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정통 일본식 라면인 '라멘' 이 서울에 등장했다. 라멘에 인생을 건 '라멘의 왕 ' 가와하라 시게미가 만든 잇푸도가 그 주인공이다. 그가 작은 라멘집에서 시작해 식품회사 대표로 성공한 비결은 무엇일까?
하제헌 기자 azzuru@hk.co.kr
일본을 대표하는 음식은? 이 질문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답은 아마도 스시와 사시미, 우동 정 도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 더, 일본식 라 면인 라멘이 있다. 현재 일본 전역에는 라멘 전 문점이 무려 8만여 개나 성업 중이다.
한국에서 라면은 주식보단 간식에 가깝다. 또 거의 100%가 인스턴트 라면이다. 하지만 라 멘은 전문점에서 생면을 뽑고 육수를 만들어 정 식 식사로 내놓는다. 이미 우리나라에도 서울 홍대, 이태원 등을 중심으로 라멘집들이 즐비하 게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 먹어 본 오 리지널 맛을 찾아내기란 어려운 게 현실이다.
이제 그런 라멘에 대한 갈증을 해소할 수 있 게 됐다. 정통 라멘을 선보이는 '잇푸도一風堂' 가 압구정동에 입성했으니 말이다. 잇푸도는 일 본에서 '라멘 킹' 으로 통하는 가와하라 시게미 가 운영하고 있는 라멘 레스토랑이다. 1985년 일본 후쿠오카에서 탄생한 잇푸도는 이름처럼 일본 라멘 업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가와하라 시게미가 처음부터 라멘에 관심을 가진 건 아니었다. "1979년부터 레스토랑 바를 운영하기 시작했어요. 그때 레스토랑 바에 온 여성 고객들이 '라멘을 먹고 싶어도 라멘 가게 는 냄새 나고, 더럽고, 왠지 무서운 느낌이 들어 서 가기가 어렵다' 는 말을 하더라고요. 순간 라 멘집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깔 끔하고 맛있는' 라멘집 콘셉트도 그때 결정했 습니다."
일본에선 국물에 따라 크게 4가지 종류로 라멘을 나눈다. 미소(된장), 쇼유(간장), 시오 (소금) 라멘과 돈코츠(돼지사골) 라멘이 그것 이다. 후쿠오카는 돈코츠 라멘의 고향이다. 돈 코츠 라멘은 1946년 하카타역 주변에 있는 포 장마차에서 처음 시작했다. 1955년 하카타에 있던 어시장이 나가하마로 이전하자 자연스레 라멘 포장마차들이 생겨났다.
잇푸도는 하카타(후쿠오카의 지역 이름) 라 멘을 선보이고 있다. 돈코츠 라멘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잘 모르는 사실이 있다. 돈코츠 라멘 에도 스타일이 있어서 나가하마식과 하카다식 으로 구분이 된다. 나가하마식은 국물이 아주 기름져 아저씨들이 좋아하지만 하카다식은 맑 은 국물을 사용해 맛이 담백하다. 면발도 나가하마식은 둥글고 가느다란 반면, 하카다식은 납작하다.
가와하라 시게미, 그는 정말 라멘 킹으로 불릴 만하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수상 경력을 보 자. 1997~1999년 'TV 챔피언 라멘 장인 선수권대회' 에서 3년 연속 우승, 2005년 일본 TBS 라멘 장인 선정 TV 프로그램 '면왕' 우승, 2010년부터 2년 연속 '도쿄 라멘 오브 더 이어 TokyoRamenOf The Year' 종합대상 수상. 이쯤 되면 시비 걸 사람이 없을 듯하다. 가와하라 시게미는 말한다. "라멘 을 천직이라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1997년 'TV챔피언' 에서 라멘 챔피언이 되었을 때입니다. 온몸 에서부터 '감사합니다' 라는 말이 솟아나오는 감정을 느꼈어요."
