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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의 ‘조선보병대’





1931년 4월 8일 오전 10시. 구 육조거리 서울 광화문 통에서 50여명의 조선인 군대가 해산식을 가졌다. 대부분은 이 대목에서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인 군대’라니.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해산 당한 시기가 1907년, 일제가 조선인의 일본군 지원 입대를 ‘허용’한 게 1938년부터인데 1931년 서울에 조선인 부대가 존재했을 턱이 있나. 만주의 항일 독립군이라면 몰라도….

십중팔구는 이렇게 여기지만 장교와 병사 전원이 조선인으로만 구성된 부대가 있었다. 부대 명칭에도 ‘조선’이 들어갔다. 이름 하여 ‘조선보병대(朝鮮步兵隊)’. 일제가 대한제국군을 해산(1907년)한 직후 황실 보호와 퇴직군인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남겨둔 조선보병대는 서울(당시는 京城) 한 복판에서 33년 세월을 버텼다. 비록 총독부의 예산으로 움직였지만.

창설 당시 조선보병대의 병력은 837명. 근위보병대대 644명, 근위기병대 92명과 무관학교, 시종 무관부 등으로 구성됐다. 주력은 구 대한제국군 2대대. 군대를 해산할 때 총 들고 저항했던 다른 부대와 달리 일제의 명령에 순응했던 부대를 주축으로 조선왕실의 경호와 의전을 맡을 부대를 꾸렸다. 애초부터 민족의식이나 전투 의지와는 거리가 먼 군대로 태어난 셈이다.

한일병탄(1910)이 강행된 뒤에는 그나마 한 줌의 병력도 더욱 줄었다. 부대 명칭에서도 황제나 국왕을 지근 거리에서 보위한다는 뜻의 ‘근위(近衛)’가 빠졌다. 대대급 조선보병대와 중대급 조선기병대 중에서 조선기병대는 1913년께 슬그머니 없어졌다. 기병 부대는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에서다. 고종 황제가 붕어(崩御)한 1919년에는 대대급이던 조선보병대 규모마저 중대급으로 줄었다.

작은 병력이지만 조선보병대는 해마다 50~80여명씩 신병을 뽑았다. 1924년 민족계열 일간지인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를 따라가 보자. ‘장교 이하 280여명이 근무하는 조선보병대가 신병 80여명을 모집한다. 복무기간은 2년이며 자격조건은 아래와 같다. 키 5척2촌(약 158㎝) 이상, 연령 18~30세, 학력은 보통학교 졸업자나 동등학력 소지자. 이등병 급여는 월 14원이며 숙식과 피복 제공.’

면서기 월급이 20원인 시절, 어중간한 학력으로는 농사 외에 마땅한 직업도 없었던 때라 병사 모집에는 7대 1에서 10대1의 경쟁이 붙었다. 보통학교 이상 졸업자로 구성된 당시로서는 평균 이상의 고학력 군대였으나 조선보병대는 태생적으로 총을 쏠 수 없는 군대였다. 당시 동아일보에는 ‘세계 유일의 평화군대’라는 자조 섞인 기사도 종종 실렸다.

일제는 조선보병대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봤다. 망한 왕조 궁궐의 수문장 정도로 여겨 명맥을 살려줬는데 문제는 돈. 조선보병대를 유지하는 데 매년 20만원 안팎의 돈이 들었다. 일제 말기를 제외하고는 조선인 장교를 뽑지 않은 까닭에 조선보병대의 장교들은 나이 많고 계급도 높아 급여도 많이 나갔다. 1925년 급여 명세표에 실린 계급별 구성은 중장 1명, 소장 3명에 대좌(대령) 3명, 중좌 4명, 소좌 3명에 대위과 중위 각각 2명. 준위급 특무 장교 1명에 부사관급인 정교 1명, 부교 14명, 참교 7명을 뒀다. 병사들은 상등병 28명, 일등병 167명, 이등병 100명.



일제는 조선보병대 주둔지도 호시탐탐 노렸다. 조선총독부까지 번듯하게 들어선 마당에 광화문 앞 옛 육조(六曹) 거리에서도 가장 좋은 예조(禮曺) 자리(현 정부청사 터)를 차지하고 있던 조선보병대를 내쫓고 새로운 건물을 짓고 싶었다. 툭하면 시내 한복판에서 술 먹고 경관과 싸우는 조선보병대를 다른 곳으로 옮기자는 의견도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순종 황제가 영면(1926년)한 뒤부터 이런 논의는 더욱 많아졌다. 조선의 궁궐을 호위할 필요가 없어진 만큼 조선보병대 역시 폐지하거나 소대 규모로 축소하자는 방안이 나온 끝에 1930년 말께 방향이 잡혔다. 마침 미국 뉴욕 증시 대폭락(1929년)을 시발로 전 세계가 대공황에 신음하던 상황. 일제는 꺼리낌 없이 조선보병대를 해산했다.

시민들은 착잡한 심정으로 조선보병대 해산을 지켜본 것 같다. 동아일보(1930년 11월 9일자 2면)에 실린 기사의 일부에서 회한이 느껴진다. “총은 메었으되 사람은 해칠 줄 모르고 탄약갑은 찼으되 탄환은 가지지 않은 세계에서 하나 밖에 없는 평화의 군대 조선보병대가 해산된다.…(중략)…조선인 군인의 잔해가 조선에서 사라지고 외국에서나 조선인 군인들을 찾아 볼 수 밖에 없게 될 터이니 마지막 닫히는 평화의 군대 만세나 불러볼까.”

조선보병대는 일제 식민 통치의 하부 기구로 작동하며 1919년 3.1 운동 당시에는 창덕궁으로 밀려오는 군중을 막아내 원성을 사기도 하고 숱한 민원을 발생시켰으나 독립운동가도 다수 배출해냈다.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는 형집행 직전에 자결을 택한 장진홍 선생, 1921년 친일거두 민원식을 칼로 처단해 국가보훈처로부터 2009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양근환 선생 등이 조선보병대의 병졸 출신이다.

시민들은 무엇보다 아침 기상 나팔 소리를 아쉬워했다고 전해진다. 매일 오전 7시 30분 마다 기상 나팔 소리에 맞춰 일과를 시작하다 순식간에 실업자가 된 조선보병대의 ‘장졸(將卒)’들은 순사나 형무관, 경성전기회사의 차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특이한 대목은 해산 당시 202명의 초미니 군대를 중장 2명, 대좌 6명 등 고급 장교가 즐비했다는 점. 김응선 대좌은 해산 직후에 일제에 의해 공을 인정받아 일본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고 특별상여금 2,970원과 특별퇴직감사금 및 수당 8,926원을 받았다.

해산된 조선보병대사령부 자리에는 또 다른 수탈기관이 들어섰다. 광화문통 건너편에 있던 체신국 보험감리과와 보험업무과가 조선보병대 자리를 인수받아 26만원 예산으로 새로운 양식 건물을 올렸다. 번듯한 건물에서 일본은 체신 간이생명보험을 반강제로 안겼다.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체결됐으나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당시 합의에 따라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한 약 1,100만건의 간이생명을 강매한 기관이 바로 조선보병대 부지를 물려받은 일본 우정 간이보험이었다. 조선보병대가 있던 자리에는 오늘날 정부서울청사가 자리 잡고 있다.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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