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어느 날 아이오와주에서 남편과 함께 목장을 운영하던 다이앤 쇼의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다. 몸에 발진도 일어났고, 두통이 끊이지 않았다. 병원을 찾아가봐도 의사들은 치료는커녕 원인조차 알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다이앤은 나름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목장 인근에 휴대폰 기지국이 들어서면서부터 몸에 이상증세가 나타났던 것이다. 기지국 근처로 다가갈수록 두통도 심해졌다.
결국 그녀는 남편 버트와 함께 캠핑카에 몸을 싣고 무작정 길을 나섰다. 목적지도, 기간도 정하지 않았다. 그저 휴대폰 기지국과 문명세계에서 멀리 떨어져야 몸이 편해진다는 생각뿐이었다.
수개월이 흘러 부부는 노스캐롤라이나 주립공원에 도착했다. 그때 우연히 만난 산림감시원으로부터 웨스트버지니아주의 그린뱅크 마을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국가 무선통신 제한구역(NRQZ)의 한복판에 있어 무선 전파의 영향에서 완벽히 자유로운 곳이라는 설명이었다.
두 사람은 그린 뱅크를 찾아가 며칠간 머물렀다. 그리고 또 다른 곳을 향해 떠났다. 전자기 시대의 집시처럼 현대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기술과 단절된 장소를 찾아 미 전역을 떠돌았다.
여행을 하는 동안 다이앤은 자신의 병명을 알게 됐다. 이른바 ‘전자파 과민증(EHS)’이었다. 자신 외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EHS 때문에 고통 받고 있었지만 대다수 의사들은 EHS라는 질환의 존재 자체를 믿고 있지 않다는 사실도 알았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EHS는 의학적 진단명이 아니다. 단지 명확한 생리적 근거가 없는 애매모호한 증상들의 집합체 정도로 본다. 그러나 세상에는 EHS 환자들이 생각 외로 많다. 스웨덴 카롤린스카 연구소의 신경과학자인 올레 요한손 박세에 의하면 각국마다 자신이 EHS 환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독일의 경우 전체 인구의 8%인 약 650만명, 미국은 인구의 3.5%인 약 1,100만명이 그런 사람들이다.
“이만큼 광범위하게 퍼진 전염병은 많지 않습니다. 현대인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하루 24시간 전자파에 노출돼 있어요.”
다이앤에게 있어 EHS에 대한 논란은 학자들의 문제다. 주류 학계의 판단과는 상관없이 그녀는 분명 몸이 아프기 때문이다. 그래서 니카라과의 섬과 라플란드의 오두막에서 생활하다가도 꼭 그린 뱅크로 돌아왔다.
그러던 2007년 다이앤과 버트는 아이오와주의 목장 절반을 팔아서 그린 뱅크에 주택을 구입했고, 지금까지 살고 있다. 덕분에 지난 몇 년간 다이앤은 발진도, 두통도 없는 편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빠졌던 머리카락도 다시 자라났다.
“외부 방문객들이 들고 있는 휴대폰을 보면 아직도 머리가 아프지만 이따금씩 컴퓨터를 사용할 만큼 회복됐어요. 이제 아이오와로 돌아갈 일은 없을 거예요. 그린 뱅크가 제 고향이니까요.”
그녀에 따르면 지금껏 수십 명의 사람들이 첨단기술을 피해 그린 뱅크에서 안식을 찾았다. 또한 매년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하지만 전파로부터 벗어나길 원하는 것과 그린 뱅크에 정착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그린 뱅크는 인구 143명의 작은 마을이다. 도서관, 우체국, 학교가 하나씩 있지만 주민 대부분은 앨러게니 산맥의 울창한 수목으로 둘러싸인 농장과 주택에서 살고 있다.
3년 전 다이앤은 EHS 인터넷 포럼에서 항공기 조종사였던 멜리사 찰머스와 제인을 만났다. 두 사람 모두 휴대폰과 와이파이가 없는 곳을 찾고 있었기에 다이앤은 그린 뱅크를 소개했다.
작년 11월 필자는 그린 뱅크의 잡화점 옆 ‘그린 뱅크 캐빈스’에서 그녀들을 만났다. 세 채의 오두막집으로 이뤄진 그린 뱅크 캐빈스는 1810년 세워졌는데, 일상을 탈출하려는 관광객들을 위한 펜션으로 운용되고 있었다. 필자는 바로 옆 오두막집을 빌려서 그녀들을 지켜보며 몸의 반응을 살펴보려 했다.
그런데 첫날밤부터 제인에게 문제가 발생했다. 오두막집의 두꺼비집을 내리고 양초를 켜놓은 뒤에도 몸이 가렵다며 안절부절 못했던 것이다. 20분마다 휴대형 혈압계로 혈압을 재보니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 멜리사 역시 불편한 모습이었다. 가끔씩 전자파가 피부에 와 닿는다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전자기파는 피부에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에요. 마치 빛처럼 몸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온 몸이 영향을 받게 되죠.”
