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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하늘에 거래정지… 시카고 범람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4.13 06:00:00마른 하늘에 날벼락, 아니 홍수가 날 수 있을까. 1992년 4월 13일의 시카고가 그랬다. 미국 중북부의 중심인 이 도시에 갑작스런 비상이 걸렸다. 시카고강의 범람 탓이다. 맑은 하늘에서는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지만 마천루가 즐비한 도심지역(Chicago Loop)의 빌딩 지하에 물이 차올랐다. 물난리가 시작된 곳은 옛날 지하도. 19세기 시카고 강 밑을 파고 레일을 깔아 1956년까지 석탄과 화물을 실어 날랐던 터널에서 발생한 균열이 범람의 시작이었다. 마침 오래된 교량의 안전을 위해 파일을 박는 공사가 진행되던 상황. 시카고 강물은 강 바닥 밑의 관으로 밀어 들어가 지하수로와 터널을 타고 도시 곳곳으로 번졌다. 가장 먼저 금융회사들이 밀집한 동쪽 도심 고층건물들의 지하에 물이 차올랐다. 말이 범람이지 실제로 넘친 수량은 크지 않았다. 나이아가라 폭포가 1분간 떨어뜨리는 폭포수의 57% 수준이었으나 며칠간 범람의 합계여서 피부로 강의 범람을 느끼는 시민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보이지 않는 수해가 가져온 피해액은 약 19억 5,000만 달러. 긴급복구반이 투입된 끝에 도시의 하수도망은 나흘 만에 기능을 회복했으나 일부 빌딩은 수주일 동안 작동하지 않는 후유증을 앓았다. 옛 구조물에 의한 피해를 맛본 시카고는 자연 환경을 이용하는 대비책으로 위기에 맞서 나가고 있다. 지하수가 넘칠 경우에 지형이 낮은 곳으로 물길을 돌릴 수 있는 예비 수로와 터널을 마련해 언제 어느 곳에서 사고가 나더라도 위험을 분산시킬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요즘에도 시카고 시는 주변 수계 관리와 시설물의 유지 보수를 위해 해마다 수억 달러의 비용을 지출하고 있다. 시민들은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시카고 강물의 범람이 의미를 갖는 이유는 주식 선물시장과 현물 시장이 분명한 연동관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여지없기 드러났기 때문. 시카고 도심의 아랫도리를 적신 강물로 대형 빌딩 밀집 지역에 대한 전기와 가스 공급이 끊겨 시카고상품거래소(CBOT)와 시카고상업거래소(CME) 역시 기능을 잃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실물 상품거래소과 선물 시장이 매매 정지 상태에 들어간 시각은 이날 오전 11시 45분. 시카고 선물시장의 S&P 500 선물의 6월물 그래프는 그 시각 이후 마치 사망 선고를 받은 환자의 심장처럼 일자를 그렸다.(사진 참고) 시카고 변수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다른 시장에도 영향을 끼친 것. 무엇보다 시카고에서 비행기로 네 시간 거리인 뉴욕 증시의 현물 거래가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시카고의 정전과 매매중단 직전까지 3240~3265선을 오가던 다우지수가 정오를 넘기면서부터는 3260선에 들러붙어 소폭으로 진동했을 뿐이다. 마치 뇌사 상태에 빠져든 환자의 뇌파 그래프처럼 움직였던 것. 거래량은 전일보다 25% 줄어들었다. 시카고의 범람을 통해 선물시장과 현물시장이 샴쌍둥이처럼 불가분의 관계라는 점이 다시금 입증된 셈인데,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딜러들이 각양 각색의 반응을 보였다는 점이다. 나이 많은 딜러들은 “주식시장이 마침내 옛날처럼 정상적으로 차분하게 움직인다. 프로그램 트레이더들이 나타나기 이전 월스트리트의 평온한 나날들을 떠올리게 해준다”라고 회상에 젖었다. 재빠른 딜러들은 즉각 시카고 선물시장과 뉴욕 현물 시장간 상관관계에 분석에 들어갔다. 시카고 범람에서 확인된 시장 선행지표로서 선물시장 움직임을 제대로 공부하면 막대한 물량이 거래되는 프로그램 트레이딩과 더블 위칭데이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는 대표적인 투자자는 공격적이지만 장기투자로 유명한 제레미 시겔. 대형주의 움직임은 선물시장에서 먼저 반응을 보인 사건들에 의해 움직인다는 게 제레미 시겔의 투자 원칙이다. 사고만 보지 말고 주가를 읽으라는 얘기다./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광기의 군중십자군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4.12 06:00:00‘이슬람과 싸워 예루살렘을 되찾으라.’ 로마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호소에 서유럽이 열기에 빠졌다. 교황이 호소한 시기는 1095년 11월. 유럽 각국은 십자군을 출정시킬 시기로 이듬해 8월을 잡았으나 먼저 출정한 부대가 있었다. 말이 십자군이지 한 사제의 선동에 빠진 농부가 대부분. ‘성지를 회복하라는 베드로의 계시를 받았다’는 ‘은자(隱者) 피에르(Pierre l‘Ermite)’의 열정이 넘치는 설교에 사람들은 넋을 잃고 무리를 지었다. 하급기사와 농부, 여자, 어린아이까지 포함해 수만명이 넘는 사람들은 훗날 이런 이름을 얻었다. 군중 십자군(People‘s Crusade).* 군중을 모은 것은 허름한 옷에 나귀를 타고 다니던 은자 피에르의 설교도 있었지만 다른 요인도 컸다. 무엇보다 뉴 밀레니엄을 맞아 성서에 나오는 기독교 천년왕국이 시작되리라는 믿음이 퍼졌다. 1095년에는 유난히 별똥별과 월식, 오로라, 혜성 같은 천문현상도 잦아 변동을 예고하는 하늘의 축복으로 여겨졌다. 가뭄과 기근, 중노동에 시달리느니 죽더라도 성전(聖戰)에 참전하는 게 낫다는 판단도 사람들을 십자가 깃발 아래에 불러들였다. 문제는 종교적 열망과 현실 탈출에의 의지만 강력했을 뿐, 조직이 없고 식량도 부족했다는 점. 예루살렘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프랑스에서 출발해 갈수록 숫자를 불리며 무조건 동쪽으로 행진하던 군중은 4만여명선으로 늘어났다. 열정이 넘치는데 조직과 식량도 없는 무리는 전투 이전에 다른 싸움부터 만났다. 민생고. 군중십자군은 1096년 4월 12일 퀼른 지방에서 폭도로 돌변해 약탈에 들어갔다. 대상은 유대인 수십명. 상대적으로 부유했던 유대인을 죽이고 재산을 빼앗아 무기와 식량을 사는 데 군중십자군은 아무런 죄책감도 없었다. 오히려 ‘예수를 팔아먹은 이교도를 응징한다’고 믿었다. 한번 맛 들린 약탈과 학살은 종교의 이름 아래 습성으로 굳었다. 군중 십자군은 가는 곳마다 유대인을 죽였다. 군중십자군에게 목숨을 잃은 중부유럽의 유대인은 최소 2,000명에서 최대 1만 2,000명으로 추정된다. 당시 독일지역과 북부 프랑스의 유대인 인구의 25~33%에 해당하는 숫자로 유대인 박해가 이때부터 더욱 가혹해졌다. ** 유대인 뿐 아니다. ‘성지 탈환’의 대의명분에 협조하지 않는 지역과 주민은 적으로 여기고 전투를 벌였다. 음식을 요구하는 군중십자군을 먹일 여력이 없었던 헝가리에서는 같은 기독교도 4,000여명이 학살 당했다. 어린 아이까지 말뚝에 박아 죽이는 만행에 분노한 헝가리 기병대에 의해 군중십자군은 병력의 3분의 1을 도륙당했다. 불가리아인들도 이들 집단에 화살을 퍼부었다. 살육과 싸움이 잇따른 끝에 무장을 하지 못한 군중십자군의 3분의 1만이 은자 피에르와 함께 트라케 산맥으로 몸을 숨겼다. 나머지는 발칸 반도에 뼈를 묻었다. 궁지에 몰린 군중십자군은 비잔틴(동로마)제국이 살려줬다. 쫓기고 쫓긴 군중십자군에게 자비를 베풀어 콘스탄티노플 외곽으로 안전하게 인도하고, 국왕들이 이끄는 십자군 기사단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설득했지만 막무가내. ‘순례자’를 자처하는 군중십자군 일부가 콘스탄티노플 시내의 집으로 스며들어 물건을 훔치기 시작하자, 비잔틴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는 선박을 동원해 이들을 보스포루스 해협의 아시아쪽 해안으로 내려놓았다. 오늘날 터키 땅, 소아시아에 상륙한 군중십자군은 저항하는 셀주크 투르크군이 안보이자 신명이 나서 내달렸다. 투르크의 유인과 매복 작전에 걸려든 군중십자군은 니케아 평원에서 화살 세례에 압도되고 말았다. 백골이 피라미드처럼 쌓였다. 군중십자군은 단 한 번의 전투로 끝났다. 몇 안되는 기사로 은자 피에르의 군사 참모 격이었던 이탈리아인 기사 레이날드는 사로 잡혀 개종함으로써 목숨을 부지했으나 종국에는 노예로 팔렸다. 은자 피에르의 최후에 대해서는 설이 많다. 자신만 간신히 살아남아 1차 십자군과 합류했다는 설도 있다. 1차 십자군의 예루살렘 전투에서 성물(聖物) 롱기누스의 창(Lance of Longinus·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 당한 예수를 확인 사살하기 위해 찔렀다는 창)을 찾아냈다고 주장하다 시죄법(試罪法)재판(시련 재판·불 위를 걷게 한 뒤 살면 무죄, 죽으면 유죄로 판결하는 전근대적 재판)의 후유증으로 죽었다고도 전해진다. 은혜와 축복 대신 증오와 복수를 심은 은자 피에르가 지휘했던 광기는 사라졌을까. 군중십자군 이후 100여년이 지난 뒤 결성된 제 4차 십자군(1202~1204)은 이교도 대신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하다 아예 점령해버렸다. 롱로마제국의 그리스인들은 1204년 나라를 빼앗겨 1261년 되찾기까지 라틴제국의 신민으로 살았다. 1212년 10~12세 소년들이 지중해에 도착하면 모세의 기적처럼 바다가 갈라져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열릴 것이라는 허망에 빠진 채 모여들었다. 결국 7,000~1만 5,000여명의 소년십자군은 바다에 빠져 죽거나 노예로 팔렸다. 은자 피에르의 광기로 시작된 십자군은 1290년께 추진동력을 상실했으나 그 변형은 여전히 살아 있다. 조지 부시 2세 미국 대통령은 2003년 이라크 침공을 앞두고 ‘이라크의 학정을 해방시키라는 신의 음성을 들었고 신은 자신의 편’이라고 강변했다. 비슷한 시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2005년 선종)는 하나님의 뜻은 전쟁이 아니라 평화에 있다며 반전운동에 힘을 보탰다. 묻고 싶다. 종교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신에게 반문하고 싶은 게 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민중십자군’, ‘농민십자군’으로도 불리는 군중 십자군의 규모에 대해서는 설이 많다. 30만이 넘었다는 추정도 있지만 4만명이 정설로 내려온다. 주목할 대목은 에미엥의 은자 피에르. 이탈리아의 경제사학자 카를로 치폴라에 따르면 피에르는 남다른 고급 취미를 갖고 있었다. 후추를 뿌린 생선 요리를 광적으로 좋아했다는 것. 당시 후추 가격은 같은 무게의 금(金)값에 버금갈 정도로 비쌌다. 누추한 사제가 후추라니! 이미 사망(2000)한 치폴라에게 물어볼 수는 없지만 피에르의 후추 선호설은 대중의 성지 회복 열망의 밑바닥에는 값비싼 동양의 향신료로 일확천금을 누리겠다는 기대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 십자군전쟁이 남긴 가장 큰 오점은 증오를 증폭시켰다는 점이다. 군중십자군 뿐 아니라 정식 십자군(모두 8차례)들도 유대인은 물론 이슬람 교도를 학살해 종족간 종교간 증오심이 깊어졌다. 이슬람의 명장 살라딘이 베푼 용서와 관용을 받고도 십자군은 이교도 학살로 일관해 세상은 종교간 불신과 반목으로 빠져들었다. 초기 이슬람의 전통이던 관용의 정신도 점차 엷어졌다. -