지난 2009년 미슐랭 가이드 뉴욕판, 뉴욕타임스, 자갓 Zagat에 소개된 바 있는 잇푸도는 현재 일본 전국에 61개점이 있다. 해외로도 발을 넓혀 뉴욕 1개점, 홍콩 1개점, 싱가폴 2개점을 성황리 에 운영 중이다. 앞으로는 뉴욕과 홍콩에 각각 2호점을 내고, 런던, 대만, 자카르타에도 순차적으 로 매장을 낼 예정이다. 오는 12월에는 잇푸도 서울 1호점과는 다른, 푸근하고 소박한 스타일의 매 장이 신사동 가로수길에 새로 문을 연다.
가와하라 시게미는 잇푸도를 개업한 이듬해인 1986년 치카라노모토 컴퍼니를 설립했다. 치카 라노모토 컴퍼니는 1994년 주식회사로 전환했다. 굳이 주식회사를 만들 필요가 있었는지 궁금했 다. 가와하라 시게미는 이렇게 답변했다. "1994년 라멘 박물관에 출점한 후 전국으로 이름을 알리 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라멘을 세계인의 음식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주식회사 로 전환하고 이듬해에 도쿄로 입성했지요. 2000년에는 뉴욕에 입점해 제가 세웠던 계획을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치카라노모토 사는 잇푸도 외에도 현재 고급 라멘 레스토랑 '교토 고쿄京都 五行' , 프랑스풍 빵을 만드는 '담 드 프랑스Dame de France' 등 80여 개 매장을 일본 전역에서 운영하며 외식전문 기 업으로 덩치를 키웠다. 이 회사의 2010년 매출액은 93억 엔이었다.
맛있는 음식점이 규모를 확장하면서 소비자들에게 외면받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한결 같은 맛을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방증일 것이다. 이 회사가 자타공인 브랜드로 오늘날까지 20년 넘는 세월을 굳건히 버텨온 비결은 무엇일까? 가와하라 시게미로부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당연히 품질 (맛)만큼은 변하지 말아야 하는 요소죠. 하지 만 고객으로부터 '언제나 변하지 않고 맛있다' 라는 말을 듣기 위해선 항상 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10년 전과 같은 일을 하고 있다면 고객 은 떠나 버리고 말아요. 벤츠가 옛날의 벤츠의 느낌(맛)을 유지하면서 시대의 요구에 맞춰 모 델을 바꿔가는 것처럼, 변하지 말아야 할 것과 변해야만 하는 것을 판단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잇푸도 서울 매장에선 세련미가 풍긴다. 2층 짜리 매장은 77석 규모로 평범한 라멘집이라고 는 생각되지 않는 인테리어를 갖추고 있다. 먼 저 입구에 들어서면 범상치 않은 공간이 보인 다. 바로 제면실이다. 제면실을 기준으로 왼쪽 엔 오픈 형태의 주방이 있어 종업원들의 활기 찬 움직임을 볼 수 있다. 2층에는 고급스러운 사케바와 VIP룸이 있다.
면발은 라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 포인 트다. 이런 핵심을 살리기 위해 매장 내부에 제 면 시스템을 설치한 것이다. 면발은 극세면과 웨이브면을 사용해 식감을 극대화했다. 맞춤 형 라멘을 추구하는 잇푸도의 신념에 따라, 혹 은 개인 취향에 따라 익힘 정도를 선택할 수 있 게 했다. 잇푸도 스타일은 면발에서만 엿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육수 관리도 철저히 신경 쓰고 있다. 가와하라 시게미는 말한다. "잇푸도에서 자체적으로 제작하는 소맥(보리)분을 사용해 자가 제면으로 뽑아냅니다. 소맥의 맛과 씹히 는 감촉, 육수와의 궁합, 목에서 넘어가는 느낌 등을 철저히 계산한, 다른 곳에선 흉내 낼 수 없는 면이죠. 여기에 돼지 뼈만 18시간에서 20 시간 동안 강한 불로 고아내 육수를 만듭니다. 뼈 부위별로 나누어 육수를 뽑아낸 다음 일정 비율로 섞으면 잡냄새가 없어지고 맛이 깊은 육수가 완성됩니다."
