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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사내칼럼
곡물법 폐지, 자유무역과 양당정치를 낳다




1848년 5월16일 새벽 4시, 영국 의회가 격론 끝에 곡물법 폐지안을 표결에 부쳤다. 디즈데일리 의원 등이 장시간 반대 연설에 나섰으나 결과는 통과. 찬성 348표 반대 251표, 기권 159표가 나왔다. 중세 시절부터 적어도 650여년(영국에서 곡물법에 대한 첫 기록은 1194년)을 내려온 곡물법은 이로써 사라졌다. 오래된 법률이 없어지며 남긴 파장은 참으로 컸다.

먼저 영국의 정치와 경제는 물론 국제 무역의 흐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근대경제학이 태동한 이래 최초의 논쟁이 바로 곡물법 폐지를 둘러싸고 일어났다. 칼 마르크스도 ‘자본론’ 여러 곳에서 곡물법을 다뤘다. 곡물법 폐지를 이끌었던 로버트 필 당시 영국수상은 오늘날까지 ‘정파의 이익에 휘말리지 않는 정치인의 표상’으로 칭송받는다. 도대체 곡물법이 뭐길래.

곡물법은 나라와 시대(로마 공화정에서도 곡물법이 있었다)마다 성격이 달랐으나 영국에서는 국내 농가 보호와 수입 농산물 억제가 골간. 1815년에 마련된 곡물법은 이런 경향이 특히 강해 값싼 외국산 농산물 수입을 원하는 산업자본가들의 원성을 샀다. 1815년 곡물법의 골자는 밀 1쿼터(약 12.7㎏) 가격이 80실링을 밑돌 경우 외국산 밀의 수입 금지. 법으로 가격을 보장한 셈이다.

영국이 이런 곡물법을 만든 이유는 간단하다. 의회를 장악하고 있던 토지 귀족과 지주들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서였다. 나폴레옹과의 전쟁 직전까지 46실링 수준이던 밀 1쿼터 가격이 전쟁 중 177실링으로 올랐다가 종전 후 60실링으로 떨어지자 ‘국내 농가’를 위해 마련한 게 1815년 개정 곡물법. 말이 ‘국내 농가’지 쓸만한 토지는 귀족이나 지주들이 보유하던 시대였다.

당연히 반발이 따랐다. 산업자본가들은 밀 가격이 오르면 노동자의 임금인상 요구가 거세진다는 점에서 곡물법 반대와 폐지 운동의 선봉에 섰다. 주식 중개인 출신의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는 폐지론을 거들었다. 자유무역으로 곡물 가격이 낮아지면 노동자의 저임금과 기업가의 고이윤을 낳고 자본 축적과 고용 기회 확대, 경제 번영으로 이어진다는 논리를 펼쳤다.

리카도에 맞선 곡물법 폐지 반대론의 대표주자는 토마스 멜서스. 목사이자 인구론의 저자로 유명한 멜서스는 농산물 보호 무역이 국내 생산 및 수요의 증가와 고가격을 낳고 농가 소득이 높아져 결국 사회 전체의 번영으로 이어진다는 중농주의적인 논리를 내세웠다. 친구 사이였던 리카도와 멜서스의 신문 지면을 통한 논전은 경제학 논쟁의 시초격이다.

산업자본가들은 곡물법 폐지를 위해 수많은 방안을 짜냈다. 책자와 팸플릿을 찍어서 뿌리는 전통적 홍보 방법은 물론 조직화에 나섰다. 조직화의 산물인 ‘곡물법반대연합(1836년 결성)’은 대중 계몽운동에서 서명서 제출, 선거인 명부 열람 및 수정을 통한 ‘유권자 창출’과 ‘자유무역 지지론자의 하원 진출’까지 다양한 활동을 펼쳐 최초의 ‘정치 압력 단체’로도 손꼽힌다.

온갖 노력에도 법률 개정이나 폐지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끝났다. 폐지를 둘러싼 대립을 ‘지주와 노동자’라는 이분법으로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기득권을 지키려는 지주 계층이 강력했기 때문이다. 1842년부터 3년 연속 의회에 폐지 동의안이 상정됐어도 결과는 언제나 마찬가지.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토리당(1836년에 보수당으로 개칭)의 벽에 막혔다.