맥아더 해임, 그 뒷 얘기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4.11 06:00:001951년 4월 11일 오후 3시, 일본 도쿄. 미 극동군 사령부가 충격에 빠졌다. ‘맥아더 사령관 해임’이 전격 발표됐기 때문이다. 물론 낌새는 채고 있었다. 일부 참모들은 뭔가 중대발표가 임박했다는 얘기를 듣고 있었으나 미국 워싱턴 시각으로 새벽에 발표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새벽 1시 뉴스 앞부분은 통상적인 내용이었다. ‘잘못 짚었구나’라는 생각도 찰나, 뉴스 말미에 ‘중대 발표가 있으니 기다려 주십시요’라는 아나운서 멘트가 흘러나왔다. 맥아더 원수를 UN(국제연합)군 사령관과 미 극동군 사령관 등 모든 사령관직에서 해임한다는 내용. 해임 사실을 전해 들은 된 맥아더는 부인을 껴안으며 말했다고 전해진다. ‘지니, 드디어 집에 돌아가게 됐군’ * 맥아더 해임은 말 그대로 파격이었다. 맥아더가 누구인가. 태평양전쟁의 영웅이며 ‘외국인 쇼군’(將軍·17세기 이후 개항까지 일본의 최고 통치자)이라 불리며 일본의 전후 처리는 물론 민주화를 진두지휘한 군정의 최고 책임자로 존경받은 군인이자 일본 통치자. 미군 최초의 5성 장군 아니던가. ‘강을 건널 때는 말을 바꾸지 않는다’는 전통이 유달리 강한 미국의 대통령이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왜 장수를 내쳤을까. 공식 이유는 명령 불복종. 백악관은 맥아더 원수가 대통령은 물론 미 합동참모본부와 의견 조율도 없이 멋대로 발언하고 작전을 펼쳐 미군과 UN군에 막대한 손실을 끼쳤다는 판단을 갖고 있었다. 중공군이 참전할 것이라는 수많은 징후를 묵살해 전황이 나빠지고 장전호 철수를 비롯한 치욕적인 후퇴를 당한 마당에 맥아더 장군이 자신의 실수를 감추기 위해 중국에 대한 핵 공격 등 강경발언을 일삼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군에 대한 민간 우위의 원칙마저 무너졌다고 여겼다. 트루먼과 맥아더는 이전에도 숱한 의견 충돌을 빚었다. 당시 상황에서 견해가 가장 엇갈렸던 대목은 38선 재돌파 문제였다. 1950년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 초기 부산 일대만 남기고 밀렸으나 인천상륙작전 등을 통해 북한을 거의 점령한 상태에서 중공군의 개입으로 서울까지 내줬다가(1.4 후퇴) 반격에 성공해 서울을 찾은 상황. 맥아더는 북진을 요구했으나 트루먼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훗날 비밀 해제로 공개된 미 국무부 문서 등에 따르면 트루먼 대통령과 미 행정부의 관심사는 한반도 통일이 아니라 휴전에 있었다. 더 밀고 나가면 소련과 3차 세계대전으로 번지고 핵 전쟁이 될 수도 있다는 걱정에 빠졌었다. 주요 동맹국인 영국과 프랑스의 판단도 마찬가지. 소련과 중국 역시 전쟁 이전 상황으로의 복귀를 바랐다.** 결정적으로 비밀리에 움직이던 NSA(미국 국가안전국)***의 정보가 트루먼 대통령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일본에 주재하는 외국 대사들에게 맥아더 원수가 ‘한국전을 대전으로 발전시켜 중공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원자폭탄 30개도 투하할 수 있으니 나중에 놀라지 말라’고 말했다는 NSA의 도청 보고에 트루먼은 책상을 내리치며 말했다. ‘이건 명백한 반역(Treachery)이야!’ 트루먼은 갑갑해졌다. 맥아더를 내치고 싶었지만 비밀기관인 NSA가 맥아더 원수와 외국 대사들을 상대로 도청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제시할 수 없었던 탓. 고민하던 트루먼에게 맥아더 스스로 구실을 안겨줬다. 맥아더의 일방적이고 독자적인 휴전 제의(3월 23일)에 백악관은 경악하면서도 속으로 웃었다. 말이 휴전제의였지 실제로는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대규모 폭격에 나선다는 위협이었다. 맥아더 원수의 강경 발언은 결국 트루먼에게 꼬투리를 잡혔다. **** 맥아더 해임은 역풍을 불렀다. 맥아더 원수가 귀향하는 길에는 수십만의 인파가 몰려 영웅의 귀환을 축하하며 트루먼에게 저주를 보냈다. 트루먼의 지지도는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최하위권인 20%대로 떨어졌다. 지지도는 바로 회복됐으나 두 사람은 공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설전을 펼쳤다. 맥아더가 명령을 불복종했다는 트루먼의 자서전(1961)이 나오자 맥아더는 당시 트루먼의 참모 중에 공산주의자들이 포진해 정보를 빼돌린다는 점을 강조한 뒤 바로 보복 당했다는 주장을 펼쳤다. ***** 역사에서 둘은 어떻게 기억될까. 비슷하다. 둘 다 위인으로 각인돼 있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 트루먼은 5위권을 오르내린다. 오바마까지 44명의 역대 미국 대통령 중에서 워싱턴과 링컨, 루스벨트가 항상 3자리를 차지하고 나머지 2자리에 끼어야 5위권에 든다는 점에서 대단한 평가를 받고 있는 셈이다. 3차 세계대전을 막았다는 점이 가장 크게 평가받는다. 맥아더 장군 역시 한때 6성 장군으로 추서(追敍)하자는 논의가 일었을 만큼 추앙받고 있다. 치열하게 다퉜음에도 동시에 존경받을 수 있는 미국 사회의 풍토가 부럽다. 맥아더의 해임 배경에 금융 자본의 입김이 개입했다는 분석도 있다. 론 처노가 지은 ‘금융제국 J.P. 모건’에 따르면 모건하우스 회장이던 러셀 레핑웰이 트루먼 대통령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모건가의 무드셀라(방주를 만든 노아의 할아버지로 성서에서 가장 장수한 사람으로 나온다. 969세. 모건하우스에서 그만큼 오래 군림했다는 뜻)’로 불렸던 레핑웰이 친구인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 ‘비참한 4억 중국인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서는 안 된다. 중국인은 군벌과 정부, 일본의 점령 때문에 고생했다…(중략)…우리는 중국인을 죽여야 할 사명을 갖고 있지 않다. 중국과 전쟁을 한다면 미국과 유럽에서 무방비에 빠질 것이다.’ 국제관계위원장직도 맡고 있던 레핑웰의 편지 발송일은 1950년 11월 말. 맥아더가 ‘중공의 개입 가능성은 전혀 없다’며 호언장담하던 무렵이다. 얼마 후 중공군이 국경을 넘고 미 해병대가 장전호 전투에서 대패하자 트루먼은 맥아더의 상황판단 능력을 의심하기에 이른다. 반대로 모건그룹에 대한 신뢰는 깊어졌다. 레핑웰은 확전시 이익 감소를 우려해 이런 서신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지만 해임이라는 결과는 편지의 취지와 똑같다. 과연 모건금융그룹은 맥아더 해임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을까. 별도의 연구가 필요한 대목이다. 보다 관심이 가는 점은 따로 있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부터 미국에서는 정치권과 월가, 군수산업간 다중 채널의 의사전달 통로가 수시로 가동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동맹국은 뒷전이다. 예나 지금이나. ******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맥아더 장군의 해임 통지는 당초 4월 11일 저녁 8시( 한국 시각 12일 오전 10시) 한국 전선을 시찰 중이던 미 육군 장관 프랭크 페이스를 통해 전달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시카고 트리뷴지의 백악관 출입기자가 이를 눈치채자 당황한 백악관은 시간을 앞당겨 4월 11일 새벽 1시(한국 시각 11일 오후 3시) 맥아더 장군 해임을 전격 발표했다. ** 미국과 직접 대화할 창구가 없던 중공은 중립국 인도를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전했다. 국군과 미국군이 처음으로 38선을 넘던 1950년과, UN군이 재반격하려던 1951년 봄에 중공은 미군의 38선 돌파를 좌시할 수 없다는 입장을 전하며 한 가지 단서를 달았다. ‘한국군 단독으로 38선을 넘는다면 상관하지 않겠다’는. 한국군을 그만큼 얕잡아 봤다는 얘기다. 휴전을 앞두고 지리하게 펼쳐진 고지전투에서 당시 국군은 몇 배가 넘는 중공군은 수없이 물리쳤으나 현리 전투 등에서 군단 병력이 소규모 중공군에게 무너지는 대참패도 몇 차례 기록했었다. *** 1947년 창설된 NSA는 CIA(중앙정보국)의 전신. 한국전쟁 동안 공식적으로는 거의 언급된 일이 없는 극비기관이었다. 암호기기와 감청 수단을 통해 미국 정부의 통신 체제를 방어하고 적국이든 우방이든 가리지 않고 다른 나라들의 메시지와 국내 주요 인사의 대화와 전화를 도청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NSA가 트루먼에게 보고한 비밀 정보에는 맥아더가 외국 대사들에게 대만으로 쫓겨난 자유중국군을 중국 본토에 진공시킨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 맥아더 원수가 중공을 자극하려 실질 군사행동에 들어갔었다는 기록도 근년에 나왔다. 에드워드 마롤다 박사의 ‘미 제7함대 역사’(2012 미 해군성 발간)에 따르면 맥아더 원수는 4월 7일 동해에 있던 7함대 소속 77기동대의 함정 두 척을 대만 해협 중공측 해안 근처로 파견하며 무력시위를 지시했다. 4월 11일 대만해협에서 미 해군 구축함과 대치하는 중공의 무장선 47척 중에서 총이라도 한 발 쏘면 즉각 확전으로 치달을 비상 상태에서 전격 해임이 결정됐다는 것이다. ***** 당시는 매카시 상원의원이 주도한 ‘빨갱이를 잡아들이자’는 매카시 선풍이 한창일 때여서 맥아더가 ‘백악관 내 첩자’바로 말했다면 파장이 컸을지도 모른다. 2차 대전이 끝난 뒤 세계 경제를 어떻게 운용하느냐를 놓고 1944년 연합국들이 모였던 브래튼우즈 협상에서 영국 대표 케인즈를 누르고 미국의 방안(IMF·IBRD 창립)을 채택시킨 미국 재무성 대표 헤리 화이트조차 매카시즘의 희생양이 되던 시절, 퇴역한 맥아더는 군에 매카시즘이 확산되는 현상을 우려했다고 한다. 웨스트포인트 사상 최고 점수로 수석 졸업, 미 육군 최연소 사단장, 최연소 참모총장 등의 기록을 갖고 있는 맥아더는 자존심이 강하고 남다른 우월감으로 독불장군이라는 지적을 많아 받았다. 반면 라틴어 고서를 줄줄 암송하는 실력을 가졌지만 20세기 미국 대통령 중에서는 유일한 고졸 출신인 트루먼은 참모들과 항상 상의해서 일을 처리했다. 둘은 여러 가지 점에서 대조적이다. ****** 러핑웰은 친일성향이 강하기로도 유명했다. 한때는 미국의 중앙은행 역할까지 맡았던 모건하우스 자체의 친일성향이 강하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눈여겨 볼 대목은 미국과 일본이 평화협정을 체결한 1951년 일본 재무성의 고위관리가 모건 하우스를 찾아와 놀라게 만들었다는 점. “과거에 우리 정부가 서명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왔다”고 밝힌 일본 공무원들은 1920년의 원리금 일체를 갚았다. 이미 손실 처리가 다 끝난 채무를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상환한 일본과 모건하우스와 관계가 더욱 깊어졌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한국 입장에서 때로 “미국은 한국을 일본 아래의 동맹으로 여기느냐”고 불만을 표시하지만 미국과 일본의 관계에는 전략적 중요도에 앞서 이런 사례들이 수없이 많다. -
망국의 ‘조선보병대’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4.08 06:00:001931년 4월 8일 오전 10시. 구 육조거리 서울 광화문 통에서 50여명의 조선인 군대가 해산식을 가졌다. 대부분은 이 대목에서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인 군대’라니.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해산 당한 시기가 1907년, 일제가 조선인의 일본군 지원 입대를 ‘허용’한 게 1938년부터인데 1931년 서울에 조선인 부대가 존재했을 턱이 있나. 만주의 항일 독립군이라면 몰라도…. 십중팔구는 이렇게 여기지만 장교와 병사 전원이 조선인으로만 구성된 부대가 있었다. 부대 명칭에도 ‘조선’이 들어갔다. 이름 하여 ‘조선보병대(朝鮮步兵隊)’. 일제가 대한제국군을 해산(1907년)한 직후 황실 보호와 퇴직군인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남겨둔 조선보병대는 서울(당시는 京城) 한 복판에서 33년 세월을 버텼다. 비록 총독부의 예산으로 움직였지만. 창설 당시 조선보병대의 병력은 837명. 근위보병대대 644명, 근위기병대 92명과 무관학교, 시종 무관부 등으로 구성됐다. 주력은 구 대한제국군 2대대. 군대를 해산할 때 총 들고 저항했던 다른 부대와 달리 일제의 명령에 순응했던 부대를 주축으로 조선왕실의 경호와 의전을 맡을 부대를 꾸렸다. 애초부터 민족의식이나 전투 의지와는 거리가 먼 군대로 태어난 셈이다. 한일병탄(1910)이 강행된 뒤에는 그나마 한 줌의 병력도 더욱 줄었다. 부대 명칭에서도 황제나 국왕을 지근 거리에서 보위한다는 뜻의 ‘근위(近衛)’가 빠졌다. 대대급 조선보병대와 중대급 조선기병대 중에서 조선기병대는 1913년께 슬그머니 없어졌다. 기병 부대는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에서다. 고종 황제가 붕어(崩御)한 1919년에는 대대급이던 조선보병대 규모마저 중대급으로 줄었다. 작은 병력이지만 조선보병대는 해마다 50~80여명씩 신병을 뽑았다. 1924년 민족계열 일간지인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를 따라가 보자. ‘장교 이하 280여명이 근무하는 조선보병대가 신병 80여명을 모집한다. 복무기간은 2년이며 자격조건은 아래와 같다. 키 5척2촌(약 158㎝) 이상, 연령 18~30세, 학력은 보통학교 졸업자나 동등학력 소지자. 이등병 급여는 월 14원이며 숙식과 피복 제공.’ 면서기 월급이 20원인 시절, 어중간한 학력으로는 농사 외에 마땅한 직업도 없었던 때라 병사 모집에는 7대 1에서 10대1의 경쟁이 붙었다. 보통학교 이상 졸업자로 구성된 당시로서는 평균 이상의 고학력 군대였으나 조선보병대는 태생적으로 총을 쏠 수 없는 군대였다. 당시 동아일보에는 ‘세계 유일의 평화군대’라는 자조 섞인 기사도 종종 실렸다. 일제는 조선보병대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봤다. 망한 왕조 궁궐의 수문장 정도로 여겨 명맥을 살려줬는데 문제는 돈. 조선보병대를 유지하는 데 매년 20만원 안팎의 돈이 들었다. 