 1652년 사별했다. 1656년 결혼한 두 번째 부인도 출산 후유증으로 1658년 사망하고 넷째 딸까지 출생 넉 달 만에 죽고 말았다. 밀턴은 1663년(55세) 23세의 신부 엘리자베스 민셜과 결혼하며 가정의 안락을 찾았다. 둘은 33년 나이 차이에도 행복했다고 한다. 부유한 약제상이자 자선사업가의 조카였던 엘리자베스는 1674년 밀턴이 사망한 이후에도 54년을 더 살았다. ** 밀턴은 진작부터 신념을 위해 압력에 맞섰다. 1643년 의회가 모든 출판물의 사전 검열과 출판 조합 등록을 강제하는 명령을 내리자 밀턴은 이듬해 ‘아레오파지티카(Areopagitica)’를 항의의 뜻에서 무검열·무등록으로 출간했다. 밀턴은 이 책에 ‘출판 허가제와 검열제도는 불합리하며 의회는 부당한 명령을 폐지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특히 “나에게 자유를 달라. 양심에 따라 자유롭게 공부하고, 자유롭게 말하며 자유롭게 추론(推論)할 수 있는 자유를, 다른 모든 자유 이상으로 달라”는 대목은 언론 자유를 향한 최초의 봉화(烽火)로 평가받는다. 밀턴이 이 책에서 제시한 ‘사상의 자유 공개시장’이 바로 오늘날 ‘표현의 자유’다. 아레오파지티카는 고대 그리스의 법정인 아레오파고스에 ‘론(論)’이란 의미의 ‘카’(ca)를 덧붙여 만들어낸 말이다. *** 실낙원 초판의 가격은 권당 3실링(20실링=1파운드)으로 결코 싸지 않았어도 2년 만에 다 팔렸다는 점은 당시 영국에서 읽을 만한 사람은 거의 다 읽었다는 얘기다. 보통 시집의 초판은 15년이 걸려도 남아 있는 경우가 많던 시대였다고 한다. 더욱이 초판 발매 시점은 대역병과 대화재의 뒤끝이었을 뿐 아니라 네덜란드 함대가 템스강에 정박한 영국 함대를 포격해 제 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이 발발했던 시기였다.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히트작을 낸 밀턴의 평판도 올라갔다. 말년의 밀턴을 지탱해준 것은 이 같은 지적 자존감이 아니었을까 싶다. 유럽 수집가들이 인터넷에 올린 자료에 따르면 온전하게 남은 책은 단 5권뿐이라는 실낙원의 1667년 초판의 가격은 요즘 경매장에서 15만~20만달러를 호가한다. 실제 매매에서는 책의 상태가 안 좋았는지 알 수 없으나 지난해 12월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6만8,750만달러에 낙찰된 게 가장 최근의 기록이다. -
'인명보다 석탄', 日 번시탄광 참사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4.26 04:00:001942년 4월 26일 오후 2시 5분, 만주국 랴오닝성(遼寧省) 번시(本溪) 탄광. 굉음과 함께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앞을 분간할 수 없는 검은 연기에 휩싸인 탄광에서 광부 1,549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전까지 최악의 참사로 기록된 프랑스 코리에르 탄광 폭발(1903년)로 인한 사망자 1,099명보다 훨씬 많았다. 번시(일본명 혼케이코)탄광 참사는 인류가 경험한 최악의 광산 사고로 남아 있다. 사상 최악의 탄광 사고임에도 번시 폭발사고는 사료가 많지 않다. 재난에 관한 기록을 철저하게 남기는 미국과 유럽의 언어는 물론 중국어와 일본어 자료도 찾아보기 힘들다. 일본 제국주의의 고의적 은폐와 역대 중국 정부가 사후 조사를 게을리 한 탓이다. 사고 60년이 지난 후부터야 생존자들의 목소리가 조각난 퍼즐처럼 맞춰지는 정도다. 랴오닝성 지방은 예로부터 양질의 철광으로 유명했던 지역. 고구려 시조 주몽이 부여를 탈출해 나라를 세우며 첫 수도로 졸본성(오녀산성)을 고른 이유도 풍부한 철광석 때문으로 알려진 이 지역은 석탄도 많았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며 목에 힘주고 만주로 진입한 일본은 오쿠라(大倉) 재벌을 앞세워 번시 광산 채굴에 들어갔다. 겉으로만 중일 합작이었을 뿐 일본이 단독으로 경영권을 행사한 탄광의 노동환경은 열악했지만 1931년 만주침략 이후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일본의 괴뢰 만주국이 건국(1932년)된 뒤부터 작업 환경은 더욱 나빠졌다. 만주를 계획경제체제로 운영하며 군수공업 중심의 거대한 중화학공업단지를 조성하려던 일제는 산업화의 연료로 석탄 증산에 매달리며 갖은 방법으로 일꾼을 끌고 왔다. 더욱이 일본 본토에는 이렇다 할 철광산이 없었던 마당. 만주와 중국은 물론 인도차이나와 태평양전쟁까지 일으킨 일본은 철과 석탄이 풍부한 번시 광산을 마구잡이로 파먹었다. 당연히 인력 소요도 커졌다. 일반 모집으로도 광부가 부족하자 일제는 강제 징용과 항일운동을 벌이다 체포된 중국인들을 탄광에 집어넣고 하루 12시간 이상 노예로 부렸다. 중국 자료에는 연인원 850만명이 이곳에서 강제노역했다는 추정도 있다. 사고 경위와 처리는 더욱 악랄하다. 무엇보다 대형 사고를 방지할 시간적 여유가 충분했다. 이상 징후가 처음 발생한 시각은 오전 11시 30분. 부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지상 변압기가 고장으로 작동을 멈췄다. 광산 전체에는 전기 공급이 끊겼다. 광부들을 이때 철수시켰다면 대형 인명 피해를 막을 수 있었지만 증산에 눈 먼 일제는 그러지 않았다. 전압기가 복구된 시각이 오후 2시 무렵. 환풍기가 먼저 돌아갔다. 지하 갱도에도 전기가 공급되고 바로 뒤, 폭발이 일어나고 광산 지역 전체에 검은 연기가 가득 찼다. 후일 사고 조사에서 폭발의 원인은 정전으로 환풍기가 멈추며 갱내에 빠져 나가지 못한 석탄 분진(미세한 기루)으로 지목됐으나 정작 인명 피해를 키운 요인은 따로 있다. 두 가지였다. ‘정풍(停風)과 봉정(封井).’ 사고 직후 일제는 바람이 통하면 광산 시설이 연쇄 폭발할 수 있다며 돌아가는 환풍기를 껐다. 공기 흐름을 차단한다며 주요 갱도 입구까지 막았다. 폭발이 일어난 갱내에서 광부들은 탈출의 방법이 없었다. 사망자의 대부분은 갱도 입구에서 일산화질소에 질식돼 죽었다. 참상이 해외에 알려졌을 때는 이런 반응이 나왔다고 한다. ‘인명보다 석탄이 더 소중한가(need coal, need not people)!’ 소중한 생명도 있었다. 오후 3시 30분 무렵 조직된 일본인 구조대가 사투 끝에 구조해낸 사람도 있었으니까. 폭발 사고에서 유일한 구조자는 일본인 작업 감독이었다. 하루 뒤부터 시작된 사체 수습은 열흘 넘게 걸렸다. 일본은 여론을 호도하기 위해 사고 한 달 뒤 세운 희생자 위령비에서도 장난을 쳤다. ‘혼케이코 산업전사 위령비’에서 사망자를 1,327명을 줄였다. 확실하게 나온 사망자 수를 이 정도로 줄인 것은 그나마 약과. 사고 후 현지에서 발행된 일본계 신문들은 단지 40자(字)로 구성된 기사를 실었을 뿐이다. ‘혼케이코 탄광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났으나 피해는 경미하다.’ 패해가 경미하다고 자기 최면을 걸었기 때문일까. 대형 사고에도 책임 규명은커녕 부장급 한 사람의 정직과 감봉에 그쳤다. 일제가 감췄던 사고의 진상은 1950년대 중반 이후 생존자들의 진술을 통해 하나씩 밝혀졌어도 아직도 베일 속에 있다. 사고 몇 개월 후 벌어진 조사에서 발견된 갱도 옆에 수많은 사체들은 아예 사망자에 포함되지도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중일전쟁에서 승리한 직후 국민당군이나 대륙을 석권한 공산정권이 책임 규명을 게을리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세계최대의 석탄 생산·소비국으로 해마다 수천명씩 광산 사고가 그치지 않는 중국의 입장에서 침략자의 잘못이라도 광산 사고를 거론하기가 편치 않다는 분석도 있지만 역사의 상처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사고의 생존자인 중국 노인이 남긴 글이 뇌리에 남는다. ‘일본침략자들이 반성하지 않고 더러는 미화하지만, 중국인들은 영원히 잊지 않고 기억할 것이다(中國人民永遠不會忘記)!’ 고인들의 명복을 기리는 마음 속에서 궁금함이 고개를 든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사망자 1,549명 가운데 일본인은 31명. 마침 일요일이어서 대부분 휴일을 가졌기에 일본인의 피해가 적었다는데… 사망자 중에서 조선인은 없었을까. 있었다면 항일독립운동을 벌이다 중국인 신분으로 잡혀 와 희생 당했을까. 아니면 ‘2등 일본 신민’이라는 자부심으로 중국인 착취에 앞장서던 인물이었을까. 