철옹성 같던 곡물법은 끊임없는 반곡물법 운동과 참정권 요구,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무너졌다. 반곡물법 운동이 선거법 개정 요구와 맞물려 사회 불만 요소로 자리 잡고 아일랜드의 주식인 감자 돌림병으로 대기근이 발생, 수십만 아사자가 나오는 상황에 봉착한 로버트 필 수상은 1845년 말부터 생각을 바꿨다. 곡물법을 없애지 않는 한 영국의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판단한 그는 폐지론자로 돌아섰다.

필 수상에게는 정치적 모험이었다. 토지 귀족과 지주 계층을 기반으로 삼는 토리당 출신의 수상이 반(反) 토리적인 곡물법 폐지에 앞장 섰으니까. 폐지안의 하원 의결을 주도한 필 수상은 상원 통과까지 마친 다음 수상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필의 배신’에 분노한 골수 토리당원들은 보수당 깃발 아래 뭉쳤다. 토리당 내 곡물법 폐지론자와 휘그당의 자유주의자들은 함께 자유당을 만들었다. 영국 최초의 양당정치가 이렇게 선보였다.

곡물법 폐지의 경제적 파장은 더욱 컸다. 곡물법 논쟁이 한창이던 시절, 런던에 거주하며 대영제국 도서관에서 연구에 몰두하던 칼 마르크스는 곡물법 폐지를 자본주의 확산의 결정적 계기로 여겼다. 자본론에 ‘곡물법 폐지는 토지귀족에 대해 산업자본이 거둔 승리의 마침표’라는 구절도 나온다. 과연 그럴까. 마르크스의 평가와 달리 산업자본이 일방적 승리를 거둔 것 같지 않다. 토리당이 우려했던 영국 국교회의 붕괴나 토지 귀족의 몰락도 없었다.

영국의 성장에 곡물법 폐지는 힘을 보탰다. 당장 노동계급을 비롯한 일반 가정의 밀가루와 설탕, 버터와 햄, 베이컨 소비가 크게 늘어났다. 생활 수준의 향상은 사회적 불만을 가라 앉혀 영국 사회의 안정에 기여했다. 농업관세를 철폐한 영국은 모든 부분의 무역을 자유화한 결과 영국 상품의 수출도 크게 늘었다. 산업혁명과 기술 혁신이 맞물리며 영국은 20세기 초반까지 자유무역 속에 번영 가도를 달렸다.

영국이 과연 곡물법 폐지의 덕을 봤는지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지 않지만 확실한 점은 한 가지 있다. 로버트 필 수상은 시간이 흐를수록 소속 정당의 당론, 이해관계를 떠나 결단을 내린 위대한 정치인으로 추모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앞두고 여야가 대립할 때마다 ‘필 수상의 결단’이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지구 둘레의 20%에 해당된다는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선이 북위 49도에 맞춰진 것도 곡물법 직후(1846년 6월15일). 북미 대륙 서부는 1818년 이래 미국과 영국의 공동 영토로 인정됐으나 미국의 서부개척민이 급증하면서 영유권 시비가 불거졌던 상황. 양국에서 전쟁 불사론이 퍼지는 가운데 아일랜드 대기근과 곡물법 폐지 논란, 정계개편 등 현안에 눌려 있던 로버트 필 총리가 먼저 타협안을 내놓았다. 미국은 겉으로만 큰소리쳤을 뿐 내부 여건이 편안하지 않던 터. 북부와 남부의 대립이 깊어지고 텍사스 병합을 놓고 멕시코와 갈등을 빚던 처지여서 영국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여 국경선이 굳어졌다.

곡물법 폐지 논쟁에 등장하는 주체들은 대부분은 명분과 실리를 챙겼다. 영국의 양당이 그렇고 로버트 필 수상 역시 그렇다. 경제학자들도 이름을 남겼다. 미국과 캐나다도 덕을 봤다. 곡물법 폐지 논쟁이 없었다면 과연 두 나라의 국경선이 평화롭게 확정될 수 있었을지 미지수다. 곡물법 논쟁 시기에 확연하게 피해 본 곳은 딱 한 곳. 수십만이 굶어 죽은 아일랜드는 어떤 보상도 얻지 못했다. 역사는 약자를 늘 비켜간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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