일제 말기를 제외하고는 조선인 장교를 뽑지 않은 까닭에 조선보병대의 장교들은 나이 많고 계급도 높아 급여도 많이 나갔다. 1925년 급여 명세표에 실린 계급별 구성은 중장 1명, 소장 3명에 대좌(대령) 3명, 중좌 4명, 소좌 3명에 대위과 중위 각각 2명. 준위급 특무 장교 1명에 부사관급인 정교 1명, 부교 14명, 참교 7명을 뒀다. 병사들은 상등병 28명, 일등병 167명, 이등병 100명. 일제는 조선보병대 주둔지도 호시탐탐 노렸다. 조선총독부까지 번듯하게 들어선 마당에 광화문 앞 옛 육조(六曹) 거리에서도 가장 좋은 예조(禮曺) 자리(현 정부청사 터)를 차지하고 있던 조선보병대를 내쫓고 새로운 건물을 짓고 싶었다. 툭하면 시내 한복판에서 술 먹고 경관과 싸우는 조선보병대를 다른 곳으로 옮기자는 의견도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순종 황제가 영면(1926년)한 뒤부터 이런 논의는 더욱 많아졌다. 조선의 궁궐을 호위할 필요가 없어진 만큼 조선보병대 역시 폐지하거나 소대 규모로 축소하자는 방안이 나온 끝에 1930년 말께 방향이 잡혔다. 마침 미국 뉴욕 증시 대폭락(1929년)을 시발로 전 세계가 대공황에 신음하던 상황. 일제는 꺼리낌 없이 조선보병대를 해산했다. 시민들은 착잡한 심정으로 조선보병대 해산을 지켜본 것 같다. 동아일보(1930년 11월 9일자 2면)에 실린 기사의 일부에서 회한이 느껴진다. “총은 메었으되 사람은 해칠 줄 모르고 탄약갑은 찼으되 탄환은 가지지 않은 세계에서 하나 밖에 없는 평화의 군대 조선보병대가 해산된다.…(중략)…조선인 군인의 잔해가 조선에서 사라지고 외국에서나 조선인 군인들을 찾아 볼 수 밖에 없게 될 터이니 마지막 닫히는 평화의 군대 만세나 불러볼까.” 조선보병대는 일제 식민 통치의 하부 기구로 작동하며 1919년 3.1 운동 당시에는 창덕궁으로 밀려오는 군중을 막아내 원성을 사기도 하고 숱한 민원을 발생시켰으나 독립운동가도 다수 배출해냈다.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는 형집행 직전에 자결을 택한 장진홍 선생, 1921년 친일거두 민원식을 칼로 처단해 국가보훈처로부터 2009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양근환 선생 등이 조선보병대의 병졸 출신이다. 시민들은 무엇보다 아침 기상 나팔 소리를 아쉬워했다고 전해진다. 매일 오전 7시 30분 마다 기상 나팔 소리에 맞춰 일과를 시작하다 순식간에 실업자가 된 조선보병대의 ‘장졸(將卒)’들은 순사나 형무관, 경성전기회사의 차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특이한 대목은 해산 당시 202명의 초미니 군대를 중장 2명, 대좌 6명 등 고급 장교가 즐비했다는 점. 김응선 대좌은 해산 직후에 일제에 의해 공을 인정받아 일본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고 특별상여금 2,970원과 특별퇴직감사금 및 수당 8,926원을 받았다. 해산된 조선보병대사령부 자리에는 또 다른 수탈기관이 들어섰다. 광화문통 건너편에 있던 체신국 보험감리과와 보험업무과가 조선보병대 자리를 인수받아 26만원 예산으로 새로운 양식 건물을 올렸다. 번듯한 건물에서 일본은 체신 간이생명보험을 반강제로 안겼다.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체결됐으나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당시 합의에 따라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한 약 1,100만건의 간이생명을 강매한 기관이 바로 조선보병대 부지를 물려받은 일본 우정 간이보험이었다. 조선보병대가 있던 자리에는 오늘날 정부서울청사가 자리 잡고 있다./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응답하라 1986…춤추는 원유가격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4.07 08:16:10‘저유가…장래가 불안하다.’ 요즘 얘기가 아니다. 30년 전 국내 신문 경제면 기사에 달린 제목이다. 당시 전문가들은 기름 값이 낮은 게 축복이냐 재앙이냐를 놓고 연일 논쟁이 벌였다. 어떤 상황인데 그랬을까. 1985년 말까지 배럴당 30달러 이상을 호가했던 국제 원유가격이 4개월 사이에 10달러 선까지 떨어졌기 때문이다. 주요원자재 가격이 짧은 기간에 이만한 폭으로 내린 것은 본격적으로 광물자원을 사용하기 시작한 산업혁명 이래 처음이었다. 유가를 끌어내린 것은 크게 세 가지 요인. 무엇보다 공급이 넘쳤다. 영국과 노르웨이의 북해유전이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가고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소련도 제 1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추진을 위해 기름을 한껏 뽑아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카르텔 역시 흔들거렸다. 전쟁을 치르던 이란과 이라크가 무기구매 대금 확보를 위해 배정량(쿼터)을 어기고 몰래 원유를 팔기 시작하며 다른 산유국들을 자극했다. 두 번째 요인은 OPEC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군기’ 잡기. 북해산 브렌트유 공급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감산에 나섰으나 다른 산유국들이 따라오지 않자 다시 증산에 나섰다. 증산은 증산 경쟁을 부르고 결국 가격 하락 압력이 커졌다. 쌓아둔 오일 달러가 많았던 사우디는 비협조적인 어떤 산유국과도 ‘치킨 게임’(무한 가격 경쟁)을 펼치겠다고 마음먹었다. 세 번째 요인은 사우디의 이란 견제 정책에서 비롯됐다. 이란의 회교원리주의 혁명 확산을 두려워했던 사우디는 연초에 이란이 전략요충지인 파우 반도를 점령하자 더욱 조바심냈다. 이란은 연간 석유판매대금을 195억 달러로 잡고 여기서 42억 달러를 해외무기 도입에 쓸 요량이었으나 이는 OPEC의 공시유가였던 배럴당 28달러를 전제로 삼은 것이었다. 이라크를 공개적으로 지원하던 사우디는 이란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감산 당시 250만 배럴로 줄였던 하루 생산량을 500만 배럴로 두 배 늘렸다. 이래저래 공급은 늘어날 수 밖에 없는 상황. OPEC 전체의 하루 산유량이 1,750만 배럴이던 시절에 공급 과잉 물량이 300만 배럴에 이르렀다. 반면 수요는 줄어든 상태였다. 1973년과 1979년 1·2차 석유 위기를 겪었던 소비국들은 소형차 보급 확대를 비롯한 에너지 절약시책을 펼치고 대체에너지 개발에 집중, 산유국 전체의 원유 수출량이 1983년 물량에 묶인 채 늘지 않았다. 당연히 가격이 내려갈 수 밖에. 소비국들은 저유가를 반겼으나 미국에서는 논란이 빚어졌다. 레이건 행정부는 ‘시장에 맡기자’며 전반적으로 느긋한 편이었으나 유전밀집 지역인 텍사스와 루이지애나가 들끓었다. 에너지 산업이 침체에 빠지며 전국적인 실업률도 뛰었다. 급기야 미국 에너지부 장관 존 해링턴은 “유가 하락이 국가의 안보를 위협하는 상황에 이르렀다”며 경고하고 나섰다. 이전과는 성격은 다르지만 ‘제 3차 석유 위기에 들어섰다’라는 말도 나돌았다. 에너지부 장관보다 더 저유가를 근심하던 정치인도 있었다. 오늘 얘기의 주인공 격인 조지 부시 부통령. 부시는 동부의 정치인 가문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텍사스에서 석유사업을 펼쳐 자력으로 백만장자 반열에 오른 뒤 정계에 투신한 인물. 유가에 각별한 관심이 있었던 부시 부통령은 “낙하산 없이 점프하려는 공수부대원 같은 행동을 중지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8박 9일 일정의 중동 순방길에 올랐다. 부시의 성명에 백악관 대변인은 반대로 해석될 수 있는 논평을 내놓았다. “가격을 안정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자유시장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미국 내에서 특히 행정부에서 유가 안정에 대한 적극적 개입은 공감대가 이만큼 없었다. 유가 ‘안정’이 필요하다는 부시의 의지에 호의적인 언론도 많지 않았다. 레이건 대통령으로부터도 확실한 지지를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부시는 첫 도착지인 사우디의 수도 리야드에서 원군을 만났다. 24년간을 세계최대 산유국의 석유장관으로 재임한 아메드 자키 야마니는 사우디 내에서는 상대적 온건파였다. 유가 안정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지만 문제는 강경한 입장을 갖고 있던 파드 국왕. 방문기간 내내 부시의 속을 태웠다. 파드 국왕의 행궁(行宮)인 동부 지역의 다란까지 찾아갔지만 부시는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마침 이란의 사우디 유조선 공격의 여파로 회담 연기를 통고 받기도 하고, 더운 낮에는 잠자고 그나마 시원한 밤에 일하는 사막 유목민족의 생활시간대 때문에 애먹었다. 접견 통고를 기다리다 지쳐 잠을 들 무렵에서야 전갈을 받은 시각이 자정 무렵. 1986년 4월 7일 새벽 두 시까지 이어진 2시간 30분간의 심야회동에서 두 사람은 두 가지 문제를 다뤘다. 국제 유가와 지역 안보. 페르시아만의 안전보장과 미국의 무기 수출이 주로 논의되고 유가 안정은 두 번째로 밀렸다. 사우디의 파드 국왕은 즉답도 안줬다. 부시가 국왕으로부터 어떤 확언을 받았는지 밝혀지지 않았으나 분명한 점은 이를 기점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부시는 감산과 가격 인상을 주저한다면 수입 석유에 관세를 부과하겠는 협박 카드까지 곁들여가며 사우디의 강경파를 설득했다고 전해진다. 부시의 중동 방문 순간에도 현물 시장에서 유가는 7달러에 거래되기도 했지만 가격 안정에 대한 공감대는 널리 퍼졌다. 4개월 뒤 OPEC 총회는 유가를 배럴당 18 달러로 정하고 국가별로 감산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이후 유가는 80년대 말까지 15~23달러라는 박스권 안에서 움직였다. 유가 안정 속에서 미국의 소비 심리가 살아나고 주식시장도 1987년 블랙먼데이(10월19일)까지 상승 가도를 내달렸다. 한국도 덕 봤다. 비교적 낮고 안정적인 국제유가와 저금리, 저환율(달러 약세 엔화 강세)이라는 3저 호황의 반사이익을 톡톡히 누렸다. 해방 이래 만성적인 무역수지 적자에서 벗어나 1986년부터 흑자로 돌아섰다. 유사 이래 처음인 ‘구조적 무역수지 흑자’는 오래 가지 못했으나 한국경제가 시장 여건에 따라 세계에서 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줬다. 국제 원유시장 안정의 최대 수혜자는 당사자인 조지 부시 부통령. 임기 후반부의 중반을 넘긴 레이건 대통령의 후계자로 지목돼 1988년 대선에서 석유재벌들의 지원 속에 미국의 41대 대통령으로 뽑혔다.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따르는 법. 피해 본 사람도 있었다. 1·2차 석유 위기를 경험한 50대 이상이라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야마니 석유장관은 OPEC의 가격 인하를 이끌어낸 직후 잘렸다. 파드 국왕으로서는 양보하되 강경론을 밀었던 자신의 권위를 지키려 야마니 해임이라는 카드를 선택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미국과 달리 피해가 극심했던 나라도 있다. 고유가를 고집했던 소련의 경제는 저유가로 인해 달러 수입이 격감하며 안에서 무너졌다. 서방이 안정적 박스권이라고 여겼던 유가가 몇 년 만에 소련 연방 해체라는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역사는 정녕 반복되는 것인가. 오늘날의 유가 흐름이 30년 전의 데자뷔라는 분석이 꼬리를 문다. ‘그레이트 사이클’이라는 전문가도 있다. 과연 국제 유가는 어떻게 형성될까. 실로 궁금하다. 만약 30년 전처럼 국제 유가가 장기 안정적으로 형성된다면 우리 경제는 다시금 도약의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증오의 대물림, 키시네프 포그롬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4.06 06:00:001903년 4월 6일, 러시아제국 서남부 도시 키시네프(Kishinev). 시민들이 한순간에 광기에 휩싸였다. 폭도로 변한 이들은 특정 민족을 보는 대로 공격했다. 경찰과 군대, 정부 관리의 수수방관 속에서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관동대지진(1923년) 당시의 조선인 대학살을 연상케 하지만 발생시점이 20년 빠른 이 사건은 키시네프 포그롬(Kishinev pogrom). 학살 대상인 특정 민족은 유대인이었다. 포그롬이라는 단어 자체가 유대인에 대한 조직적인 약탈과 학살을 뜻하는 러시아어다. 19세기 말부터 등장한 포그롬은 수 없이 반복되며 영어와 불어, 독일어 사전에도 올랐다. 역사에 ‘키시네프 학살(kishinev massacre)’로도 기록된 이 사건의 발단은 악의성 오보. 