하긴 창씨개명을 거듭해 민족의 흔적을 지웠다면 조선인인지 일본인인지 가려낼 수도 없었겠지만./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영국·프랑스의 욕심과 중동의 비극…산레모협정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4.25 07:03:141920년 4월 25일, 이탈리아 북서부의 휴양도시 산레모. 프랑스와 인접한 해안도시인 이 곳에서 열린 연합국 최고회의에 참가한 영국과 프랑스 대표가 협정을 맺었다. 산레모 협정의 골자는 땅 갈라 먹기. 패전 독일의 편을 들었던 오스만 튀르크의 영토를 갈라 놓았다. 영국과 프랑스가 주도하고 구색으로 이탈리아와 일본이* 참가한 산레모 회의의 결과는 5개월 보름여 뒤 세브르조약으로 굳어졌다. ** 산레모 협정과 세브르 조약은 터키와 미국 두 나라를 들끓게 만들었다. 마침 패전과 더불어 터키 독립전쟁이 시작되던 시기. 산레모 협정에 자극받은 터키 민족주의자들은 똘똘 뭉쳐 터키-그리스 전쟁에서 승리하는 한편 내부를 개혁하며 오늘날 터키공화국의 기반을 닦았다. 독립전쟁에서 완전 승리한 터키는 연합국과 재협상을 펼쳐 1923년 로잔회의에서 세브르 조약 무효까지 받아냈다. 터키인 절대 다수로부터 ‘국부’로 추앙받는 무스타파 케말 파샤가 이끈 민족주의자들의 ‘국민운동’이 없었다면 터키는 이스탄불 상실은 물론 영토 크기도 요즘의 30% 정도로 쪼그라들었을지도 모른다. 미국은 배신감에 떨었다. 1차대전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사용한 석유의 90%를 공급했음에도 산레모 회의 참석조차 교묘하게 배제된 채 전리품 배분에서 소외됐다는 사실에 열 받았다. 워싱턴 정가에서는 ‘전승 연합국간 평등한 권리를 부여한다’는 베르사이유 종전조약 위배라는 반응이 나왔다. 미국 석유업계는 한걸음 더 나가 ‘시대에 걸맞지 않는 구식 제국주의의 잔재’라는 비난을 퍼부었다. 왜 국제 문제에 석유업계가 나섰을까. 세계최대의 산유국이지만 자원이 언제 고갈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 속에 가능성의 땅, 중동을 주시하고 있던 터. 유전이 발견(1908년)된 지역은 페르시아 뿐이었지만 부존 가능성이 많은 중동 지역을 영국과 프랑스가 나눠 먹었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었다. 미국 석유업계의 관심사도 오스만제국의 해체보다는 중동 지역 금긋기에 있었다. 산레모 협정은 오스만의 강역을 8개로 나눴으나 중동지역만큼은 영국과 프랑스만 차지했다. 가장 큰 이익을 차지한 나라는 영국. 팔레스타인과 독일이 오랫동안 공들였던 메소포타미아(이라크)지역을 먹었다. 프랑스의 영역은 시리아와 레바논 지역으로 국한됐으나 영국이 중동지역에서 개발하는 석유 지분의 25%를 넘겨 받았다. 중동지역의 석유개발권을 보유한 터키 석유회사의 독일 지분 25%를 얻는 덤도 챙겼다. 석유 메이저의 하나인 프랑스 국영석유회사(CFP)도 이 협정의 결과물로 1924년 태어났다. 영국과 프랑스는 왜 미국까지 따돌리며 무리한 협정을 맺었나. 세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는 석유의 중요성을 절감했기 때문. 영국은 전쟁기간인 1916~1917년 극심한 석유 부족으로 추위에 떨고 군 장비의 연료 부족을 겪었다. 군대의 기동력이란 말의 숫자가 아니라 마력(馬力)으로 표시되는 내연기관을 갖춘 비행기와 자동차에 의해 좌우된다는 사실을 통감하며 석유 부존 가능성 지역에 사활을 걸었다. 두 번째 요인은 1916년 비밀리에 체결한 사이크스-피코협정. 영국과 프랑스가 제정러시아와 더불어 중동을 분할하기로 약속한 비밀협정이 볼세비키 정권에 의해 1917년 말 폭로되고 전쟁이 끝난 뒤 의혹이 짙어지자 문제가 커지기 전에 현실로 굳히려 마음 먹었다. 세 번째는 아랍 민족주의의 대두. 약속대로 영국이 독립 국가를 세워줄 것으로 믿었던 아랍민족들은 시리아 등지에서 독립의 깃발을 올렸다. 영국과 프랑스가 구상한 반식민통치 계획의 걸음걸이도 빨라졌다. *** 산 레모 협정은 아랍 민족의 반발을 낳고 운명도 갈랐다. 종전 후 독립시켜준다는 약속을 믿고 영국군 정보장교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도와 오스만 튀르크군과 전쟁을 치르며 10만명의 전사자를 낸 끝에 다마스쿠스에 자리 잡아 시리아 국왕임을 선포했던 파이잘 1세는 프랑스에 의해 쫓겨났다. 영국은 분노한 파이잘을 설득해 명목뿐인 이라크 국왕으로 앉혔다. 이라크 국왕이었던 파이잘의 형은 요르단 국왕으로 왕관을 바꿔 썼다. 반면 유대인들에게는 희망이 생겼다. 영국은 산레모 협정의 결과로 팔레스타인을 위임 통치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유대인들의 시오니즘 운동을 부추겼다. 영국의 주요 신문들은 산레모협정 다음날부터 ‘시오니즘 운동에 큰 기회가 왔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오는 유대인들이 급증하며 1,800년 이상 무슬람과 유대인이 평화롭게 공존하던 중동지역에서는 증오와 원한이 깊어졌다. 영국과 프랑스가 기획한 중동 석유 독과점 시나리오를 깬 나라는 미국 뿐이다.**** 끊임없이 지분조정을 요구한 미국은 결국 1927년 23.5%의 지분을 확보하며 중독의 석유 이권에 발을 들였다. 산레모협정에서 시리아와 요르단, 팔레스타인, 그리고 석유 부존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으로 기대받던 메소포타미아(이라크) 쪼개 먹기에서 배제된 미국은 근접한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에 눈을 돌렸다. 사우디와 접촉을 책임졌던 인물인 광산업자 출신의 상무장관 허버트 후버는 몇년 뒤 미국 31대 대통령에 뽑혔다. ***** 산레모 협정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지만 강대국의 지배의 논리는 여전하다. 미국과 영국은 선거로 뽑힌 이란의 민주정권이 석유자원 국유화를 진행한 1953년 군부 쿠테타를 사주하고 지휘해 외세에 고분고분한 독재 왕정을 심었다. 팔레비 국왕의 학정 결과가 1979년 이슬람 혁명. 두 차례의 이라크 전쟁도 석유 패권 유지라는 측면에서 해석될 수 있다. 오늘날 중동을 휩쓰는 이슬람 근본주의와 테러, 이스라엘의 지역 패권주의와 팔레스타인의 저항도 앵글로 색슨의 책임으로 귀결된다. 영국은 물론 프랑스 역시 인구의 절반이 유랑하는 시리아 난민의 비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1차대전에서 일본의 유럽 전선 파병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전쟁기간 중 일본은 수출과 상선대 운용으로 막대한 이익을 누리고, 아시아지역에서 독일 동양함대의 근거지였던 중국 산동성의 청도(칭따오)와 태평양에 산재한 독일의 식민지를 접수했지만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가 거듭 요청한 유럽전선 파병은 거절하는 게 기본 방침이었다. 그러나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수송선 격침이 잇따르자 1915년 초부터 인도양과 지중해까지 함대를 파견, 호위와 구조활동을 펼쳤다. 일본은 순양함과 구축함 18척으로 주로 지중해에서 작전하며 78명의 전사자를 냈다. 구축함 한 척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의 U-보트(잠수함)에 대파되며 발생한 전사자 59명은 몰타 섬에 묻히기도 했다. 막상 전승국 자격으로 참가한 산레모협정에서는 이렇달 할 소득을 올리지 못했다. ** 프랑스 파리 근교의 세브르에서 연합국과 오스만 제국 사이에 1920년 8월 10일 체결된 세브르 조약은 산레모협정의 재확인. 오스만 제국은 이로 인해 광활한 영토의 대부분을 공식적으로 잃었다. *** 영국은 1차대전에서 이중 플레이로 중동 비극의 싹을 키웠다. 독일과 동맹인 오스만 제국과 싸우던 영국은 1915년 아랍 부족들에게 협력하면 오스만으로부터 독립시켜주겠다는 약속을 서한(맥마흔 서한)으로 남겼다. 영국으로부터 10여 차례나 독립 약속을 확약받은 아랍 부족들은 영국군 정보장교 토마스 로렌스(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주인공)와 함께 시리아와 요르단, 팔레스타인에서 오스만 제국을 물리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그러나 영국은 1917년 벨푸어 외상이 유대인 재벌 베이론 로스차일드에게 ‘유대인들이 영국의 전쟁 수행을 지원하면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를 세우는 데 최선을 다해 도울 것”이라고 약속했다. 