국내에 소개된 일본 레스토랑을 가보면 현지에서 먹었을 때보다 맛이 떨어져 실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잇푸도 서울의 라멘은 현지 그대로의 라멘을 재현해내고 있다는 게 가와하라 시게미의 설명이다. "지금까지 뉴욕, 싱가폴, 홍콩, 한국에서 해외사업을 경험해왔지만, 일본의 맛을 100% 재현하는 게 가장 기본적인 비즈니스 요소였어요. 일본 현지 인력들도 투입해 철저하게 맛을 지키 고 있습니다. 그 위에 일본을 넘어서는 퍼포먼스를 얹어 그 나라에 맞는 새로운 제안을 합니다. 이 렇게 하지 않으면 라멘을 모르는 해외 고객들의 호응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잇푸도가 자랑하는 대표 메뉴는 시로마루 모토아지, 아카마루 신아지, 돈코츠 라멘 등이다. 우 선 정통 하카타 라멘, 시로마루 모토아지와 아카마루 신아지는 꼭 맛봐야 한다. 흰색 그릇에 담겨 나오는 시로마루 모토아지는 원조 하카타 라멘을 느낄 수 있는 풍미를 가지고 있다. 빨간색 그릇 에 담겨 나오는 아카마루 신아지는 양파, 마늘, 스페셜 미소의 향이 곁들여져 깊고 진한 맛이 느껴 지는 잇푸도 스타일의 오리지널 돈코츠 라멘이다. 매운 미소를 가미한 카라카멘은 매운 정도를 3 단계로 선택할 수 있는 특별한 메뉴이다.
일본 텔레비전의 음식관련 프로그램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업종이 라멘이다. 수많은 라멘 관련 잡지가 발행되는가 하면, 매주 라면 애호가들이 지역별로 매기는 '맛있는 라멘 집 베스트 10' 등 음식점 순위도 발표된다. 신축 대형건물 한 층에 '라멘 스퀘어' 같은 이 름을 붙인 밀집형 라멘전문식당가도 있고, 매년 라면집 주방장들이 맛 대결을 펼치는 라 멘 챔피언전도 열린다.
가와하라 시게미는 말한다. "점포 수나 기업 규모 등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우리보다 더 큰 곳도 있습니다. 하지만 상품, 접객, 디자인 등의 품질이나 상품개발력, 해외 시장에서의 소구력을 감안하면 우리가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점포를 만들 때 '변하지 않기 위해 변화 를 지속한다' 라는 이념을 항상 생각합니다. 시대가 지나도 브랜드가 진부해지지 않게 하는 필수 조건이라고 생각해요."
일본 현지에서 맛보았던 라멘이 그립다면 아쉬워하지 말자. 잇푸도가 있다.
라면인가? 라멘인가?
원래 라면은 중국음식이다. 한자로는 '납면(拉麵)' 이라고 쓴다. '납면(拉麵)' 이 일본 발음으론 '라멘' 이 된다. 일본에 라멘이 처음 알려진 때는 메이지유신(1868년) 직후다. 1870년대 요코하마 등 일본 개항장에 들어온 중국 사람들이 라멘을 노점에서 만들어 팔면서 슬금슬금 인기를 끌었다. 당시 라멘은 '지나(支那) 소바' 또는 '남경(南京) 소바' 라고 불렸다. 이후 일본 여기저기에 중국 라면을 파는 점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 때 중국으로 출정했던 일본인들이 라면 만드는 법을 어깨너머로 익힌 뒤 귀국해 포장마차에서 중국 라면을 만들어 팔았다. 물자가 귀하고 경제사정이 어려웠던 전후에, 값싸고 맛있고 영양가도 높은 라멘이 일본에서 인기 있는 식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