러시아 극우 민족주의 신문들이 오리무중에 빠진 6세 아동 살해사건의 범인이 유대인으로 추정된다는 기사를 내보내자 키시네프시가 흥분 상태에 빠져들었다. 사흘간 계속된 폭동에서 희생된 유대인은 49명(뉴욕타임스는 120명이 사망했다는 보도를 내보내었다). 592명이 중경상을 입고 가옥 700여채가 불탔다. 악의적인 선동과 광란의 학살에는 세 가지 배경이 깔려 있었다. 첫째 러시아 제국 전역에 유대인 수가 갑작스레 많아졌다. 1772년부터 1795년까지 러시아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가 폴란드, 리투아니아연합을 세 차례에 걸쳐 나눈 결과 100만명이 넘는 유대인이 갑자기 러시아제국 신민(臣民)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두 번째 이유는 질시. 기존 유대인과 합쳐 350만명의 유대인을 떠 안게 된 러시아는 19세기 내내 600개가 넘는 유대인 관련 법령을 만들며 거주와 직업을 제한했지만 유대인 인구를 빠르게 증가하고 상권도 커졌다. ‘예수를 팔아먹은 유대인’들이 자신들보다 잘사는 모습에 러시아인들의 증오가 밑바닥부터 차곡차곡 쌓였다. 세 번째는 종교와 광기의 결합. 3월과 4월 내내 러시아 정교의 부활절과 유대교 절기인 유월절이 겹친 가운데, 러시아인 사이에서는 유대인들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 기독교인을 제물로 바친다는 루머가 퍼졌다. 부활절 직전까지 40일 금식이 끝나 심리적 해방감에서 갖은 음식과 술을 만끽한 러시아인들은 ‘거룩한 종교 행위’처럼 유대인들을 죽였다. 사태가 진정되고 나서 얼마 뒤 소년을 죽인 진짜 범인은 친척으로 밝혀졌으나 반성은 전혀 없었다. 사법당국의 뒷처리도 미진해 주모자 2명에게 각각 7년형과 5년형, 22명에게 1~2년의 징역형이 내려졌을 뿐이다. 솜방망이 처벌 속에 비슷한 사건이 꼬리를 물고 되레 반(反)유대 정서는 더욱 광범위하게 퍼졌다. 키시네프 포그롬은 유대인 박해 사례의 하나로 끝나지 않고 20세기 역사에 파장을 미쳤다. 유대인 사회는 포그롬이 반복되는 러시아 땅은 살 곳이 못 된다는 판단 아래 주로 미국으로 터전을 옮겼다. 이렇게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이 약 250만명. 당연히 미국 유대인 사회가 급격하게 컸다. 이전까지 서로 반목하던 유대인끼리도 국제적 연대 의식이 싹텄다. 미국과 서구 각국의 유대인들은 러시아와 동구권 유대인들의 박해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이주를 도왔다. 러시아의 동화정책에 순응해 ‘애국적 러시아인’으로 변신하려던 지식인 그룹들은 ‘유대 독립 국가’를 세우는 방안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 국가를 건설한다는 초기 시오니즘 운동의 씨가 키시네프 포그롬을 통해 뿌려진 것이다. 대서양을 건넌 유대인들은 금융과 언론을 장악해 나가며 미국 사회의 중추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러시아에 남은 유대인들은 유대에 동정적인 러시아 지식인들과 함께 반정부 투쟁을 벌이고 점차 사회주의에 빠져들었다. 인류 최초로 사회주의 국가를 세운 공산 혁명인 러시아 혁명에 유대인들이 다수 포진한 것도 포그롬의 소산이다. 한반도의 역사도 영향을 받았다. 동포의 학살 소식에 가슴을 쳤던 독일 출신의 미국의 유대인 자본가 제이콥 시프는 러시아와 싸우는 일본을 적극 편들었다. 일본이 러일전쟁의 전비 조달을 위해 발행한 2억 달러(요즘 가치 240억 달러·비숙련공 임금상승률 기준) 규모의 국채를 전액 지급 보증해 러일전쟁 승리를 재정적으로 도왔다. 일본 정부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은 그는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황궁에 초청돼 훈장을 받았다. 113년 전, 유대인의 피로 물들었던 키시네프는 몰도바 공화국의 수도 키시너우로 이름이 변경됐지만 증오와 광기, 학살의 인자는 변하지 않았다. 어제의 피해자가 오늘의 가해자로 바뀐 채 팔레스타인은 차별과 증오, 복수의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변하지 않은 것은 또 있다. 진실을 왜곡하는 악의적 보도가 판치고 마치 미친 듯 돌아가는 세상이니./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hongw@@sedaily.com -
시베리아 ‘出兵’…왜곡의 달인들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4.05 06:00:001918년 4월 5일, 일본 해군 육전대 100여명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들이닥쳤다. 명분은 거류민단 보호. 공산 혁명의 혼란 속에서 일본인 상점의 점원 1명이 살해 당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상륙작전을 펼쳤다. 외항에서 대기 중이던 영국 해군 순양함도 동조해 무장병력 50여명을 상륙시켰다.* 1차대전과 러시아혁명의 와중에 일본과 미국ㆍ영국ㆍ프랑스 군대의 간섭(intervention)이 연해주에서도 시작된 순간이다.** 왜 시베리아에 군대를 보냈을까. 크게 세 가지 이유에서다. 연합국의 일원이던 제정 러시아에 제공한 총포 등 전략물자가 독일로 유출될 가능성을 차단하고 백군을 도와줄 경우 공산혁명의 확산을 막을 수 있다는 계산이 앞섰다. 여기에 체코군단을 구출해야 한다는 명분까지 생겼다. 체코군단이란 오스트리아군에 징집돼 러시아군에 잡힌 체코 출신 포로를 독일·오스트리아와 싸울 군대로 재편성한 외인부대. 독일과 휴전협정을 맺고 연합국 대열에서 이탈한 레닌에게 체코군단은 뜨거운 감자였다. 독일과 계속 싸우겠다며 항전 의지를 불태웠기 때문이다. 체코군단을 러시아에서 빼내 프랑스 전선에 투입하자는 연합국의 종용에 대한 레닌은 우회 귀국길을 택했는데 여기서 사달이 났다. 서유럽의 국경을 바로 넘기가 여의치 않다는 핑계를 대고 시베리아 철도를 돌아 선박으로 유럽 전선에 보내는 길고도 긴 여정. 1918년 5월 우발적 사건으로 붉은 군대가 체코 병사들을 구금하자 무장를 갖추고 있던 군단 전체가 들고 일어났다. 러시아 한복판에서 운송수단을 탈취하고 붉은 군대를 피해 필사적으로 탈출하겠다는 체코군단의 봉기는 그렇지 않아도 간섭의 명분을 찾고 있던 열강에는 좋은 구실이었다.*** 체코 군단은 천신만고 끝에 안전하게 빠져나가 고국으로 돌아갔다. 모두 9만여명에 이르렀던 국제 간섭군도 이때부터 명분을 잃었다. 연해주지역에서는 일부 중국 군벌까지 국제 간섭군에 합류했으나 공산 러시아 군대는 갈수록 강해졌다. 버티다 못한 국제 간섭군은 체코군단이 철수한 1920년 군대를 빼냈으나 일본은 시베리아와 만주 일대에 대규모 병력을 주둔시키며 버텼다. 왜 눌러 앉으려고 했을까. 끝없는 확장 야욕 탓이다. 일본은 시베리아에 온 힘을 기울였다. 일본 육군의 21개 사단 가운데 11개 사단이 직간접적으로 참전해 무려 7만5,000여명의 일본군이 이 지역을 휘저었다. 소련이 세운 괴뢰 극동공화국을 일본의 영향권으로 삼으려는 획책도 시도했다. 성공했을까. 실패로 끝났다. 붉은 군대의 저항과 20만여명에 달하는 조선인들이 고비마다 일본군과 백군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 결국 일본은 아래 연간 세출(1918년 10억 1,700만엔)에 버금하는 전비를 소진하고 5,000여명의 전사자를 낸 뒤에야 소련과 수교(1925년)를 맺고 군대를 완전히 빼냈다. 여기서 의문이 나온다. 왜 출병(出兵)인가. 근대 일본이 지출한 역대 전쟁비용 중에서 가장 많고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전투를 펼쳤는데 왜 전쟁이 아니고 출병일까. 두 가지 의도가 엿보인다. 무엇보다 다른 국가들이 체코군단 구출이라는 인류애적 명분 아래 내건 ‘간섭’이라는 미명에 포함될 수 있다고 믿었으리라. 실패한 침략의 역사가 지니는 의미를 희석시키려는 의도 역시 ‘출병’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로 해석된다. 침략을 ‘진출’로 포장하는 ‘왜곡의 달인들’답다. 일본군 전사자 5,000여명은 곱게 죽었을까. 출병으로 살해 당한 시베리아의 조선인과 러시아인들은 원한이 들리는 것 같다. 침략자 일본이 감추고 싶은 역사가 남긴 부작용은 우리 민족에게 고스란히 넘겨졌다. 조선이 쌀 수탈기지로 변한 시기가 시베리아 전쟁에 앞둔 일본의 곡가 폭등과 대규모 소요사태 직후다. 전쟁을 앞두고 수요가 늘어날 쌀에 대한 매점매석이 쌀 소동(1918년 7월)으로 번지며 결국 조선의 곡창지대는 일본인을 위한 쌀 공급기지로 바뀌었다. 일제는 쌀 부족 타개를 위해 조선에서 산미 증식에 적극 나서 쌀 생산이 배증했지만 조선인 1인당 미곡 섭취량은 오히려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증산분 이상의 쌀이 일본으로 빠져나간 까닭이다. 일본군대가 여성을 성 노리개로 삼은 위안부제도 역시 이때부터 시작됐다. 민족 이민사의 최대 비극인 연해주 조선인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1937년)도 일본이 시베리아 출병과 무관하지 않다. ***** 일본의 출병이 아닌 침략 전쟁이 시작된지 만 98년. 침략의 시제는 과거형일까. 감추고 왜곡하는 일본인에게 놀아나던 못난 조상들과 우리는 얼마나 다를까.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일본군의 공식 파병 일자는 1918년 8월 12일로 육군 500명이 블라디보스톡에 상륙했다. 공식 참전 4개월 이전에 현지 함대 사령관의 결정으로 병력이 상륙했다는 점은 일본 군부가 어떻게든 러시아 적백내전에 끼어들고 싶었다는 반증이다. ** 연합국의 러시아 내전 간섭(Allied intervention in the Russian Civil War)은 시베리아 뿐 아니라 러시아 곳곳에서 벌어졌다. 크림반도에는 그리스군 2만 4,000명과 폴란드군 1만 2,000명이 깔렸다. 미군 1만 3,000명, 캐나다군 4,000명, 세르비아군 4,000명, 이탈리아군 2,000명, 영국군 1,600명, 프랑스군 760명이 백해 부근의 항구 아르한겔스크과 블라디보스톡에 각각 진주했다. 루마니아군 4,000명은 아르한겔스크에만 파견되고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톡에만 병력을 보냈다. *** 체코 군단은 한국의 독립운동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수천량의 열차와 러시아 황제가 감춰뒀던 금괴며 무기를 탈취한 그들은 시베리아 철도노선에서 은행과 우체국·신문사까지 운영하며 2년간 동진을 계속해 4만 7,000여명이 블라디보스톡에 안착, 고국행 배에 올랐다. 시베리아를 떠나기 전, 이들이 헐값에 넘긴 소총과 기관총, 탄약으로 무장한 독립군은 청산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 러시아 적백내전에서 적군을 도왔던 시베리아 조선인 독립군들의 활약은 독립운동사에서 재조명받아야 할 부분이다. 조선인 독립군 부대의 활약상은 구소련이 감췄던 미공개 외교문서와 각종 사료를 통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일부 사료에 따르면 조선인 독립군 중대 병력이 일본군과 백군 2개 사단을 막아선 적도 있다고 한다. ***** 연해주에 살던 조선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스탈린의 결정은 조선인들이 일본군과 전쟁시 일본편에 설까를 우려했던 선제 조치라는 설이 유력했었지만 정반대의 견해가 나오고 있다. 스탈린은 일본의 시베리아 침략 당시 단결된 힘으로 일본을 물리치는 데 공헌한 조선인들이 일본을 자극해 소련을 침공할 구실을 줄까 두려워했으며, 특히 자긍심이 강한 조선인들이 독립 국가를 세운다면 다른 소수 민족에게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해 정권의 존망을 걸고 이주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