급한 나머지 정반대의 두 가지를 약속한 영국은 유대인과의 신의만 지켰다. **** 터키공화국은 독립전쟁에 승리하고 재협상을 통해 산레모협정을 무력화시켰으나 전신인 오스만제국의 강역 중에서 이스탄불과 소아시아지역만 지켰을 뿐 중동과 아프리카 영토는 잃었다. ***** 후버의 지원 아래 탐사에 나선 미국 석유회사 캘리포니아스탠더드오일(소칼)은 사우디 측과 합작해 1933년 캘리포니아-아라비안스탠더드오일을 설립하고 1938년 3월, 이전까지는 상상도 못한 거대규모 유전을 잇따라 발견했다. 캘리포니아-아라비안스탠더드 오일은 1944년 회사 이름을 바꿨다. ‘아람코’로. 1988년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이 100% 지분을 획득하며 ‘사우디 아람코’로 개명한 이 회사는 세계최대의 석유기업으로 기업공개를 추진하고 있다. 미국계 투자은행들에 따르면 사우디 아람코가 상장되면 세계 시가총액 1위인 애플사를 가볍게 누를 것으로 예상된다. 사우디가 이 회사의 기업공개를 추진하는 이유는 저유가 현상이 이어지면서 국가 재정에 빨간 불이 켜졌기 때문이다. -
바다와 속도의 로망, 블루 리본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4.22 06:00:00‘블루 리본 때문일 꺼야.’ 초호화 대형여객선 타이타닉호가 1912년 처녀 항해에서 침몰했을 때 사람들은 이렇게 의심했다. 블루 리본상을 타내 위해 빙산지대를 빠르게 지나가다 변을 당했다고…. 도대체 블루 리본이 뭐길래. 속도 경쟁이다. 대서양을 가장 빠른 시간 안에 건너는 증기선에 주는 일종의 명예. 유래는 훈장(가터 벨트)에서 나왔다. 경마 우승자나 가장 빠른 양털 운반범선의 마스트 꼭대기에 달아주던 푸른색 리본(Blue Ribbon, Blue Riband로도 표기) 획득 경쟁을 증기선에도 적용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온 게 1832년. 미국인 변호사에 의해 철도잡지에 처음 실렸다. 제안이 현실화한 시기는 1838년 4월 22일. 미국 뉴저지주 샌디후크항에 몰려든 군중들은 정오 무렵 군데 군데 뜯겨나간 배수량 1,995톤짜리 증기 범선 시리우스(Sirius)의 입항에 환호성을 질렀다. 속도 기록을 세우며 입항한 시리우스는 항해 도중 석탄이 떨어지자 선체의 목재를 뜯어내 연료로 쓰며 항구에 들어왔다. 연료인 석탄이 없다고 해도 시리우스호는 왜 바람을 받을 대형 돛을 펼치지 않았을까. 영국과 미국 엔지니어들이 정한 속도 경쟁의 세부 규정을 지키기 위해서다. 증기 동력만으로 항행하는 여객선만 경쟁 자격을 줬기에 돛을 펼쳐 바람을 받을 수 없었다.* 자신을 태워가며 항해한 시리우스호의 기록은 18일 14시간 22분(평균 시속 8.03노트). 범선으로 40일씩 걸리던 항해기간을 절반으로 줄였다. 시리우스호는 이 기록 덕분에 속도 경쟁 최초 승리자(당시에는 ‘블루 리본상’이라는 용어가 없이 증기선 속도 경쟁이라고만 불렸다)로 간주된다. 그러나 최초 수상이라는 타이틀만 가졌을 뿐, 기록은 단 하루 만에 깨졌다. 그레이트이스턴호(2,300톤)가 8.66노트 기록을 세웠기 때문. 미국 이민수요를 타고 황금기를 구가하던 대서양노선에는 이때부터 본격적인 경쟁이 붙었다. 증기선끼리의 대서양 속도 경쟁 2년 3개월 뒤인 1840년 7월에는 목조 외륜선 브리타니카(RMS Britannica)호가 증기 여객선으로는 처음으로 대서양 정기항로에 투입됐다. 승무원 93명과 선주 가족을 비롯한 승객 63명 외에 신선한 우유를 공급하기 위한 젖소까지 실은 브리타니카호가 보스턴에 닿았을 때 보스턴 시민들은 ‘메이플라워호 도착 이래 최대의 사건’이라며 반겼다고 한다. 속도가 빨라지고 크기가 커진 배는 더욱 많은 이민 수요를 나르고, 돈이 되는 대서양 정기항로에 더욱 좋은 배가 투입되는 선순환 속에서 속도의 벽도 점차 부서졌다. 1843년과 1889년, 각각 10노트와 20노트의 벽이 조선기술 앞에 무너졌다. 1935년과 1936년, 노르만디호와 퀸 메리호는 동쪽 항로와 서쪽 항로에서 각각 ‘마의 30노트’선마저 넘어 버렸다. 선박의 크기도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내부 장식으로는 역대 최호화여객선으로도 평가되는 프랑스의 노르만디호는 6만 8,500톤, 영국의 퀸 메리호는 8만 1,961톤에 20만 마력의 엔진을 달았다. 350~700마력이던 초기의 블루 리본 수상 증기선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 당연히 건조비용도 많이 들어갔으나 갈수록 각국은 보조비 지급을 아끼지 않고 블루 리본 상에 달려들었다. 왜 그랬을까. 속도 경쟁에는 언제든지 군사적 목적으로 전용하겠다는 숨은 목적이 깔려 있었다. 영국의 언론은 독일 해운회사가 블루 리본을 받을 때마다 호들갑을 떨었다. 찰스 킨들버거의 ‘경제 강대국 흥망사’에는 영국이 블루 리본을 1897년 건조된 빌헬름 대제호와 1900년 건조된 도이칠란트호에 각각 빼앗겼을 때 상황이 나온다. 영국은 충격으로 여기고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해 크고 빠른 여객선을 건조해댔다. 전쟁으로 블루 리본 상을 향한 속도 경쟁이 중단됐던 제 1차 세계대전 와중인 1915년 독일해군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격침 당해 미국의 참전을 야기한 루시티아나호(4만 4,060톤) 역시 1907년 레이스의 승자였다. 각국 정부가 지원하는 막대한 보조금으로 건조된 대형 쾌속 여객선들은 2차대전에서도 맹활약했다. 처칠 영국 총리가 승전후 ‘블루 리본를 따내려고 건조한 대형 여객선이 병력을 신속하게 수송한 덕분에 2차대전을 1년 남짓 빠르게 끝낼 수 있었다’고 말했을 정도다. 그렇다면 정말로 타이타닉호도 블루 리본을 의식한 무리한 항해 때문에 침몰했을까. 그렇게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타이타닉의 선사인 화이트라인사가 블루 리본을 거의 독차지하던 커나드사와 경쟁 관계인 것은 사실이지만 같은 영국계 해운사라도 둘은 경영 방침이 달랐다. 속도를 중시한 커나드사에 비해 화이트라인사는 승객의 안락한 항해에 비중을 뒀었다. 타이타닉호가 속으로는 블루 리본을 의식했는지는 몰라도 침몰 당하지 않았다면 전쟁에서 병력 수송선으로 활용됐을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유사시 수송함으로 쓰일 속도 빠르고 큰 배의 끝판 왕은 1952년 건조된 유나이티드 스테이츠(US)호. 크기는 초대형보다 다소 작은 47,264톤이지만 건조 당해년도인 1952년 대서양을 3일 10시간 40분 만에 건넜다. 당시 기록한 평균 속도 35.59노트(약 66㎞)는 아직까지 대형 여객선으로는 최고 기록으로 남아 있다. US호는 여러 측면에서 여전히 관심거리다. 공식적으로 발표된 최고속도는 39노트지만 실제로는 44노트였다. 1972년부터 보존에 들어간 이 배의 해체 또는 재활용 여부는 미국에서 해묵은 논란거리다. 최근 매입 의향을 밝히고 크루즈여객선으로 개조하겠다는 해운사가 나타났으나 불투명하다. 대양에서 대형 여객선간의 속도 경쟁은 재연될 수 있을까. 어려워 보인다. 제트여객기를 타고 안락하게 세계를 여행하는 마당에 초고속 여객선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날지 의문이다. 다만 속도 자체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은 여전히 남아 비공식적인 블루 리본 수상 경쟁만큼은 여전히 펼쳐지고 있다. 최근에는 호승심 강한 부호들이 시속 50노트를 내는 초고속 개인 요트를 타고 기록을 만들어 내고 있지만 관심과 감흥은 예전 같지 않다. 초대형 여객선이 거대한 물보라를 일으키며 달리던 시절을 오히려 더 기억한다. 바다에 향한 로망, 속도에 대한 도전의욕, 그리고 어려움을 돌파하고 싶은 염원이 마음 속에 내재해 있기 때문일 터. 우리 사회가 쾌속 순항하면 좋겠다. 지속적으로./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선체를 태웠던 시리우스호의 얘기는 소설가 쥘 베른에게도 영감을 줬다. ‘80일간의 세계일주(1872년작)’에서 대서양을 건너는 헨리헤타호의 연료가 떨어지자 주인공 포그가 철골만 남기고 모든 것을 뜯어 태우며 가까스로 영국에 도착하는 장면은 시리우스호 입항의 재연 격이다. -