토르의 망치, 비겐 전투기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4.03 19:35:47세계 최초로 임무컴퓨터를 탑재한 전투기. 작은 기체에 짧은 이착륙거리(500m 길이 고속도로에서도 가능), 막대한 탑재 능력에 뛰어난 기동력. 스웨덴제 전투기 비겐(Saab 37 Viggen)의 면면이다. 1960년대 개발을 시작, 21세기 초까지 북유럽의 하늘을 주름잡았다. 첫 선을 보인 시기는 1965년 4월 4일. 기본 성능과 기체 형상이 공개됐을 때 그 혁신적 설계 때문에 세계가 놀랐다. 최대 특징은 삼각형 텔타익에 작은 앞날개(카나드)를 붙인 더블 델타(double Delta). 일각에서는 ‘복엽 제트기’라고 비웃었으나 운동성이 좋아지고 이착륙 거리가 짧아졌다. 성능도 뛰어났다. 최고속도 음속 2.1배. 기체 크기는 지금도 한국 공군이 운용하는 F-5 제공호와 F-4 팬텀의 중간 정도였으나 무장 탑재량은 F-5의 두 배에 이르렀다. 우수한 성능에 각국이 도입을 추진했지만 해외 판매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미국과 프랑스 등이 정치적 영향력을 내세워 시장을 과점한 탓이다. 결국 세계적 베스트 셀러가 됐음직한 성능에도 1995년까지 생산분은 스웨덴 공군용 329대에 그쳤다. 인도가 대규모 발주를 계획했어도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엔진 원천기술을 제공한 미국의 수출 거부 때문이다. 한국과 인연도 있었다. 산업자원부 차관보 출신인 김홍경 전 한국항공우주산업 사장의 회고. 상공부(현 산업자원부)의 사무관으로 근무하던 그에게 국·과장은 물론 장관에게도 알리지 말고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청와대 제 2경제수석실이 조직한 태스크포스는 ‘한국 상황에 가장 적합한 전투기는 비겐’이라는 중간 보고를 올렸다. 비화(秘話)는 여기까지가 끝.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10.26 이후 작업이 속개되지 않았다. 새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정권은 실무자들이 추천했던 비겐 대신 미국제 F-5 E/F 기종을 골랐다.* 비겐을 단 한 대도 수출하지 못한 스웨덴 항공산업은 위축됐을까. 그 반대다. 비겐의 후속 전투기인 샤브 JAS-39 그리핀은 체코·헝가리·남아프리카공화국·태국·영국 등지에 판매 또는 임대되는 실적을 거뒀다. 브라질이나 인도에서의 같은 대규모 수요도 대기 중이다. 역사가 반복된다고나 할까. 노스롭의 F-5 E/F와 스웨덴 초음속기가 맞붙는 시장이 다시금 다가오고 있다. 무엇보다 사브사가 미국 보잉사와 제휴해 미 공군의 차기 훈련기(TX)선정 경쟁에 끼어들었다. 한국항공우주산업이 사활을 걸고 있는 TX 사업에는 샤브사 뿐 아니라 생각하지도 않았던 경쟁자도 나타났는데 그 기종은 바로 미 공군의 현역 훈련기인 T-38. 한국 공군의 제공호(F-5 E/F)와 뿌리가 같은 기종이다. F-5 E/F의 원제작사인 미국 노스롭사는 T-38기의 수명을 연장하거나 F-5 E/F의 최종 진화판인 F-20을 차기 훈련기의 베이스로 삼을 계획으로 알려졌다.**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신(神), 토르가 휘두르는 망치에서 나오는 천둥이라는 뜻을 지닌 비겐 전투기는 마케팅에서 실패했으나 걸작 전투기의 하나로 손꼽힌다. 인구라야 천만명 남짓한 스웨덴이 명품 전투기를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중장기 비전. 설계 개념과 형체 공개는 1965년이지만 구상은 1950년대 중반에 나왔다. 시제기의 처녀 비행은 1967년, 생산은 1971년, 본격적인 생산은 1974년에 시작했을 정도로 스웨덴은 장기적이고 치밀한 계획에서 전투기 사업을 펼친 게 비겐이라는 걸작을 낳았다. 두 번째 이유는 미국의 전폭적인 기술 지원. 미국제 엔진의 면허생산은 물론 개조와 셜계 변경에 아무런 제한도 가하지 않았다(비겐 전투기가 짧은 이착륙 거리를 갖게 된 이유는 미국제 엔진에 스웨덴제 역분사 장치를 장착한 덕분이다). 세계최초의 전투기용 임무컴퓨터인 ‘CK37 컴퓨터’의 기술도 미국이 지원한 것이다. 미국은 왜 기술을 줬을까. 냉전이 한창이던 시절에 소련 북해함대를 감시하려면 스웨덴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해 좌파 정부가 초장기집권하는 스웨덴에도 고급 기술을 마구 넘겨줬다. 세 번째는 스웨덴 자체의 기술력이 높았기 때문이다. ‘아르네 라코마’라는 엔지니어는 이미 ‘전설적인 항공기 설계자’로 이름이 높았고 미국제 엔진을 자유자재로 뜯어보고 개조할 정도로 높은 수준의 기초 기술력을 갖고 있었기에 미국이 지원하는 기술을 십분 활용할 수 있었다. 스웨덴의 사브 37 비겐 전투기를 오늘날 시점에서 재조명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생산비용까지 합치면 유사 이래 최대라는 18조 원의 예산이 투입될 한국형 차기 전투기(KF-X)가 순항할 수 있을까. 중장기적인 비전과 치밀한 준비가 우리에게 있는가. 앞으로 10년 뒤에는 무조건 KF-X가 비행한다는 청사진만 있을 뿐이다. 미국도 기술제공은커녕 약속했던 기술마저 감추는 형편이다. 국내 기술 수준 역시 당시의 스웨덴과 비견하기 어렵다. 이제라도 비겐의 성공 요인과 우리의 여건을 하나 하나 따져보는 자세가 필요해 보이건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문제를 제기하면 관련 당국은 미국을 변호하기에 급급하고 국민들의 불신은 커져만 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당장 지금은 숨고르기 국면으로 느껴지지만 수면 밑에서는 파장이 거세지는 분위기다./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한국 공군이 최초로 자체 제작한 제트 전투기를 갖게 된 시기는 1982년 9월. 제공호를 생산하면서부터다. 제공호는 미국 노스롭사의 F-5E/F 전투기를 조립 생산한 기종. 면허생산도 아니고 단순히 부품을 들여와 조립한 제공호를 두고 전두환 정권은 대대적인 대 국민 홍보를 펼쳤다. 세계 최신예기를 생산하는 쾌거를 이뤘으며 아시아에서 일본 중공에 이어 세번째 항공기 생산국이 됐다고 강조했으나 모두 거짓말이었다. 한국 공군이 요즘도 운용 중인 제공호는 당시에도 세계 최신예기 근처에 못 갔다. 애초 개발 당시부터 이 전투기는 2선급이었다. 미국의 동맹국에 대한 수출용으로 생산됐을 뿐, 미 공군이나 해군은 사용한 적이 없다. 훈련용으로만 쓰고 있을 뿐이다. 1979년 캠프 데이비드에서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은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에게 미국이 고마움의 표시로 ‘F-5E/F를 공여하겠다’고 제의하자 사다트가 “구닥다리 5등급 항공기”라며 이를 거부한 사례가 유명하다. 이집트가 5등급이라고 혹평했던 전투기가 3년이 지난 뒤 한국에서는 ‘세계 최신예 전투기’로 둔갑한 셈이다. ‘아시아 세 번째 제트 항공기 생산국’도 어림없는 얘기였다. 이스라엘은 이미 1970년대에 프랑스의 미라쥬 전투기 설계도를 훔쳐내 ‘크피르’전투기를 생산하고 인도 역시 수차례 제트기를 연구, 생산한 적이 있다. 한국이 82년부터 F-5E/F를 68대(단좌형 48기, 복좌형 20기) 생산하기 앞서, 대만은 1974년 10월부터 308대의 F-5E/F를 생산했다. 특히 대만의 후기형은 기수 부문이 F-5G(후에 F-20 타이거샤크로 이름이 변경)와 형상이 비슷해 발달형 기체라는 추측을 낳았었다. 5공 정권은 뻔한 사실마저 거짓으로 홍보해 외국, 특히 일본 언론의 비웃음을 샀다. ** F-20은 미국 노스롭사가 F-5 E/F를 기반으로 개발한 전투기로 형상은 F-5 E/F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차원의 성능을 자랑했다. F-16 전투기와 외국 시장을 놓고 경쟁하던 F-20의 노리던 주요 시장은 F-5 E/F의 대량 운용국가인 대만과 한국 등이었으나 1984년 10월 수원비행장에서 시험 비행 중 전두환 대통령이 참관하는 가운데 추락하고 말았다. 캐나다 등지에서도 추락이 잇따라 결국 경쟁에서 도태되고 말았으나 최근 TX의 후속기종으로 거론되고 있다. -
힘든 나날들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4.01 06:00:00구두쇠 스크루지 영감이 회개하는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의 작가 찰스 디킨스. ‘올리버 트위스트’, ‘두 도시 이야기’로도 유명하지만 정작 디킨스 자신이 꼽는 문제작은 따로 있다. 산업소설 ‘Hard Times(힘든 나날들)’다. 영국에서는 영화와 TV 드라마로도 소개됐던 이 작품은 당대의 비평가들로부터도 호평 받았다. 사회개혁을 주장하던 작가이며 비평가인 존 러스킨은 “디킨스의 소설 가운데 최고작”이라고 꼽았다. 디킨스와 같은 시대를 같은 공간(런던)에서 살았던 카를 마르크스가 “정치나 사회의 진실에 대해 어떤 정치가나 언론인, 도덕주의자들보다도 더 많은 것을 전해준 사람이 디킨스”라고 말한 데에도 이 작품에 대한 찬사가 깔려 있다. 흥미로운 대목은 극과 극의 평가가 나았다는 점. “우습기 짝이 없고 불쾌한 소설”이라는 혹평(미국 평론가 에드윈 휘플)도 적지 않았다. 왜 평가가 엇갈렸을까. ‘산업 소설’이어서다. 어떤 소설보다도 당시의 산업사회를 그려냈기에 비평가들이 갖고 있는 자본에 대한 생각에 따라 평가가 달랐다. 영국이 산업혁명을 이뤄냈다는 자부심으로 유리궁전(수정궁)에서 만국박람회를 개최(1851)해 국력을 뽐내던 시절, 물질문명은 끝없이 발전할 것이라는 믿음이 지배하던 시기에 디킨스는 도시의 이면과 산업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담았다. 디킨스의 작품 중에서 유일하게 런던이 아닌 곳을 무대로 삼은 이 작품의 배경 도시는 코크타운. 맨체스터를 모델로 삼은 가상의 도시인 코크타운을 디킨스는 이렇게 그렸다. “코크타운은 붉은 벽돌의 도시였다. 아니, 매연과 재만 아니라면 붉은 벽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야만인의 얼굴에 페인팅을 한 것처럼 붉은색과 검은색이 부자연스럽게 섞인 도시가 되었다. 가히 기계의 도시라 부를 만했다. 공장의 높은 굴뚝에서는 매연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끊임없이 솟아나왔다. 도시에는 검은 운하가 있었고, 악취 풍기는 염료가 흐르는 자주색의 강이 있었다. …(중략)… 증기기관의 피스톤은 마치 미친 코끼리가 머리를 까닥이듯이 단조롭게 위 아래로 움직였다. 몇 개의 큰 도심은 모습이 하나같았다. 사람들은 모두 같은 시간에 오갔고 같은 도로를 지나 같은 일을 했다. 매일이 어제나 내일과 똑같았고 매년이 작년이나 내년과 다를 바 없었다” 무엇이 도시를 음울하게 만들었을까. 디킨스는 천편일률적인 공리주리식 사고방식 탓이라고 봤다. 효율만 강조하는 공장주, 학교 이사장 같은 등장인물들을 내세워 공리주의가 얼마나 인간을 황폐하게 만드는지를 그려냈다. 사실과 계산만을 강조하는 학교 교육의 요체는 ‘궁금해 하지 말라’이며 모든 판단은 계산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학생을 부를 때도 이름 대신 번호가 쓰인다. 디킨스는 편협한 통계에 의존하여 공리주의를 강론하는 영국 정치경제의 시험장으로 변한 학교와 공장 같은 사회적 감옥을 대신할 대안으로 자유정신과 우애를 제시했다. 소설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1854년 4월 1일. 디킨스가 출자한 ‘가정 잡지(Household Words)’에 연재가 시작돼 5개월 동안 이어졌다.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를 다뤄서인지 연재가 시작된 지 두 달 보름 만에 잡지 판매부수가 두 배 늘어났다. 연재가 끝날 무렵 잡지사는 이전의 5배나 되는 수익을 거뒀다. 비평가들의 뜨거운 논란 속에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이 소설을 디킨스는 두고 두고 잘 써먹었다. 전국 순회 낭독회에 모이는 청중들의 수준이 높을 경우 디킨스는 ‘힘든 나날들’을 힘주어 읽었다고 전해진다. 세대가 지나며 논란은 엷어지고 호평만 남았다. 삭막했던 영국 산업혁명에 인간의 숨결을 불어넣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디킨스가 ‘힘든 나날들’을 통해 묘사한 인구의 도시집중과 극심한 경쟁, 비인간화와 저임금, 실업과 빈곤, 계층 간 갈등이 먼 나라의 옛날 얘기로 들리지 않는다. 꼭 우리 얘기 같다. 디킨스는 인간이 지닌 감정과 상상력, 지성, 창조력, 다양성을 중시하는 교육을 대안으로 꼽았다. 디킨스가 162년 전에 제시한 처방과 한국은 정반대 방향으로 간다. 한 가지 교과서만 목을 매는 형편이니. 참으로 ‘힘든 나날들’이다. 더 힘들어질까 걱정되는 마당에 디킨스 ‘힘든 나날들’에서 들려주는 마지막 문장이 귀를 맴돈다. “독자 여러분! 여러분과 나의 인생에서 유사한 일이 벌어질지 안 벌어질지는 바로 우리, 여러분과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눈물의 알함브라...유대인 추방령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3.31 06:00:00‘빈부귀천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유대인은 모두 떠나라. 이 신성한 땅에서!’ 1492년 3월 31일, 스페인이 내린 유대인 추방령(Alhambra Decree·알함브라 칙령)의 골자다. 시한은 7월.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자행한 홀로코스트(학살) 이전까지 유대인 유랑사의 최대 비극으로 꼽히는 이 사건은 국제질서는 물론 세계 경제사의 흐름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추방령의 명분은 종교. ‘가톨릭 신앙의 해악인 유대인을 쫓아낸다’는 구실을 내걸었다. ‘유대인에게 관용을 베풀었음에도 사악한 신앙과 음탕한 관습, 율법을 고집하며 성스러운 기독교에 해악과 오욕을 끼쳤기에 추방한다’는 명령을 접한 유대인 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세상이 변했어도 스페인 왕국이 자신들을 계속 활용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적극적으로 스페인 왕국을 도운 유대인도 적지 않았다. 스페인의 생각은 달랐다. 무엇보다 자신감에 넘쳤다. 해가 바뀌자마자 이베리아반도(스페인땅)에 남아있던 마지막 이슬람 국가인 그라나다 왕국을 몰아낸 상황. 좌고우면할 게 없었다. 이슬람교를 믿는 북부아프리카의 베르베르족에게 이베리아반도를 통째로 내준 게 서기 711년. 야금 야금 실지(失地)를 회복해 무려 781년 만에 완전히 땅을 되찾고 로마 교황으로부터 ‘가톨릭의 수호자’라는 영예까지 받은 스페인(실은 페르디난도 2세와 이스벨라 여왕의 정략결혼으로 탄생한 아라곤과 카스티야의 연합왕국)은 기독교 정복자로서 이교도 색출과 추방에 전력을 기울였다. 종교적 열망을 앞에 세운 추방령 뒤에는 경제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전장을 누벼온 기사들을 포상할 땅과 재화를 돈이 많은 유대인에게서 빼앗자는 것. 알함브라 칙령에 딸린 단서 조항이 그 증좌다. 스페인은 칙령에 ‘유대인의 모든 재산권을 인정하고 보호하며 유대인은 동산과 부동산을 자유롭게 처분해 나라 바깥으로 반출할 권리를 갖는다’고 명시하면서도 ‘금과 은, 화폐를 비롯해 국가가 정하는 품목은 반출을 금지한다’는 부칙을 달았다. 금과 은, 보석은 물론이고 ‘국가가 정하는 품목’의 반출 금지령은 약탈의 다른 이름이었다. 집과 농지 같은 부동산을 들고 갈 수도, 그렇다고 매각한 대금을 금화나 은화로 바꿀 수도 없었던 유대인들은 결국 재산을 모두 잃고 스페인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추방 당한 유대인은 얼마나 됐을까. 5만 가구에 25만명이 정설이지만 10만명에서 80만명까지 해석이 다양하다. 분명한 사실은 당시 유럽에서 유대인이 가장 많이 살던 지역이 바로 스페인이었다는 점이다.* 유대인을 추방한 스페인은 경제가 펴졌을까. 천만에. 그 반대다. 경제가 휘청거렸다. 유대들이 한꺼번 땅과 집이며, 금과 은, 보석을 헐값에 내놓고 반출이 가능한 옷가지나 식량을 사들였으니 물가가 오를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같은 해 10월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아메리카에서 은이 쏟아져 들어오며 물가 상승세는 현상으로 굳어졌다. 스페인 제국은 16세기 이후 물가 상승에 시달렸다. 가장 심각한 큰 문제는 전문 인력 부족. 유대인이 맡아온 행정과 상업을 대신할 인력이 없었다. 유대인 추방 뒤에는 농업을 담당해온 이슬람 교도까지 쫓아내 스페인 제국은 안에서 멍들어갔다. 이슬람 정복 과정에서 공을 세우지 못한 젊은이들은 일확천금을 꿈을 안고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갈 뿐, ‘근면한 노동=무능력’으로 간주되는 사회 풍토 속에서 내실 있는 성장은 애초부터 물 건너 갔다. 온갖 전쟁을 마다하지 않고 끼어든 국가적 호전성 역시 스페인을 벼랑으로 밀었다. 신대륙의 원주민을 강탈한 막대한 금은보화를 들여오고도 스페인은 끝내 세계사의 주류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추방 당한 유대인들은 어떻게 됐을까. 스페인계 유대인, 즉 세파르딤(Sephardim)의 30%는 이때 굶어 죽거나 노예로 팔렸다. 살아남은 자들의 주류는 크게 두 가지 경로를 밟았다. 가장 많은 유대인을 받아준 나라는 오스만 튀르크. 오늘날 모로크와 알제리 지역을 비롯한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국가에도 수만명이 건너갔다. 추방 유대인이 이슬람 국가들에 많이 정착했다는 사실은 유대인에 대한 이슬람의 관용을 확인시켜주는 대목이다. 두 번째 집단은 인접국가인 포르투갈을 택했던 사람들로 1인당 1두가트에 해당하는 금이나 물품을 내고 포르투갈을 정착지로 삼았다. 활발한 해양 탐구와 식민지 개척으로 돈이 궁했던 포르투갈은 돈 때문에 유대인을 받아들였으나 얼마 안지나 종교적 이유로 스페인의 뒤를 따랐다. 포르투갈을 떠난 유대인들의 다음 행선지는 이탈리아나 네덜란드. 종교적 관용이 있었던 네덜란드는 마침 황금기를 맞던 시기여서 유대인들에게 각종 기회를 안겨줬다, 평생을 곤궁하게 생활했으나 학문적으로는 대성했던 스피노자도 이런 경로를 밟았던 유대인의 후손이다. 네덜란드의 유대인들은 영국의 명예혁명과 함께 대거 잉글랜드로 이주해 새로운 세상에서 꿈을 펼쳤다. 경제학자 리카도와 영국 총리를 지낸 벤자민 디즈레일리 등의 조상이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또는 이탈리아를 거쳐 영국에 유입된 세파르딤(스페인계 유대인)이다. 가장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사람들은 위장 개종을 통해 눌러앉았던 5만여명의 유대인. 알함브라 칙령에 명시된 대로 ‘추방 기한 이후에도 머물러 있거나 되돌아오는 유대인, 잠시라도 방문하는 유대인은 통상적 법 집행 절차 없이 극형에 처한다. 그 재산은 국고에 귀속된다’는 으름장대로 계속되는 색출작업에 사로 잡혀 처형 당하거나 마땅한 선박도 없이 탈출하다 바다에 빠져 죽었다. 만약에 스페인 제국이 유대인과 이슬람 교도들을 추방하지 않았다면 역사를 어떻게 흘러갔을까. 편협한 종교 이데올로기가 대중의 광적인 열광을 이끌어내고 종교와 정치 지도자들은 포퓰리즘에 근거한 권력의 을 공고히 다졌는지 모르겠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잘못 쌓거나 설계가 부실한 성은 잠시 화려할 수는 있어도 결국 무너지기 마련이다. 524년 전 유대인 추방령이 오늘날 우리에게 묻는다. 끊임없이 전쟁을 치르려는 나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가. 신념과 종교, 나라와 피부, 학교와 고향이 다르다고 마음 속에서 누구를 차별하거나 추방한 적은 없는가./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 유대인이 스페인에 많았던 이유는 세 가지로 풀이된다. 첫째, 스페인 지역은 로마가 가장 먼저 식민화하고 본토와 같이 대우한 곳이어서 유랑 민족에게도 기회가 많았다. 두 번째 이유는 구약성서와 연관이 있다. 유대 국가가 멸망할 즈음 유대인 랍비들이 구약성서의 12예언서 가운데 하나인 오바댜서 1장 20절에 나오는 “…예루살렘에서 스바랏으로 잡혀갔던 사람들은 남쪽 유다의 성읍을 차지할 것”이라는 구절의 ‘스바랏은 바로 에스파냐 지역이라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고향에 돌아갈 꿈을 안고 모여든 것. 세 번째 이유는 이슬람의 관용에 있다. 로마 멸망한 이 지역에 들어선 서고트 왕국에게 박해받았던 유대인들은 새로운 지배자인 이슬람 왕국으로부터는 차별받지 않았다. 심지어 고위 공직자까지 배출했었다. 그라나다 왕국의 군대의 총사령관도 한때 유대인이 맡았다. -
시칠리아의 만종…마피아?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3.30 06:00:001282년 3월 30일, 시칠리아섬 팔레르모. 도심에서 800m 떨어진 스피리또(Spirito Santo·성령) 교회 앞에서 사달이 났다. 부활절 저녁 축제에 끼어든 프랑스군의 하급 간부가 젊은 부인을 희롱하자 격분한 남편이 칼을 내리쳤다. 유부녀를 괴롭히던 프랑스군은 바로 죽었다. 군인이 대응하려는 순간 군중들이 외쳤다. ‘침략자, 프랑스군을 죽여라!’ * 싸움은 순식간에 끝났다. 교회의 마지막 종소리(晩鐘ㆍVesper)이 울릴 즈음, 상황 종료. 교회 앞의 소규모 프랑스군은 모두 칼을 맞았다. 만종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종소리와 함께 부활절을 기념하려 모였던 사람들은 밤새도록 무리 지어 다니며 점령군과 그 가족을 찾아 다니며 몰살시켰다. 이튿날 아침 동틀 무렵에는 프랑스군과 그 협력자 가족의 남녀노소 시체 2,000여구가 나뒹굴었다. 13세기판 세계대전이라는 시칠리아 독립운동(War of the Sicilian Vespers, 1282~1302)의 막이 이렇게 올랐다. 왜 세계대전인가. 당시 유럽인들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여겼던 지중해를 낀 이탈리아와 스페인은 물론 프랑스와 독일지역 국가들, 비잔틴 제국에 교황청까지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20년간 동안 이어질 독립전쟁의 서막인 만종의 봉기에서 시칠리아인들은 확실한 승기를 잡았다. ** 독립군은 만종의 봉기 6주 만에 메시나 항구를 제외한 시칠리아 섬 전체를 손에 쥐었다. 교황의 지원을 받아 14년 전부터 시칠리아를 점령,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으로 군림해온 프랑스 앙주 가문의 샤를 1세는 얼마 뒤 메시나 항구까지 잃었다. 전력을 다해 키워온 함대도 이때 불탔다. 앙주 가문은 당시 서유럽 최고의 해양 세력 중 하나. 프랑스와 이탈리아 남부 뿐 아니라 알바니아와 예루살렘, 아프리카 튀니스까지 지배하던 해군력을 동원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켜 동서 로마교회를 통합하겠다던 샤를 1세의 야망도 꺼져버렸다. 함대까지 몽땅 잃어버린 샤를 1세의 보복이 두려웠던 시칠리아인들은 이전의 지배가문이었으나 연전연패로 대가 끊어진 독일 호헨슈타우펜가의 방계 가문인 스페인 아라곤 왕국에 도움을 청했다. 아라곤은 함대와 병력을 보냈다. 점점 커진 싸움은 교황과 프랑스, 시칠리아, 아라곤, 이탈리아 북부 도시국가, 비잔틴제국이 끼어드는 국제전으로 번졌다. 시칠리아 독립전쟁은 발발 20년 만에 아라곤의 시칠리아 통치를 인정하는 선에서 끝났지만 서구세계는 십자군 전쟁이라는 동력을 잃었다. 이슬람과의 전쟁에 투입될 주요 국가들이 반목했기 때문이다. 흥미를 끄는 대목은 시칠리아 독립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프랑스 앙주 가문이 아니라 따로 있다는 주장. 교황청의 권위가 이때부터 약해졌다는 것이다. ‘포린 폴리시’지에 의해 2011년 ‘100대 사상가’의 한 사람으로 꼽혔던 로버트 카플란은 저서 ‘지중해 오딧세이(원제 Mediterranean Winter)’를 통해 시칠리아 독립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바티칸이라고 강조한다. 국가나 영주가 면종복배하면서 교황청이 갖는 권위가 흔들려 아비뇽의 유수 같은 사건이 일어나고, ‘분열과 환멸이 더욱 커져 종국에는 종교개혁이라는 대사건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봉기를 일으킨 시칠리아 사람들은 편해졌을까. 모를 일이다. 다만 추론할 수 있는 점은 하나 있다. 시칠리아 주인은 더욱 많이 바뀌고 생존을 위한 눈치 보기도 더욱 심해졌다는 추정이다. 화산섬으로 비옥했던 시칠리아는 오랜 옛날부터 강대국들의 이해가 첨예하게 맞붙었던 지역. 예수 탄생 훨씬 이전부터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들과 페니키아의 세력 각축장이었고 로마와 카르타고간 포에니 전쟁의 원인이자 무대였다. 로마제국의 식량 창고 노릇이 끝난 뒤에는 비잔틴제국의 소유물이었다가 이슬람 교도들의 사라센 제국 통치를 거쳐 바이킹의 지배까지 받았다. 독일 호헨슈타우펜 가문과 프랑스 앙주 가문의 뒤를 이어 독립전쟁 덕분에 시칠리아의 통치자로 나선 스페인의 아라곤 왕국 이후에도 이탈리아 사보이 왕국, 스페인, 나폴레옹의 프랑스, 이탈리아 통일까지 수많은 나라의 지배를 받으며 시칠리아에는 살아남기 위해 눈치 보기와 네트워크라는 독특한 문화가 자리 굳혔다. 가족을 중시하는 이탈리아에서도 가족 중심으로 단결해야만 살아남는다는 의식이 시칠리아만큼 강한 곳은 없다. 가족과 친족간 네트워크로 시작했다가 기업형 범죄 조직으로 커진 미국 마피아의 여명기를 시칠리아 출신 5대 패밀리가 주도했다는 점도 시칠리아의 역사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마피아가 만종의 봉기로 촉발된 독립전쟁기에 비롯됐다는 시각도 있다. ‘이탈리아는 외친다, 프랑스에 죽음을!(Morte alla Francia!, Italia anela)라는 구호의 단어 첫 철자 조합에서 마피아(MAFIA)라는 용어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 사건이 어떻게 시작됐는지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 몇몇 책자가 있지만 구전에 의한 것이어서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젊은 부인을 희롱한 프랑스군을 남편이 칼로 살해하자 프랑스군이 교회 앞에 모인 군중들을 도륙해 이 소식이 퍼져 봉기가 발생했다는 설부터 점령군인 프랑스군을 몰아내기 위해 고도로 기획된 음모가 있었다는 설까지 다양한 구전이 있다. 봉기의 낌새를 알아챈 프랑스군이 무기를 수색한다며 여성들의 가슴을 더듬자 남자들이 더욱 분노하고 단합했다는 얘기도 있다. 공통점은 두 가지다. 프랑스군의 여성 희롱과 시칠리아인들의 분노. 프랑스의 시칠리아 점령 정책이 예전의 지배자처럼 온건했다면 만종의 봉기는 발생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악행이 피의 대가를 부른 셈이다. ** 1855년 프랑스 파리에서 초연된 구세페 베르디의 그랜드 오페라 ‘시칠리안인들의 만종(Les vepres siciliennes)’은 부활절의 봉기 사건과 주요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열띤 호응을 받았다. *** 마피아의 유래와 어원에 대해서도 수많은 풀이가 있다. 의적이나 독립투사, 또는 마을의 현자에서 비롯됐으며 처음에는 선의의 사례비가 훗날 보호비 갈취 등으로 변질됐다는 해석이 유력하다. 시칠리아의 마피아가 가장 어려웠던 시절은 뭇솔리니 집권기. 마피아를 극도로 증오했던 뭇솔리니에 의해 감옥에 대거 갇혔던 마피아는 연합국의 진군에 협조하며 다시 살아났다. 전후에도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이탈리아에서 좌파의 득세를 막기 위해 마피아 조직이 기독민주당을 지원하는 구도를 만들었다. 오늘날까지 이탈리아 정·재계에 뿌리 깊게 남아 있는 마피아와 유착관계는 전통과 전후 처리가 만난 결과물이다. -