‘일본 정신’ 발명의 첫단추, 신불분리령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4.21 06:00:32‘정치와 종교의 분리’. 일본에 진주한 연합군최고사령부(GHQ)는 가장 먼저 ‘국가신도(神道·이하 표기는 신토)’를 손봤다. 패전 일본은 한사코 ‘신사에서의 제사가 종교는 아니다’라고 매달렸지만 GHQ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무원 신분이던 신관은 민간인이 되고 얼마 뒤에는 일본왕(덴노) 스스로 ‘살아 있는 신(神)’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리 저리 말을 꼬아가며 밝혔다. 적지 않은 일본인들의 반발에도 GHQ는 왜 이를 밀어부쳤을까. 일본을 ‘제정일치의 국가’로 봤기 때문이다. 군국주의적이고 과격한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선전 유포하고 일반 국민에게 강제한 것이 바로 일본왕을 구심점으로 하는 국가신토라고 여겼다. 왜 그렇게 판단했을까. 명저 ‘국화와 칼’을 보자. 출간 70년에 이르도록 일본 연구의 입문서 자리를 잃지 않는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에는 연합국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일본군 포로 비율이 나온다. 전쟁 초기 북부 미얀마 전선에서 일본군의 전사자 대 포로의 비율은 120대 1. 서구에서는 이 비율이 3대 1에서 4대 1 정도였다. 서양의 군대에서는 병력의 30% 가량을 잃으면 항복해서 훗날을 도모하는 게 불명예가 아니었던 반면 일본군은 항복을 불충이라며 끝까지 싸웠다는 얘기다. 미국과 연합국들은 이를 광기(狂氣)라고 봤다. ‘덴노(天皇)’를 받드는 국가신토는 광기의 교육장 격이었으니 연합국으로서는 폐지할 수 밖에. 일본인들은 신토란 오래된 전통이라고 주장했었으나 과연 그럴까. 거짓말이다. 왕을 떠받드는 신토는 150년도 안된 발명품에 불과하다. 근대국가로 발돋움하려는 일본이 ‘살아 있는 인간신’으로 국왕을 내세우려는 첫 단추는 1868년 4월 21일, 메이지 신정부가 포고한 신불분리령(神佛分離令). 내용은 말 그대로 신토(神道)와 불교의 분리였다. 구체적으로 신사의 불상숭배 금지와 신사에 안치된 불상과 방울·범종·불구(佛具) 등의 철거를 내용으로 담았다. 신불분리령은 일본 불교사상 유래 없는 박해를 가져왔다. 낭인들과 신관 출신으로 구성된 이른바 신위대(神威隊)가 사찰을 돌아다니며 운영권을 빼앗고 불상과 불구를 파괴하거나 불태웠다. 승려들에게는 불교를 버리고 신관으로 전직하라고 윽박질렀다. 일본판 분서갱불(焚書坑佛) 분위기 속에 불교는 끌어 내려지고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크게 훼손됐다. ‘폐불훼석(廢佛毁釋)’ 일본은 왜 교리도 빈약한 신토를 내세워 고등종교인 불교를 깎아 내렸을까. 왕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통치 이데올로기를 만들기 위해서다. 사실상의 군주인 쇼군(將軍)의 위세에 눌려 때로는 끼니마저 걱정해야 할 정도로 보잘것없는 존재였던 국왕을 국가의 상징으로 삼기 위해 토착 신앙이자 왕족의 종교인 신토를 키우고 싶었다. 전통적으로 불교에 가까웠던 쇼군 가문을 견제할 필요도 있었다. 인위적인 분리령이 나오기 전의 상황은 신토의 불교에 대한 종속. 부처가 신의 중심이며 신토에서 받드는 다양한 신은 중생을 위해 나타난 보살이라는 ‘신불습합(神佛習合)’이 대세였다. 새로운 통치이념을 세우려는 신정부는 불교를 정리하지 않고서 전진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전국 12만개의 사찰이 호적제도와 비슷한 단가제도(檀家制度) 아래 구축한 막강한 경제력도 신불분리령의 배경이었다. 결국 신정부의 의도대로 신불분리령은 불교의 힘을 꺾어놓았다. 불교가 맡아온 국왕의 장례의식도 신토로 넘어갔다. 통치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은 신토의 득세는 제국주의와 맞물리며 광기 어린 침략과 압제, 학살로 이어졌다. 태평양 전쟁 종전 후 패전국 일본에 진주한 미군이 가장 먼저 시행한 내정이 신토와 정치의 분리라는 사실은 국가 종교로서 신토의 폐해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신불분리령은 한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불교와 신토가 어울려 지내는 신불습합 안에서 각 지방마다 신으로 떠받들어지던 고구려와 백제, 신라 등 한국계 신들이 대거 정리됐다. 고약한 것은 국가신토와 일본왕이 일본인들을 조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식민지 조선의 정신세계를 파괴했다는 점이다. 일제 패망 직전 조선 팔도에 산재한 각급 신사(神社)는 82개. 규모가 작은 신사(神詞) 1,062곳까지 합치면 1,144개 신토 시설에서 눈물 흘리며 일본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친일파가 갈수록 늘어났다. 조선총독부의 목표대로 신사가 늘어났다면 조선 내 신사 숫자는 2,300개를 넘을 뻔 했다. 문제는 현재가 과거보다 더 고약하다는 점이다. 일본 총리와 각료들이 주변국과 갈등에도 아랑곳없이 참배하려는 야스쿠니(靖國) 신사가 바로 군국주의를 위한 일본의 발명 2호격에 해당된다. 군국주의 일본 종교를 위한 발명 1호인 신불분리령이 발동된지 2개월 뒤에 공표된 법령인 ‘신기관(神祈官) 설치령’에 따라 세워진 도교 초혼사의 후신이 바로 야스쿠니 신사다. 침략과 역사 날조, 만들어진 근대, 국가 이데올로기 발명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 방문을 계속하고 영토에 대한 망언을 근절하지 않는 한 동아시아의 진정한 평화도 오기 어렵다. 무엇보다 우려되는 것은 따로 있다. 바로 우리다. 일본은 다시금 군국주의를 향해 몸을 추스리고 있건만 우리는 반대로 가고 있다. ‘항일 의병활동을 토벌했다’고 기술하는 역사 교과서가 그렇고 엉터리 위안부 협상이 그렇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단군상을 훼손하는 일부 기독교인들의 행태도 마찬가지다. 일본에게 또 당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하얀 설탕의 검은 눈물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4.20 06:00:00상상해보자. 1,500년 전을 여행할 수 있는 타임머신이 눈 앞에 있다. 돈을 벌려면 뭘 싣고 가야 할까. 답은 설탕이다. 6세기께 유럽의 설탕 값은 금보다 비싸다는 후추 이상이었다. 14세기에도 설탕 1㎏을 사려면 소 10마리가 필요했다. 비싸디 비싼 설탕을 처음 만들어 먹은 곳은 인도. 약 4,000년 전부터 인도인들은 사탕수수에서 설탕을 추출해냈다고 전해진다. 지구촌에서 원거리 교역망이 본격 발달하기 전, 설탕이 세계상품으로 등장하기 이전부터 설탕의 수요는 존재했다. 상품이 있기도 전에 무슨 수요냐고 반문하겠지만 ‘단 맛’의 수요는 어디든지 있었다는 얘기다. 설탕이 소금, 면직물과 더불어 3대 세계상품으로 자리 잡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천연 벌꿀에서 경험한 달콤한 맛의 기억. 달디 단 설탕이 유럽에 전파된 계기는 전쟁에서 왔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나라(폴리스) 취급도 못 받던 변방 마케도니아의 왕자에서 그리스는 물론 중동의 페르시아 제국을 넘어 인도까지 쳐들어 왔던 알렉산더가 무엇보다 신기하게 여겼던 동양의 산물이 바로 설탕이었다. 알렉산더의 군대에 의해 ‘꿀벌도 없이 꿀을 만드는 갈대’로 서양에 소개된 이래 사탕수수는 숭배와 탐욕의 대상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예언자 무함마드를 따르는 이슬람교와 사막 유목민이 결합한 사라젠 제국은 사탕수수의 재배 지역을 더욱 넓혔다. 영토 확장과정에서 중동과 북부 아프리카, 스페인 남부 지역까지 퍼진 것. 십자군 전쟁의 원인 중에는 술판의 드넓은 사탕수수밭을 빼앗아 한 몫 챙기겠다는 유럽 제후들의 욕심도 숨어 있었다. 전쟁으로 재배지역이 넓어진 사탕수수는 경제전쟁을 낳았다. 가와기타 미노루(川北稔) 오오사카대 명예교수의 ‘설탕의 세계사’에 따르면 르네상스(문예부흥)을 촉발시킨 요인으로 작용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경제적 풍요와 13세기 이후 저지대지역(오늘날 베네룩스 3국)의 급성장도 설탕 중계무역과 교환 시장을 유치하고 상권을 장악한 덕분이다. 