베네치아 게토 500주년, 새로운 증오가 자란다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3.29 06:00:291516년 3월 29일, 국가 원수 레오나르도가 주재한 베네치아 의회가 특이한 법령 하나를 통과시켰다. ‘유대인 거주 제한에 관한 법’. 세계 최초로 법으로 강제되는 유대인 거주지역은 곧 베네치아 게토(Venezia Ghetto)라는 이름이 붙었다. 베네치아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운하로 갇힌 섬에 격리 수용됐는데, 과연 민족에 대한 차별과 거주 제한은 이때가 처음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동서고금을 통해 외국인 구역은 어디에나 있었다. 전쟁 포로와 그 가족은 물론이고 평시에도 상관(商館)을 중심으로 외국인 집단 거주지가 존재했다.* ‘상인들의 공화국’, ‘최초의 자본주의 국가’라는 베네치아도 마찬가지. 베네치아는 터키와 독일·페르시아·아르메니아·알바니아·그리스·크로아티아인들의 거주구역을 별도로 운영했다. 특히 그리스와 독일, 터키인 거주구역은 유대인 구역보다 먼저 생겼다. 베네치아 의회는 1314년, 독일인들의 탈세를 막기 위해 한 건물에 집단 수용한 적도 있다. 최초의 격리시설이 아닌데도 베네치아 게토가 특별하게 기억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중세 이후 유대인 박해의 상징이며 현대 사회에 이르러서는 유대인 뿐 아니라 미국 유색인종 차별을 비롯해 수많은 차별과 격리의 용어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게토’의 어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인연을 끊겠다는 뜻을 통고하는 문서(絶緣狀)’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get’과 채석장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케토’의 뜻이 묘하게 합쳐져 돌을 떼 낸 장소에 유대인을 집어넣어 관리하며 지역 이름으로 굳어졌다는 설이 첫번째. 주물공장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게타레에서 파생됐다는 해석도 있다. 분명한 사실은 ‘게토=유대인 거주구역’으로 굳어졌다는 점인데 왜 하필 베네치아였을까. 우선 베네치아 게토는 오래 갔다. 나폴레옹에 의해 베네치아 공화국이 1797년 멸망할 때까지 존속하며 유럽 각지에 생긴 게토의 공식적인 원형이 베네치아 게토다. 갯벌에 건설된 물과 운하의 도시답게 격리가 쉬웠던 점도 베네치아 게토의 특징. 다리 두 개만 통제하면 베네치아 게토는 외부와 연락이 끊겼다. 베네치아가 게토 구역을 설정한 이유도 복합적이다. 첫째, 유대인의 숫자가 통제 가능한 수준 이상으로 많아졌다. 1492년 스페인이 유럽의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물리친 레콩키스타를 완성한 직후에 발동한 유대인과 이슬람교도 추방령으로 베네치아에 유대인들이 많아졌다. 두 번째 이유는 유대인 보호. 서유럽에서 가장 유대인에게 우호적이었던 이곳에서조차 아그나델로 전투 이후부터 반유대 정서가 들끓었다. 1509년 벌어진 아그나델로 전투는 로마교황청과 신성로마제국, 합스부르크 왕가 등 온 유럽이 캉브레 동맹군이라는 이름으로 베네치아군을 박살 냈던 전투. 패전으로 상실감에 젖은 베네치아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배반한 유대인과 함께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노하셨고 전쟁에서 졌다’는 선동이 먹혀들어갔다. 베네치아 공화국 입장에서 유대인을 버리는 것이야 어렵지 않았으나 문제는 돈. 유대인들이 내는 특별세금이 아쉬운 마당에 ‘경제와 보호’를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조합이 바로 ‘운하로 격리된 섬, 게토’였다. 유대인들은 불만이었어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추방보다는 격리가 나았으니까. 역설적으로 게토는 유대문화를 보다 잘 보존하는 결과를 낳았다. 일부 랍비들은 베네치아와 통하는 다리가 아예 없어져 완전 차단되기를 바랐다고 전해진다. 결국 일반 대중의 유대인에 대한 멸시와 질시를 막아주고 세금도 받아낼 수 있는 일거양득의 장치인 게토는 전 유럽으로 퍼졌다. 서유럽에서는 프랑스 혁명의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이 전해진 이후 19세기까지 존속하고 러시아와 동유럽에서는 20세기 중반까지 명맥을 이어나갔다. 유대인의 처지도 크게 바뀌었다. 인구는 여전히 적어 세계의 0.5%에 불과하지만 역대 노벨상 수상자의 4분의1 이상을 배출하고 막강한 자금을 지구촌 정세를 쥐락펴락한다. 어쩌면 유대인의 저력도 보호지이면서도 제약의 장소였던 게토에서 싹텄는지도 모른다.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유대인 게토가 세워진지 꼭 500주년. 오늘날 게토는 완전히 없어졌을까. 그렇다. 적어도 유대인 게토는 사라졌다. 문제는 무수히 많은 게토가 움텄다는 점이다. 역(逆) 게토까지 생겨났다. 뿔뿔이 흩어졌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2,000여년 만에 돌아와 건국한 이스라엘 국가가 자행하는 팔레스타인 차별과 격리는 반 인륜의 수준을 넘어섰다. 21세기 중동의 게토에서는 차별을 자양분 삼아 또 다른 증오의 씨앗이 자라고 있다. 뿐이랴. 뉴욕의 흑인 게토와 한국 땅의 외국인노동자 게토까지, 게토 천지의 세상이다. 마음 속의 게토는 또 어떤가. 지역과 학벌, 소득 수준에 따라 사람이 사람을 구별하는 왜곡된 심리 구조를 어린 아이들마저 고스란히 물려받고 있다. 같은 반 친구가 사는 임대아파트의 이름과 거지를 합성해 아무렇게나 ‘휴거’라고 부르는 10살 안짝의 아이들이 그대로 성장한 이 나라의 미래가 두렵다./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 기원전(BC) 4세기가 배경인 플라톤의 ‘국가(Politeia)’도 아테네에 세금을 냈으나 시민권은 없던 거류민 지역의 외국인 ‘케팔로스’의 집이 토론 장소다. 해상왕 장보고가 중국 당나라에 세운 신라방과 신라촌도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이스탄블)이 함락(1453)될 당시에도 제노아인, 라틴인(베네치아인)은 각기 구역에서 거주했었다. 13세기 중반 영국 런던에 조성된 독일 한자동맹 상인들의 거주지이자 무역장소인 스틸야스(Steeelyard)는 19세기까지 존속했다. -
쓰리마일 원전 사고의 두 얼굴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3.28 06:00:291979년 3월 28일 새벽 4시,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쓰리마일 섬. 원자력 단지에서 경보가 울렸다. 가동 4개월째인 2호기의 냉각수 급수 펌프 파손! 서스퀘해나 강의 냉각수로 식었어야 할 원자로 온도가 2,200℃까지 치솟으며 노심 내 연료봉이 녹아버렸다. 대규모 인명 피해를 우려한 펜실베이니아 주 당국은 주민들을 대피시켰다. 다행스럽게도 인명 피해는 없었다. 발전소 근무자 200여명이 병원 진단을 받은 정도다. 방사능 물질이 다섯 겹으로 차단된 격납 건물 안에 갇혀 환경 피해가 전무하다는 공식 발표가 나왔지만 미국은 충격에 빠졌다. 새로 건설한 원전의 설계 결함이 원인이라는 보도가 나오고 비슷한 원자로도 많았기 때문이다. 피해도 컸다. 원전 건설 비용만 20억 달러. 원자로 해체 작업에도 10억 달러가 들어갔다. 사고 진위 공방전도 일어났다.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국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사고 직후 쓰리마일 섬을 방문해도 환경단체들은 정부 발표를 믿지 않았다. 발표와 달리 가축 피해가 발생했고 암 발생률도 높아졌다는 자료를 내밀었다. 논란은 요즘도 계속되고 있다.* 분명한 점은 두 가지. 강도 높은 안전대책이 강구되고 미국의 신규 원전 건설이 크게 위축됐다는 사실 뿐이다. 먼저 방대한 원전 규제대책이 나왔다. 백악관과 상원, 미국 원자력위원회 등 5개 조사위원회가 별도로 사고 원인을 분석·조사한 결과다. 결국 미국은 기존에 건설 승인이 났거나 건설 중인 원전을 제외하고는 원칙적으로 신규 원전 건설을 중단해 버렸다. 석유 가격도 뛰었다. 마침 이란의 이슬람 혁명으로 중동산 석유공급이 줄어들던 시점에서 원전의 추가 건설마저 물 건너갈 것이라는 전망 속에 세계는 2차 석유 위기의 한복판으로 끌려 들어갔다. 원유 소비국인 한국의 받은 타격은 더욱 컸다. 쓰리마일 사고 이듬해 성장률이 마이너스 상태로 떨어졌으니까.** 다만 한국은 뜻하지 않은 소득을 거뒀다. 안전 기준이 까다롭고 규제를 상대적으로 많이 받는 미국에서 갓 건설된 원전마저 사고를 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인식한 각국은 원전 건설 계획을 줄이거나 접었다. 1977년에 고리 1호기의 상업운전을 시작했던 한국은 박정희 대통령이 ‘20세기 말까지 원전 44기를 짓겠다’고 공언했던 터. 세계 최대의 시장으로 떠오른 한국에는 원자로를 판매하려는 각국의 비즈니스맨들로 붐볐다. 경북 울진에 세워진 한국 9호기와 10호기의 원자로 공급을 미국 회사가 아닌 프랑스 프라마톰사로 굳어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프랑스는 당시 파격적인 가격을 제안하는 당근책과 함께 ‘프랑스 원자로를 구매하지 않을 경우 북한과 수교하겠다’는 으름장을 동시에 사용, 결국 승리를 따냈다.*** 미국의 원전 회사들은 더욱 몸이 달았다. 뒷마당으로 여겼던 한국에서 프랑스와 캐나다 원전사들이 잇따라 수주하자 기술 제공의 차원을 높였다. 오늘날의 한국이 원전 설계에서 시공, 감리에까지 기술을 습득한 데에는 기술도입선 다양화 정책과 엔지니어들의 노력과 더불어 쓰리마일 섬 원전 사고의 반사이익이 깔려 있다.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쓰리마일 섬 원전 사고가 났을 때, 한국은 물론 일본까지 “우리의 원전은 미국의 쓰리마일 섬 원전과 다르다”며 안전성을 강조했다. 1986년 구소련 우크라이나 지역 체르노빌에서 사상 최악의 원전 참사가 발생했을 때도,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후쿠시마 원전이 사고를 일으켰을 때도 우리의 반응은 마찬가지다. 우리 원전은 다르다. 과연 그런가. 원전은 수 많은 얼굴을 갖고 있다. 미국에서는 상업용 원전의 건설이 다시 고개를 드는 분위기다. 어떻게든 관련 기술을 유지하면서 안전관리에 만전을 기해야 하는 게 원전이다. 우리의 현주소는 어느 것도 만족스럽지 않다. 원전 마피아가 판치고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이 남은 일본 농산물, 어류 수입이 끊이지 않는 판이니…./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 쓰리마일 원전사고가 의도적으로 부풀려졌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고유가를 극복한다고 원전을 건설하면 큰 재앙이 올 수도 있다’는 주장과 비판의 배후에 석유 메이저들이 있다는 것이다. 기름의 수요가 많으면 많을수록 돈 버는 석유회사들이 ‘원전은 위험하다’는 사고를 확산시키려 홍보예산을 지출한 정황이 곳곳에 나온다. 심지어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반의 유럽을 휩쓴 ‘반핵’ 데모에도 국제 석유 메이저가 뒷돈을 댔다는 기록도 있다. 그만큼 석유메이저와 원자력은 상극이었다. ** 혹자는 1980년의 경제 후퇴가 ‘박정희 대통령 서거’ 때문이라고 강조하지만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가장 큰 것은 2차 석유 파동이었고 한국은 유달리 심하게 그 영향을 받았다. 정부와 서울시의 재정을 집중 투자했던 서울 강남의 대로에 ‘테헤란로’라는 이름을 붙일 만큼 공들인 국가, 원유의 주요 공급선이던 이란에 회교 혁명이 일어나 원유 수급조차 어려운 처지였다. *** 울진에 건설된 9,10호기의 공급자가 최종 결정된 시기는 1980년이나 1979년 6월께 이미 프랑스와 최종 합의 단계였다. 미국은 핵 폭탄을 제조하려는 박정희 대통령이 프랑스가 건설할 원자로에서 우라늄을 농축할 것이라는 의심을 품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
‘자연에 순응하라’-데이턴 대홍수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3.25 06:00:00성직자 한 분(라이트 형제의 아버지)*이 ‘노아의 홍수 다음의 대홍수’라고 절규한 물난리가 있다. 데이턴 대홍수(Great Dayton Flood).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20세기 초 발생한 홍수다. 수십만씩 죽어 나간 다른 재앙보다 규모는 작지만 특별하게 기억되는 이유가 있다. 체계적인 방재 시스템과 함께 교훈을 줬기 때문이다. ‘물의 흐름은 자연에 맡기라’는. 데이턴 대홍수의 재앙은 하나씩 하나씩 잔인하게 찾아왔다. 화창한 봄 날씨에 불쑥 비가 내리고 폭풍이 불었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자 땅이 얼어붙어 강물은 지표면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급류로 바뀌었다. 나흘째 폭우가 계속되던 1913년 3월 25일 자정, 데이턴시 경찰은 긴급 대피 사이렌을 울렸다. 근심에 젖어 있던 시민들은 한밤을 찢는 경적음에 집에서 뛰어 나왔다. 불어난 마이애미 강물은 곧 제방을 넘어 도시 남쪽 금융가를 삼켰다. 대피 명령이 발동된 지 90여 분이 지난 이튿날 새벽 1시 30분께, 불어난 강물은 유실된 제방을 타고 도심을 덮쳐 빌딩의 3층 높이인 6.1m까지 차올랐다. 재앙은 물에서 그치지 않고 불도 불렀다. 가스관이 터지며 물에 잠기지 않은 도심 대부분이 불탔다. 물이 빠져나간 27일, 번영하던 신흥도시 데이턴에는 폐허만 남았다. 폭우가 내린 엿새 동안 나이아가라 폭포가 한 달 동안 떨어트리는 만큼의 강물에 휩쓸렸다는 데이턴시는 인명 피해도 컸다. 362명이 죽고 가옥 2만 여채가 파괴돼 수재민 6만 5,000명이 추위와 공포에 떨었다. 피해액은 1억 달러(요즘 가치 104억 달러; 비숙련공 임금 상승분 기준)에 이르렀다. 수마(水魔)는 데이턴시 뿐 아니라 오하이오주 전역과 인접한 인디아나주도 할퀴었다. 작은 피해를 입은 주까지 합쳐 20개 주의 사망자 합계가 650명 이상에 수재민 25만 가구, 총 추정 피해액 3억 3,300만 달러(요즘 가치 346억 달러). 데이턴의 재앙은 이전까지 세계최대의 수해로 90만~20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1887년 중국 황하 대홍수에 비하면 대(大)를 붙이기도 힘든 조족지혈이었으나 미국인들의 놀라움은 컸다. 미국 최대 수해인 1889년 펜실베이니아주 존스타운 홍수(2,209명 사망) 이래 최대 피해였다.** 데이턴 대홍수는 혁신도 가져왔다. 데이턴 지역의 금전등록기 생산업체이던 NCR의 사장 패터슨에게는 기사회생의 기회를 안겨줬다. 비가 쏟아지자 패터슨은 직원들에게 급히 보트와 빵을 만들라고 지시했는데 결과적으로 ‘신의 한 수’였다. 제방이 무너진 날 NCR 직원들은 급조한 275대의 보트와 2,000여개의 빵으로 이재민 수천여명을 구해냈다. 패터슨은 의용소방대와 적십자 단체, 현장 기자단에게 NCR 본사를 숙소 겸 사무실로 제공, 용기와 선행의 주인공으로 전국적인 뉴스를 탔다. 마침 패터슨은 깡패를 동원해 경쟁기업주를 위협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직후였으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패터슨과 임직원들의 죄를 모두 사면해줬다. 고무된 패터슨은 비에 젖은 금전등록기를 전액 보상하면서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하는 기반을 굳혔다.*** 데이턴이 고향이자 근거지였던 라이트 형제도 기회를 얻었다. 비행기를 타고 광범위한 피해 지역을 담은 필름의 해상도나 시각은 이전까지의 보도, 기록사진과 격이 달랐다는 평가 속에 항공사진의 시대가 활짝 열렸다. 가장 큰 변화는 데이턴 플랜. 재해를 당한 시민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의 경고를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1795년 도시를 설계할 때 ‘반복될 수해를 조심하라’는 경고대로 10년 단위로 물난리를 겪어온 터. 오하이오주는 데이턴시에 퍼부었던 비의 1.4배가 와도 견딜 수 있는 재해방지 시스템 구축에 나섰다. 근본은 물길을 자연에 맡기자는 것. 1914년 오하이오주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자연보존법령을 통과시켰다. 인공 운하를 파기보다 철도를 이용하고 댐은 홍수 조절용에 국한한다는 데이턴 플랜은 지금까지도 치수계획의 모범으로 꼽힌다. 미국 동남부의 자랑거리이며 관광자원이라는 마이애미 자연보호구역도 이때 생겼다. 운송정책도 크게 바뀌어 가뜩이나 철도에 밀리던 오하이오 운하가 완전 폐쇄됐다. 다른 주도 뒤따라 인공 운하를 버렸다. 102년 전 데이턴 대홍수는 인공 물길의 폐해를 알린 경고장이었던 셈이었는데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 땅에서는 4대강 사업의 재정 낭비와 자연 환경 파괴 논란이 그치지 않으니./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 비행기를 처음 날린 라이트 형제의 아버지 밀턴 라이트(Miton Wtight) 주교. 독일 개혁종파에서 비롯된 미국 복음교파의 하나인 그리스도 형제 연합교회(Church of the United Brethren in Christ)의 주교로 데이턴 대홍수에서 살아남아 ‘노아의 홍수 이래 두 번째’라는 말을 남겼다. ** ‘데이턴 대홍수’는 ‘노아의 홍수 다음의 대홍수’가 아니라 기록된 인명 피해 기준으로는 115번째 대홍수에 해당된다. 가장 큰 수해 기록은 1931년 중국에서 연쇄적으로 발생한 중국 대홍수는 250만~400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 최악의 물난리는 1925년 을축년 물난리(사망 697명) 1972년 8월 서울 대홍수(사망 529~672명)가 꼽힌다. 북한에서도 2006년 대홍수로 844명이 목숨을 잃었다. 연료 부족에 따른 삼림 파괴로 수해 피해가 더욱 커졌다. *** 패터슨은 명성을 얻은 뒤 반독점법 위반 판결의 흔적을 지우고 싶었는지, 주요 임원들을 잘랐는데 그들 중 하나가 영업 부사장 톰 왓슨. NCR에서 쫓겨난 왓슨이 세운 회사가 IBM이다. -
성직자의 죽음, 로메오 대주교 피살
오피니언 사내칼럼 2016.03.24 06:00:491980년 3월 24일 밤, 엘살바도르의 수도 산살바도르. 성찬 미사가 집행되던 ‘신의 섭리’ 병원 부속예배당에 난입한 괴한 4명이 M-16 자동소총을 갈겨댔다. 성배를 막 들려던 순간 총탄을 맞은 오스카 로메로(Oscar Romero) 대주교가 쓰려졌다. 급히 출동한 구급차로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숨이 끊긴 뒤였다. 향년 63세. 세계의 주요언론은 이를 톱뉴스로 다뤘다.* 국명 자체가 ‘구세주’라는 뜻을 갖고 있는 나라, 국민의 90% 이상이 가톨릭을 신봉하는 엘살바도르 교회의 최고지도자 로메로 대주교를 도대체 누가 죽였을까. 살인자들의 정체는 바로 밝혀지지 않고 미궁에 빠졌다. 정권을 장악한 군의 조직적 은폐 시도 탓이다. 범인들의 정체는 훗날에야 밝혀졌다. 권력의 사주를 받은 극우파 예비역 장교들의 소행. 중남미 국가들의 군인들을 교육시킨 미국 군사학교(School of Americas) 출신이어서 미국도 방조 혐의를 의심받았다. 로메로 대주교는 남미를 휩쓸던 해방신학의 신봉자였을까. 아니었다. 되레 반대다. 신학교 시절부터 모범생이었고 온건한 학자 스타일인 그는 사회 정의나 현실 비판보다는 알코올과 마약, 음란물 추방에 관심을 쏟았던 보수성향의 성직자였다. 사회 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시기는 1977년 2월 대주교 서품 이후부터. 날로 심해지는 빈부 격차와 내전으로 죄 없는 사람들이 무참하게 살해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고는 억압받는 이들 편에 섰다.** 몇몇 지주 가문과 결탁한 군사정권이 국민을 탄압하는 현실에 적극적 민권운동에 나선 그는 1979년 노벨평화상 후보로도 거론됐으나 군사정권에는 ‘눈엣가시’였다. 카터 미국 대통령에게 군사독재를 지원하지 말라는 편지를 보내고,*** 암살 당하기 하루 전에는 병사들에게 ‘신의 뜻을 받들어 인간의 기본권을 말살하는 정부의 진압명령을 거부하라’고 강론해 군부의 분노를 자아냈다.**** 피살 6일 뒤에 열린 장례식에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인파 25만명이 몰렸으나 여기에서조차 폭탄이 터져 40여명이 죽거나 다쳤다. 로메로 대주교 피살로 본격화한 엘살바도르 내전은 1992년에야 가까스로 멈췄다. 로메로 대주교 피살 36주년. 낮은 곳의 사람을 사랑했던 그가 소망했던 두 가지 꿈 가운데 하나를 이뤘고 하나는 아직 못 이뤘다. 생전의 로메로 주교는 침대에서 선종하지 못할 것이라는 주변의 우려에 ‘그들이 나를 죽인다 해도 나는 민중 안에서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그대로 됐다. 그를 기리는 날이면 사람들이 외친다. ‘대주교님은 우리 가운데 살아 있다.’ 프란치스코 로마 교황은 지난해 로메로 대주교를 성인 반열에 올렸다. 이루지 못한 꿈은 엘살바도르의 상황이다. 엘살바도르는 여전히 혼미하다. 나라는 작아도 1970년대 한때 중미 최대의 공업국이었다는 지위를 상실한지 오래다. 미국 달러화를 통화로 삼는 파격적인 조치에도 경제는 살아날 줄 모른다. 해외거주자들이 보내주는 송금이 경제 운용에 큰 비중을 차지한다. 정치가 차츰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다고 하지만 나라는 여전히 양분된 상태다. 경제불안의 원인에 대해서도 목소리가 엇갈린다. 좌파는 독재와 독점의 후유증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우파는 사회불안 탓으로 돌린다. 국민들이 존경할 수 있는 종교지도자의 존재가 부럽거니와 걱정도 앞선다. 우리 사회의 분열상이 갈수록 심해져 가는 판이니까…. 과거가 현재를 잡아먹고 어린 동심마저 차별에 멍든다. 초등학생들이 급우를 ‘휴거’(임대 아파트에 거주하는 거지)라며 따돌리고 젊은이들은 ‘스펙’의 노예가 되어가는 현실. 중미의 지나간 흑역사 속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보인다./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 신군부의 눈치를 보던 한국 언론들은 이를 낮은 비중으로 다뤘다. 대부분 사회면이나 국제면의 1~2단짜리 기사로 처리했다. ** 로메로 신부가 태어날 무렵부터 엘살바도르는 국토의 대부분을 소유한 14개 유력 가문의 세상이었다. 연이어 등장한 군사정권과 결탁한 토지 가문들은 농민과 노동조합을 가혹하게 탄압, 만성적인 내전 상태를 낳았다. 엘살바도르의 유력 가문 뿐 아니라 엘리트 식자층도 특권 의식에 젖어 있었다. 오세훈 변호사(당시)와 강원택·김호기·이영조 교수 등의 공동 저술한 ‘우리는 실패에서 희망을 본다’ 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엘살바도르의 젊은 농업 장관이 암살되자 그 미망인을 대주교인 로메로가 위로하는데 미망인은 자기의 아들이 언제 세례를 받아야 하느냐고 물었다. 로메로 대주교는 ‘유아 영세는 한 달에 한 번 준다’고 대답하자 미망인이 재차 물었다. ‘어느 날에 오면 될까요?’. 대주교가 개인적으로 유아 영세를 주지 않으니 정해진 날에 오라고 대답했더니, 미망인이 날카롭게 되물었다. ‘우리 애보고 인디오 애들과 같이 영세를 받으란 말씀이세요?’. 이 일을 계기로 미망인은 로메로의 반대편으로 돌아섰다. …(중략) 라틴아메리카에는 국민은 있으되 민족이 없다. 처음에는 인디오만 차별의 대상이었으나 이제는 인종이나 신분, 처지가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일체감의 대상이 아니다. 국적이 같으니 같은 국민이라고는 생각하지만 자신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이 대목은 이영조 경희대 교수가 썼다.) *** 같은 시기에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비슷한 내용을 외신과 인터뷰해 유신 정권과 극한 갈등을 빚었다. 당시 공화당과 유정회에 의해 김 총재가 국회의원직을 제명 당한 뒤 부산 마산의 대규모 소요(부마항쟁)가 일어나고 종국에는 10.26으로 이어졌다. **** “형제들이여, 그대들도 우리들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대들은 그대들 형제인 농민을 죽이고 있습니다. 어떤 군인도 하느님의 뜻에 거스르는 명령에 복종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이야말로 그대들은 양심을 되찾아 죄악으로 가득한 명령보다는 양심에 따라야 할 때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아울러 날마다 더한 고통을 받아 그 부르짖음이 하늘에 닿은 민중의 이름으로, 나는 그대들에게 부탁하고 요구하고 명령합니다. 탄압을 중지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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