전쟁과 더불어 설탕의 소비지역을 유럽 전역으로 넓히고 소비층을 일반인까지 확대시킨 요인은 두 가지 더 있었다. 신대륙 발견과 스페인의 유대인 추방. 아메리카 대륙에서 기대했던 금이 나오지 않자 콜롬버스는 2차 항해부터 사탕수수 묘목을 실었다.* 멕시코에 위치한 아즈텍 문명을 1521년 25만명대 700명이라는 병력 열세에서도 멸망시킨 코르테스 역시 사탕수수를 중남미에 깔았다. 뒤늦게 브라질을 차지한 포르투갈은 사탕수수밭에서 나오는 브라질당(糖)을 생산할 인력을 구하려 검은 대륙으로 눈을 돌렸다. 흑인 노예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마구잡이로 잡혀가기 시작하고 이런 말이 생겨났다. ‘사탕수수 있는 곳에 노예가 있다.’** 유럽에서 박해 받고 쫓겨난 유대인들도 서인도제도에 집단 이주, 농장을 차렸다. 생산이 아무리 늘어 가격이 내려도 사탕수수 농장만큼은 호황을 누렸다. 상류층의 기호품에서 일반인들의 필수품으로 성격이 바뀌며 수요가 무궁무진하게 늘어났으니까. 중남미와 카리브해는 곧 사탕수수로 뒤덮이고 설탕 산업은 최고의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떠올랐다. 뒤늦게 경쟁에 뛰어든 영국은 유대인 사탕수수 농장주 10명에게 남작 작위까지 내리며 생산을 독려했다. 1653년 영국과 네덜란드간 1차 영·란전쟁도 카리브해 설탕 산지의 주도권 다툼으로 일어났다. 중남미 최초의 독립혁명이자 흑인들이 아프리카 바깥에서 세운 최초의 정권(1804년 독립 선언)을 세웠던 설탕의 섬, 생 도밍고의 흑인 폭동은 중남미의 역사를 갈랐다. 유럽의 강대국들이 저마다 설탕에 투자하고 나선 이유는 삼각 무역의 핵심 물품이었기 때문이다.*** 달콤하고 하얀 설탕에 묻은 검은 눈물과 저주를 푼 것도 역시 설탕. 독일의 약제사 겸 화학자이자 물리학자인 프란츠 칼 아카드(Franz Karl Achard, 1753~1821.4.20)가 유럽의 추운 기후에서도 잘 자라는 사탕무에서 설탕을 추출해내는 정제법을 19세기 초반 개발한 뒤부터 설탕의 검은 잔혹사는 일단 멈췄다.**** 사탕무 정제 설탕이 주목받은 요인 역시 전쟁에 있었다.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으로 무역 길이 막혀 사탕수수가 들어올 길이 막힌 덕분에 사탕무 정제 설탕의 수요가 늘었다. 설탕은 우리나라 산업의 초기 성장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품목이다. 1950년대~1960년대 초반까지 한국의 산업을 대표하는 업종은 설탕과 면제품, 밀가루 등의 삼백산업(三白産業)이었으니까. 1970년대 초반까지도 설탕은 귀한 대접을 받으며 쓰임새도 많았다. 더운 여름날이면 시원한 설탕물을 마시고 명절이면 선물용 설탕 포대가 오갔다. 요즘이야 비만의 요인으로 지목되지만.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콜롬버스의 항해일지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신(God)이다. 두 번째로 빈도가 높은 단어는 금(Gold). 항해일지에서 보는 대로 종교적 열망이 강했다는 그는 4차례 항해 동안 신대륙의 일부라고 믿었던 섬의 두 곳에 예배당을 짓고 십자가를 올렸다. 콜롬버스는 다른 십자가도 세웠다. 금을 내놓지 않는 원주민을 죽이기 위한 십자가 형틀은 300개에 달했다. 교회 지붕과 형틀로서의 십자가의 차이는 서구인들의 진짜 항해 목적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극명하게 말해주는 사례다. ** 최초의 집단적인 일꾼으로서 흑인 노예도 실은 포르투갈이 먼저 시작했다. 일찍부터 사탕수수 재배에 열을 올렸던 엔리케 왕자(왕으로 등극하지는 못했지만 항해왕으로 기억되는 인물)는 1444년 235명의 흑인을 잡아와 노예로 팔았는데 이게 대규모 흑인 노예의 시작이었다. *** 흑인 노예를 아프리카에서 잡아 아메리카 대륙에 팔은 선박은 아메리카의 설탕이며 담배 등 작물을 싣고 유럽으로 향한 다음 구슬과 총포, 술, 조악한 옷가지를 아프리카 추장 등 유력자들에게 넘기고 노예를 포획하는 과정을 되풀이했다. 서구가 주도한 이른바 ‘삼각무역’은 3세기 이상 지속되며 아프리카를 수탈하는 동시에 서구를 살찌웠다. **** 아카드의 부친은 프랑스에서 종교박해를 피해 독일로 이주한 신교도 가문의 일원으로 프랑스에 종교적 관용이 있었다면 인조 금에 다름 없었던 사탕무 정제 설탕은 독일이 아니라 프랑스에서 탄생했을지도 모른다. -
‘프로테스탄트’의 탄생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4.19 06:00:001529년 4월 19일, 독일 서남부 슈파이어. 제국회의(Imperial Diet)에 참석한 복음주의파(루터파) 영주 6명과 14개 제국자유시 대표들이 위기감 속에 머리를 맞댔다. 3년 전 열렸던 슈파이어 1차 제국회의에서 어렵게 얻어낸 신앙의 자유가 위협받았기 때문이다. * 마르틴 루터가 면죄부를 판매하는 교황과 교회에 대해 95개조의 반박문을 발표하며 개혁을 주창했던 게 불과 12년 전인 1517년 10월 말. 빠르게 세를 불려 나간 루터파가 ‘가톨릭 신앙의 도시’인 슈파이어에서 1526년 열렸던 1차 제국회의를 통해 제한적이나마 최소한의 신앙 자유를 인정받을 수 있었던 원인은 유럽의 정세 덕분. 합스부르크 가문의 위세를 업고 19세의 나이로 1519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된 카를 5세는 종교적 관용을 베풀 마음이 전혀 없었으나 포용 정책을 펼쳤다. 외부의 적을 처리하는 게 더 급했기 때문이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를 놓고 경쟁했던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와 끊임없이 전쟁을 치렀고 오스만 투르크도 호시탐탐 국경을 넘봤다. 등 뒤의 적을 만들지 않으려는 카를 5세의 계산은 이탈리아를 둘러싼 프랑스와의 경쟁에서 승리한 뒤 ‘내부의 이단부터 처단하자’는 결심으로 바뀌었다. 카를 5세는 1529년 3월 소집된 슈파이어 2차 제국회의에 대리인을 내보내 루터파 제후들에게 가톨릭으로의 복귀를 강요했다. 루터파는 공포에 쌓였다.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진 탓이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은 이름만 거창한 ‘제국’이었을 뿐 유력 제후와 영주, 부유한 자유도시들로 구성된 느슨한 정치적 연합체에 불과했었다. 제국회의의 결정을 우습게 아는 제후들도 적지 않았다. 황제도 선거권을 가진 유력 영주(선거후)들이 선출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카를 5세 치하에서 신성로마제국과 제국회의는 위상이 남달랐다. 카를 5세는 우선 돈과 땅이 많았다. 수차례 결혼 동맹을 통해 오스트리아와 동부 유럽 지역은 물론 스페인과 이탈리아 북부, 저지대지역(네덜란드와 벨기에, 서프랑스 일부)과 중남미 식민지로 구성된 광활한 영토를 가진 군주였다.** 영국왕 헨리 8세도 한때 경쟁에 끼어들었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선거에서도 카를 5세는 막판에 80만 투카트의 자금을 살포해 누구보다 먼저 선거운동에 나서 30만 투카트를 썼던 프랑스의 프랑스와 1세를 눌렀었다. 돈의 힘으로 황제로 오른 카를 5세는 잔혹성도 보여줬다. 1527년 열흘간 약탈 당한 끝에 로마시대로부터 내려온 건축물과 문화재가 대부분 파괴된 ‘로마의 약탈’이 바로 카를 5세 휘하 신성로마제국 군대와 독일 용병들의 소행이었다. 루터파 제후들과 자유도시 대표들은 공포에 짓눌렸어도 굴복하지 않았다. ‘서구 문명사 최대의 오점 중 하나’라는 로마의 약탈을 자행한 군대를 지휘한 카를 5세의 신성로마제국에 맞서 종교적 자유를 인정한 3년 전 약속을 지키라고 역공했다. 똘똘 뭉친 루터파는 약속 불이행에 대한 ‘항의 서한(protestation von Speyer)’을 들이밀었다. 루터파가 이때 얻었던 별명인 ‘프로테스탄트(Protestantㆍ항의하는 자)’는 시간이 흐르며 신교도 전체를 통칭하는 용어로 굳어졌다.*** 항의 서한을 받은 카를 5세는 군대를 동원하고 싶어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오스만 투르크의 군대가 신성로마제국의 핵심 도시이자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거지인 비엔나를 노리고 국경을 넘었기 때문이다. 외적의 침입으로 봉합된 갈등은 17세기 초반 30년 종교전쟁(1618~1648)으로 터져 나오고 말았지만 16세기 초중반 국제역학 관계를 이용해 힘을 기른 신교는 자본주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독일의 철학자이며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가 명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1904년)’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종교 윤리에 근거한 근검절약이 합리적 정신과 근대 자본주의 발전으로 이어졌다’고 설파한 데에도 이 같은 역사적 배경에 담겨 있다. 베버의 관찰이 과연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해 보이는 게 두 가지 있다. 서유럽에서 종교는 신교와 구교를 막론하고 쇠퇴 일로라는 점, 한국 프로테스탄트의 짧은 역사에는 항의나 저항보다 굴종과 야합이 많아 보인다는 점이다./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hongw@@sedaily.com * 신성로마제국의 주요 의사 결정기구였던 제국회의는 754년부터 1529년까지 765차례 소집됐는데 같은 도시에서 회의가 이어졌던 사례는 슈파이어제국회의(2차례)와 바로 직전의 뉴렘베르크제국회의(1522~24·3 차례) 뿐이다. 그만큼 이 시기에 종교 갈등을 비롯해 제후들이 풀어야 할 과제가 많았다는 얘기다. ** 네덜란드 지역에서 자랐던 그는 막대한 영토와 부와 권력을 소유해 ‘중세의 마지막 황제’이자 ‘근대 최초의 황제’로도 불린다. *** 가톨릭(Catholic)의 어원은 ‘보편적인, 공적으로 인정된’이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 형용사 ‘Cayholicus’. 가톨릭이라는 단어에는 ‘전세계적인 만인의 종교’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셈이다. -
SF 대지진...'불의 고리'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4.18 06:00:001906년 4월 18일 오전 5시 12분, 샌프란시스코. 진도 7.8의 지진이 도시를 찢었다.* 교회 종소리가 저절로 요란스레 울리는가 싶더니 건물이 흔들리고 굴뚝이 무너졌다. 대지진은 1파에서 그치지 않았다. 도심을 거세게 휘젓는 정도에 그친 1파가 지나고 25초 후에 들이닥친 2파는 도시 시설물 대부분을 무너뜨렸다. 미국 서부 최대의 도시 샌프란시스코는 마치 마지막 날처럼 변해갔다. 무너진 건물에서 피어오른 먼지 구름이 하늘을 뒤덮어 앞뒤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요즘도 샌프란시스코의 명물로 꼽히는 시내 전차의 철로는 엿가락같이 휘었다. 공동묘지의 묘석도 넘어졌다. 지옥이 따로 없다고 절규하던 시민들에게는 더 무서운 재앙이 찾아들었다. 세 차례의 강력한 지진파가 할퀴고 간 뒤에 찾아든 재앙은 화마(火魔). 파열된 가스관에서 새어 나온 가스로 시작된 화재는 사흘간 건물과 주택 2만 8,000동을 불태웠다. 수도관도 끊겨 화재를 진압할 물도 없는 가운데 화재 저지선을 구축하기 위해 소방대가 활용한 다이너마이트도 도시 곳곳을 더욱 파괴하고 때로는 화재 범위까지 넓혔다. 일부 시민들은 손상된 집이나 건물에 불을 질렀다. 집이 천재지변으로 무너졌다면 보험금을 받을 수 없지만 누군가의 실수에 의한 소실이라면 보험금 일부라도 탈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에서다. 도시는 이래저래 파괴되고 불탔다. 인명 피해도 컸다. 시민 40만명 중 28만명이 집을 잃고 수만명이 부상을 입었다. 사망자 추계는 최소 498명에서 최대 3,000여명. ** 재산 피해도 컸다. 보험사들이 추정한 재산 피해액은 2억 3,500만달러(요즘 가치 265억 달러·비숙련공 임금 상승률 기준). 막대한 재해 보상금에 직면한 보험사들은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영국의 로이드보험이 내준 보험금만 5,000만 달러(요즘 가지 56억 3,000만 달러). 유럽과 미국 보험사들이 내줄 보상금 액수가 커지며 국제금융시장에서는 이자율이 높아지고 결국 1907년 대공황으로 번졌다. ***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은 재앙에 주저앉지 않았다. 대지진 이후 14개월 동안 153회나 여진이 계속되는 가운데도 복구에 힘을 쏟았다. 누구보다 영웅으로 떠오른 사람은 이탈리아계 이민 1.5세로 지방은행을 경영하던 아마지오 피터 지아니니. 은행들이 6개월간 영업정지에 들어간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드럼통에 널빤지를 얹어 책상을 만들고 복구자금 대출에 나서 최고 은행가로 부상하는 기반을 닦았다. **** 자동차 산업도 대지진 덕을 봤다. 구조작업에 동원된 군대와 소방대의 자동차 200여대가 종횡무진 활약하며 차의 신뢰도와 안전성에 대한 불신을 일소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자동차 보유 대수는 1900년 8,000여대 수준이었으나 1912년에는 90만 2,000대로 늘어났다. 1908년 ‘T 모델’을 출시하며 시장을 석권했던 헨리 포드가 대지진의 반사이익을 누린 기업인의 대표격이다. 석유채굴과 정제업자 역시 웃었다. 마침 전기 등장에 따른 조명용 등유 수요 감소로 고민하던 상황. 석유업자들의 기대 영역 수준에 머물던 자동차와 휘발유 시장이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을 계기로 폭발적인 성장을 기록하며 산업 전반의 성장을 이끌었다. 록펠러 가문 등 석유 자본의 지배력 역시 보다 강해졌다. 군대의 역할도 조명받았다. 천재지변에서 맹활약했기 때문이다. 샌프란시스코 주변에 주둔하던 미 육군 4,000여명은 7월 초 임무를 경찰에 맡기고 철수할 때 까지 직접적인 인명 구호는 물론 이재민 수만명을 먹이고 입히고 천막과 간이주택을 지어줘 박수 받았다. 2만명이 넘는 이재민들이 군대가 난민 캠프에 건설한 임시 목조 주택 5,610채에서 살았다.*****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은 최초의 본격적인 국제 구호 사례를 낳은 재난으로도 손꼽힌다. 전신과 전화가 세계적으로 깔린 이후에 처음 맞는 국제적인 재난을 맞아 영국과 캐나다 등이 구호와 온정을 보냈다. 인간이 예측도 대응도 어려운 대재난이었던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은 ‘각양 각색의 현대’를 낳았다. 대지진 110주년을 지나는 오늘날 지질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 태평양과 북미의 거대한 땅덩이가 만나는 산 안드레아스 단층이 대재앙을 낳을 것이라는 2015년 6월 개봉작 ‘샌 안드레이스’가 단순한 허구에 그치기를 바라지만 대지진 이후 잠잠하던 단층들이 흔들리며 샌프란시스코는 1989년과 1994년에도 큰 지진을 겪었다. 지진의 공포는 바로 우리 옆 일본의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환태평양 ‘불의 고리’에 속한 에콰도르와 대만에서도 지진이 일어났다. 비록 동일본 대지진 당시 한국이 보내준 성금액을 의도적으로 깎아내고 이번 구마모토 지진을 겪는 와중에서도 일부 일본 네티즌은 ‘한국인들이 우물에 독을 탄다’는 악의적 헛소문을 트위터에 퍼트렸다고 하지만 소중한 고귀한 인명의 손실이 없기를 인류의 이름으로 소망한다./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리히터 지진계 기준. 당시 측정된 기록이 아니라 요즘 지질 과학자들의 추정치 ** 사망자 추계의 편차가 큰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다. 첫째, 약탈이나 방화, 수감시설 탈출로 총 맞아 죽은 인원은 애초 사망자에 포함되지 않았다. 대지진의 와중에서 총을 맞아 숨진 인원이 500명이 넘는다는 추정도 있다. 두 번째로 중국인을 포함한 외국인 노동자 역시 사망자 집계에 포함되지 않았다. 당시 백 명 남짓이던 조선인은 사망자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새로 건립한 한인 공립협회 건물은 파괴됐는데 복구 비용 전달 과정에서 일본 통감부가 농간을 부린 적이 있다. *** 1907년의 대공황은 이자율이 높아진 가운데 3월 뉴욕 니커보커 투자신탁회사의 자금난을 시발로 전세계로 퍼진 공황. 특히 보어전쟁과 러일전쟁에 투입된 은행 대출금이 회수되지 않는 터에 잉글랜드은행의 금보유고가 줄었다는 소식에 뉴욕과 유럽 외환시장의 주가와 환율이 요동쳤다. 변방이던 일본증시까지 폭락세로 접어들었다. 이런 마당에 미국 일부 재벌의 구리광산 투기 사건이 터지며 사건은 더욱 커졌다. 워싱턴과 캘리포니아, 오클라호마 같은 주는 은행 영업까지 정지시켰다. 파리와 로마에서는 은행 창구에서 예금인출 소동이 벌어지고 일부 이탈리아 은행이 파산을 맞았다. 위기의 금융시장을 구한 사람은 큰 손이자 은행가인 J.P. 모건. 미국 정부가 협조를 당부하자 모건은 10월 하순께 돈의 홍수를 일으켜 증권사와 투신사에 자금을 대줬다. 결국 1907년 공황은 모건의 위력을 확인시켜주며 큰 파장 없이 진정됐다. 자존심이 상한 미국 정부는 근본대책 마련에 나섰다. ‘다시는 민간의 신세를 지지 않겠다’는 다짐의 결과물이 1913년 출범한 연방준비제도(FRS)다. 대지진이 태풍을 일으키는 나비의 날개짓처럼 연쇄 작용을 일으키며 미국에 중앙은행제도를 안겨준 셈이다. **** 지아니니는 뉴밀레니엄을 앞둔 지난 1999년 미국 타임지가 ‘20세기를 건설한 20인의 거인’ 중 하나로 꼽은 인물이다. 소비자 금융과 전국적 은행 지점망의 틀이 그에게서 나왔다. 지역에서 자수성가한 금융업자로 승승장구하던 그는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이 발생하자 ‘예금보장과 복구비용 무이자 대출’을 약속하며 전국적인 금융가로 뛰어올랐다. 1928년에는 ‘뱅크 오브 아메리카(BOA)’까지 사들였다. 주택저당담보대출 등 서민금융도 그가 선보였다. 영웅으로 떠오른 그는 소외산업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영화와 캘리포니아 와인이 그의 지원으로 성장한 대표적인 산업. 지진 다발지대라서 위험하다는 금문교 건설에도 자금을 댔다. 초기의 월트 디즈니와 찰리 채플린도 그에게서만 돈을 얻을 수 있었다. 지아니니의 경영권이 흔들린다는 소식이 들리면 은행 고객들이 주식을 사서 전달해줬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 개인 치부에는 관심이 없었던 그는 목돈이 생기면 열심히 기부해 1949년 사망(79세)했을 때 유산은 50만 달러에 못 미쳤지만 ‘사람을 위한 돈이라는 가치를 추구한 20세기의 로빈 훗’으로 기억된다. ***** 미 육군이 당시 정부 자금으로 건설한 목조주택은 임시 거처 용도였지만 견고하게 지어져 1960년대까지 많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면적 45~67㎡인 이 가옥의 당시 임대료는 월 2달러였다. 50달러면 구입해 자기 소유 주택으로 삼을 수도 있었다. 제작 원가는 약 100달러였지만 피해 주민 지원책의 일환으로 반값에 팔았다. 도심지역에 남아 있던 마지막 임시주택은 2006년 60만 달러가 넘는 가격으로 팔려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
처칠 가문 결혼 대박 사건…혈통과 돈의 만남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4.15 06:00:00걷다 지치면 말 타고 싶고, 말 타면 시종 부리고 싶은 게 인간의 속성. 서양이라고 다를까. 영어엔 이런 말도 있다. ‘Greed has no limit(탐욕은 끝이 없다).’ 레너드 제롬(1817~1891)이 바로 끝없는 탐욕의 전형. 신교도로 개종한 유대인으로 종교 탄압을 피해 미국에 이주한 위그노(프랑스 신교도)의 후손인 그는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부유한 농장주인 아버지 덕에 법학(유니온 대학)을 전공하고 바로 뛰어든 곳이 월 스트리트. 당시 최고의 블루칩(핵심 우량주)이던 철도 주식을 집중 투자한 그는 ‘매도 시점의 귀재’로 불렸다. 싼 주식을 사들이고 주가가 올랐다 싶으면 헛소문을 퍼트려 주식을 팔았다. 떨어진 주식은 또 다시 사들이고 비싸게 되파는 수법으로 돈을 긁어 모은 뒤에는 생각이 바뀌었다. ‘돈보다 더 귀중한 가치’를 찾기로. 명성을 의식한 그는 여느 투기꾼과는 달리 ‘무지막지한 작전’은 자제해 점잖은 투기꾼이라는 평도 얻었다. 보다 갈망했던 것은 사회적 신분 상승. 뉴욕 타임스 주식을 사들여 언론사 대주주로 뻐기고 요트와 경마 같은 고급 취미에도 눈 돌렸다. 미국 요트협회와 경마협회를 만든 것도 레너드다. 돈도 마음껏 썼다. 비싸디 비싼 뉴욕의 땅을 매입해 개인 전용 경마장을 짓고, 파티를 열어 상류계급 여성들의 손목에 다이아몬드가 박힌 팔찌를 끼워줬다. 부를 있는 대로 과시하던 부자놀음의 결정판은 결혼. 미인으로 소문난 둘째 딸 제니 제롬을 ‘고귀한 신분’과 맺어주기로 마음 먹었다. 마침 유럽에는 몰락한 귀족들이 많았던 상황. 땅은 많았어도 산업자본가로 변신하거나 무역이나 공장에 투자하지 못한 귀족들의 생활은 쪼들렸다. 남은 토지에서는 소작인들이 도시로 떠나는 데다 소출마저도 해외에서 들어오는 값싼 농산물에 밀렸다. ‘생계를 위한 노동’은 귀족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행위로 생각하던 그들도 기회를 찾았다. 미국 졸부들의 딸이 싸들고 오는 결혼 지참금. 미국 투기꾼의 딸인 제니와 랜돌프 처칠이 바로 이렇게 만났다. 랜돌프는 영국 최고의 명문가문인 처칠 공작가문*의 8대손이지만 둘째 아들이어서 공작 작위도 영지도 상속받지 못하던 청년.** 외교부에 근무하던 26살 청년 랜돌프는 여섯 살 어린 제니와 파리의 요트 클럽에서 만나 바로 사랑에 빠졌다. 우연을 가장했으나 고도로 기획된 만남은 8개월 뒤 결혼으로 이어졌다. 레너드는 딸 제니에게 5만 파운드의 지참금을 딸려보냈다. 1874년 4월 15일 파리의 영국대사관에서 열린 랜돌프와 제니의 결혼은 유행을 낳았다. 돈은 많아도 ‘고귀한 혈통’과 거리가 먼 미국 졸부의 딸들이 유럽 귀족가문에 잇따라 시집오고 ‘달러 공주(dollar princess)’라는 용어가 생겼다. *** ‘오리지널 달러 공주’라고 불리던 처칠 부인 제시는 타고난 미모를 무기로 런던 사교계를 주름잡았다. 랜돌프가 37세에 하원의장 겸 재무장관에 오른 것도 내조 덕이다. 숱한 염문을 뿌렸던 제시의 애인 명단에는 국왕 에드워드 7세까지 포함돼 있었다. 정치 생명을 건 모험에 실패한 랜돌프가 매독 합병증으로 사망(45세)한 뒤 제시는 스무살 연하의 근위대 대위와 재혼해 화제를 뿌렸다. 재혼 14년 만에 이혼하고 63세 때 40세 남편을 맞아들이면서도 귀족 신분을 말해주는 ‘레이디 랜돌프’라는 호칭은 포기하지 않았다. 제시가 랜돌프와 결혼 7개월 반 만에 낳은 첫째 아들은 두 번째 남편과 동갑이었다. 세 번째 남편보다는 세 살 많았던 첫째의 이름은 윈스턴 처칠. 2차 대전에서 영국을 승리로 이끌었고 ‘제 2차 세계대전 회고록’으로 1953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윈스턴 처칠이 바로 돈과 혈통의 결혼이 빚어낸 산물이었으니 결과가 대박이었던 셈이다. **** 처칠 가문은 미국인 졸부의 딸과 결혼의 꿀맛을 잊지 못했는지 또 다시 미국인 규수를 맞아들였다. 이번에는 보다 규모가 컸다. 가문의 적장자인 9대 말보로 공작 찰스 스펜서 처칠은 왕족이 아닌 귀족으로는 영국에서 유일한 블래넘 궁전을 유지하기도 힘들어지자 숙부를 따랐다. 상대방은 미국 최고 갑부 집안인 밴더빌트 가문의 콘수엘로 밴더빌트. 뉴욕 최고의 미인으로 손꼽히던 그녀는 미국인 애인을 포기할 수 없다며 버텼으나 감금 당하고 어머니가 단식에 들어가자 혼인을 받아들였다. 숙부보다 수십 배의 지참금을 받아 궁전을 단장하고 살림살이는 펴졌지만 둘 사이는 행복하지 않았다. 9대 말보로 공작의 바람기 탓이다. 남편의 외도에 지친 콘수엘로는 결혼 25년 만에 이혼하고 프랑스 출신의 조종사가 재혼해 여생을 행복하게 살았다. 찰스 스펜서 처칠 공작은 이혼 뒤에 또 다시 미국인 졸부의 딸과 결혼해 재산을 불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국에서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돈과 혈통의 결혼’은 그 다지 많은 것 같지 않다. 고귀한 혈통이 없는 탓인지, 돈이 곧 신분이며 그 위력 앞에 모든 것이 함몰되는 사회라서 그런지 알 수 없지만./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처칠 가문을 일으킨 존 처칠은 영국 육군사에서 손꼽히는 명장. 그저 부유한 시민의 아들로 태어나 귀족 작위 중에 최고인 공작(공작·후작·백작·자작·남작 순) 작위는 물론 왕실 이외의 가문으로는 유일하게 ‘궁전’(블래넘 궁전)까지 하사 받았다. 말보로 공작가문의 시조인 존의 성공은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 등에서의 무훈 덕이지만 아내 사라 처칠의 내조도 한 몫 거들었다. 사라는 앤 여왕의 시녀(영국에서는 귀족이 시녀나 시종을 맡았다)이자 친구라는 점을 이용해 남편의 출세를 도왔다. 투기꾼으로도 이름을 남겼다. 1720년 영국을 뒤흔든 남해회사 버블 사건(주가의 거품을 뜻하는 ‘bubble’이라는 용어가 이때 처음 쓰였다)에서 ‘로빈슨 크루소 여행기’를 지은 다니엘 디포는 쪽박을 차고, 만유인력을 발견했던 뉴턴도 우리 돈으로 20억원 이상을 날렸지만 사라 처칠은 고급 정보를 이용해 100억원이 넘는 시세 차익을 남겼다. ** 영국은 장자만 작위를 승작한 반면 프랑스에서는 아버지가 백작이면 모든 아들이 백작 작위를 받았다. 결국 세금을 내지 않는 귀족 계급이 넘쳐나 재정이 궁핍해지고 종국에는 프랑스 대혁명의 원인으로도 작용했다. *** 유럽 귀족의 자제와 결혼하려는 미국인 규수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유럽을 취재한 미국 신문 특파원은 “함부르크에서만 100명이 넘는 미국인 처녀들이 신랑감을 찾고 있다”는 기사를 보냈다. 관련 책자도 무수히 나왔다. ‘영국 귀족과 결혼하는 법’에서 ‘미국인 공주들’ 등등. **** 9대조 할머니인 사라 처칠이 영국의 정치와 경제를 막후에서 주름잡았던 투기꾼이며 외활아버지인 레너드 제롬은 월가를 대표하는 투기꾼이었으나 윈스턴에게 주식투자의 재능은 유전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18세기 영국과 19세기 미국 작전세력의 피를 물려받은 윈스턴 처칠은 재무 장관을 막 마친 1929년 9월, 미국을 방문해 각종 강연료로 받은 2만달러를 뉴욕증시에 투자해 날렸다. 세계대공황 직전 끝물을 탄 것. 깡통 차지 않은 게 다행이다. 처칠은 손실을 바로 만회했다. 자력이 아니라 친구 버나드 바루크의 도움에 의해서다. 윌슨에서 케네디에 이르기까지 40년간 대통령 경제보좌관을 지낸 그는 ‘윈스턴 처칠’이라는 계좌를 미리 만들어 처칠이 사면 팔고, 팔면 사는 정반대의 투자로 수익을 남겨 처칠에게 넘겼다. 요즘 기준으로는 ‘뇌물 공여죄’에 해당되는 의리를 보여준 버나드는 ‘냉전(Cold War)’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
미국판 권력형 비리, 티포트돔 스캔들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4.14 06:00:001922년 4월 14일, 미국이 발칵 뒤집혔다. 월스트리트저널이 1면 머리기사로 티포트 돔(Teapot Dom) 스캔들을 폭로했기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 직전, 함정의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전환하겠다고 결정한 미 해군은 석유가 부족해질 경우에 대비해 어렵사리 석유저장소를 마련했으나 사달이 났다. 뇌물과 부정부패가 잇따르고 폭로 기사까지 나오자 미국 전역이 들끓었다. 뇌물을 제공한 사업자와 받아먹은 고위공직자 등 당사자들은 즉각 부인하고 나섰다. 심지어 ‘빨갱이들이 미국을 전복하려는 음모’라는 날조와 역작용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 정치권과 언론은 계파와 상관없이 이 사건을 집요하게 끝까지 파헤쳤다. 당시 대통령이던 워런 하딩(Warren Harding)이 역대 미국 대통령 가운데 최악의 하나로 평가받는 이유도 티포트 돔 스캔들을 비롯한 각종 추문 때문이다. 지형 생김새가 차 주전자 뚜껑처럼 생겼다고 티포트 돔이라는 이름이 생긴 해군 저장소가 스캔들의 진원지로 떠오른 시발점은 도둑질. 미 해군이 예비 연료 기지로 확보한 유전 근처에 유정을 뚫어 국가 재산(석유)을 훔쳐가는 사례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1991년 쿠웨이트가 국경 인근의 유전에 구멍을 파서 자신들의 원유를 훔쳐갔다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이유와 맥락이 같다. 민간인들의 기름 빼가기로 골머리를 앓던 당시 미 해군이 고른 대안은 매입. 주변 땅을 사들였다. 석유업자들은 규모가 커진 해군의 유류 저장소에 군침을 흘렸다. 석유저장 시설이자 원유 추가 매장 가능성이 높은 티포트 돔 지역을 차지하기 원했으나 해군이라는 벽에 막혔다. 유류저장소를 매입하거나 임대하려면 해군참모총장의 승인이 있어야 하는데 해군은 틈을 내주지 않았다. 군축회담이 시작된 1921년 이래 미 해군은 비상 저장시설을 확대해야 한다는 입장을 지켜왔다. 해결 방법은 백악관에서부터 나왔다. 하딩 대통령은 석유 저장시설 관할권을 해군성으로부터 내무부로 넘겼다. 하딩 정권의 내무부 장관 앨버트 폴은 석유 저장시설 두 곳의 운영권을 민간업자들에게 넘겨버렸다. 공식적인 입찰 절차나 과정도 없었다. 나중에 재판에서 공개 절차를 밟지 않은 이유를 캐묻자 전직 내무장관 폴은 ‘군사 기밀 유지 필요성 때문’이라고 둘러댔다. 진짜 이유가 뭔지는 알 수 없으나 확실한 점은 하나 있다. 폴이 업자들에게 뇌물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뇌물 액수 40만9,000달러. 처음에는 내무장관 폴의 개인 비리로만 여겨졌던 스캔들은 만질수록 커졌다. 미국 굴지의 석유업자가 줄줄이 관련되고 집권당인 공화당의 정치자금으로 불하특혜 자금이 들어갔다는 정황이 속속들이 드러났다. 하딩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사망(공식 사망 원인은 심장 마비)도 티포트돔 스캔들이 불거져 심신이 극도로 피곤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언론의 끈질긴 보도는 2년 뒤 상원 특별 조사위원회 결성으로 이어졌다. 부통령에서 하딩의 대통령직을 승계해 재선에 성공한 캐빈 쿨리지 대통령 역시 하딩과 차별을 위해 의회와 사법부의 조사를 방해하지 않았다. 상원의 청문회 과정에서 죄상이 드러난 내무장관 폴은 구속 수감됐다. 미국 역사상 현직 각료 최초의 감옥행. 이것으로 끝났을까. 그렇다. 최소한 네 명의 기업인이 관련되고 그 가운데 두 명은 중죄에 해당됐지만 죄목만 주렁주렁 달렸을 뿐 누구도 제대로 처벌 받지 않았다. 1920년대 번영의 끝자락에서 세인의 관심이 멀어진 끝에 처벌은 솜방망이로 끝나고 해군의 유류저장시설만 기능을 잃었다.** 조사까지는 철저히 진행했지만 징벌은 꺼렸던 ‘번영과 질주의 20년대’ 직후에 무엇이 찾아왔는지는 익히 아는 대로다. 대공황./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정치적으로 무능했으나 탐욕스럽고 여성 관계도 복잡했던 하딩이 대통령까지 오른 이유가 있다. ‘대통령처럼 생겼다’는 출중한 외모와 ‘누가 나와도 이기는 선거에서 말 잘 듣는 순한 후보를 내자’는 공화당 원로들의 간택 덕분이다. 전임 윌슨 대통령이 주창했던 도덕정치와 원칙론을 지겹게 여기던 미국 유권자들은 표를 하딩에게 몰아줬다. 압도적인 차이로 당선된 하딩은 옛 친구들에게 관직을 뿌리고 밀주와 카드놀이로 밤을 지새워 국민들에게 외면 당했다. 1923년 8월 그가 사망했을 때는 두 가지 설이 나돌았다. 티포트돔 스캔들로 심신이 쇠약해져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렸다는 설과 대통령의 부인에 의한 독살설이 나왔었다.(하딩의 부인 플로렌스 하딩은 30세 이혼녀 때 5년 연하의 하딩과 결혼해 남편을 정치인으로 키운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평생 바람을 피우며 괴로움만 안겨줬던 남편이 백악관에서도 옛 친구들과 건달처럼 지내자 더 이상의 명예 실추는 싫다며 독살해버렸다는 설이 그럴듯하게 퍼졌었다.) ** 스캔들이 터진 뒤 티포트돔을 비롯한 해군 저유시설에서는 더 이상의 시설 확충도 없었고 새로 채굴하려는 시도 역시 없었다. 덕을 본 사람들은 애초의 원인 제공자들. 인근 유정에 파이프를 박아 기름을 빼내려던 석유업자들은 기회를 맞이하고 이들이 채굴한 원유의 일부는 일본에 수출돼 태평양전쟁을 야기한 일본군의 연료로 쓰였다는 추론도 있다.(F.L. 알렌 저, 원더플 아메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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