급기야 멜리사는 가방에서 디지털 가우스 측정기를 꺼냈다. 그리고는 벽에 붙어 있는 전깃줄에 들이대고 전자기파의 출처를 찾았다. 측정기가 반응하지 않자 무선주파수(RF) 측정기를 꺼내 허공에 휘둘렀다. 그 과정에서 필자의 오두막집 RF 수치가 그녀들의 오두막집보다 낮다는 게 밝혀졌다. 그렇게 필자는 두 사람과 숙소를 바꿔야 했다.
다음날 아침 필자는 이 마을의 랜드마크인 그린 뱅크 전파망원경(GBT)을 보기 위해 차를 타고 3㎞를 달려갔다. GBT는 조향이 가능한 현존 최대 전파망원경이다. 접시안테나의 직경이 무려 100m에 달해 계곡 어디에서도 눈에 띌 정도였다. 이는 그린 뱅크에서 EHS 환자들보다 전자기장에 민감한 유일한 물건이기도 했다.
미 연방정부가 1958년 그린 뱅크를 포함한 3만3,670㎢ 면적을 NRQZ로 지정한 것도 GBT 및 GBT 신호수집소를 전자기 간섭에서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NRQZ 내에서는 휴대폰, TV, 무전기 등 전자기파를 이용하는 모든 기기의 사용이 철저한 통제 아래 이뤄진다. 또 GBT를 중심으로 반경 16㎞ 내에서는 사용이전면 금지된다. 즉 EHS 환자들에게 NRQZ는 집 주변에 이동통신 기지국이 생기거나 집안에 스마트 미터기가 설치될 염려가 없는 지구상에 몇 안 되는 장소다.
그렇다고 그린 뱅크 주민들이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다. 유선망으로 TV와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런 만큼 그린 뱅크에도 전자기파가 전혀 없지는 않다. 사실 햇빛도 전자기파의 일종이며, 지구 전체를 전자기장이 감싸고 있다는 점에서 그런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맞다. 다만 요한손 박사는 자연 전자기파와 인공 전자기파는 강도 면에서 큰 차이가 있다고 강조한다.
“자연 전자기파와 비교할 경우 현대인들이 노출돼 있는 인공 전자기파의 강도는 가히 천문학적 수준입니다. 예를 들어 달 표면에 휴대폰을 놓아둔다면 그 휴대폰은 우주에서 지구로 유입되는 가장 강력한 전자기파의 원천이 됩니다.”
EHS 환자들은 GBT가 우주 전파를 수신하듯 자신들도 통증이라는 형태로 전자기장을 감지한다고 설명한다. 제인만 해도 항공기에 탑승할 때마다 산 채로 구워지는 느낌을 받는다면서 전자기파가 그 원인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주류 학계는 그녀의 판단을 인정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전자기파는 사람의 건강을 해칠 정도로 악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EHS 증상이 전자기파 및 무선주파수와 관련 있다는 과학적 증거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이와 관련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생체공학부 케네스 포스터 교수는 보건당국이 인과관계 규명을 위해 무수한 논문을 뒤졌지만 전자기파가 생명체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확실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전했다. “단 하나의 예외가 있었다면 실험용 쥐를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렸을 때뿐이었죠.”
그렇다. 전자기파가 생명체에 미치는 위해 중 지금껏 확인된 유일한 조건은 조직이 가열되는 것이다. 이에 맞춰 미 연방통신위원회(FCC)도 1996년 ‘열역학적 가열’을 기준으로 무선주파수 방출기기의 안전기준을 마련한 것 외에는 별다른 규제를 하지 않고 있다. 무선기기 제조사들이 법적 안전기준을 충족시켰음에도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거나 머리맡에 두고 잠을 자지 말라고 권고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 캠퍼스의 조엘 모스코위츠 지역공동체 보건센터장 역시 조직 가열 검사로는 EHS 문제에 대응할 수 없으며, 사용자들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시대에 뒤쳐진 안전기준이라 주장한다. 또한 과학계도 스마트폰에서 스마트 미터기에 이르는 무선주파수 방출기기의 보급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지난 20년간 이 기기들이 가정과 학교, 직장에 전자기파를 무차별 뿌려댔음에도 말이다. “현재 EHS 환자들은 ‘탄광 속 카나리아’와 같은 신세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열과는 상관없는 무선 주파수의 생물학적 위해성을 입증한 연구들이 점차 늘고 있다는 부분이다. 정자 세포 손상, 뇌의 신경화학적 변화 유발 등이 그것이다. “아직 답을 찾지 못한 의문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전자기파의 인체 위험성을 경고하는 증거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린 뱅크에서의 두 번째 날. 멜리사와 제인은 여전히 고통에서 완벽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피부가 따끔거린다는 증상을 끊임없이 호소했다. 멜리사는 분명 원인이 있을 것이라 여겼지만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저녁시간 무선주파수 측정기를 들고 오두막집을 돌아다니던 멜리사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렇게 말했다. “측정값이 캐나다의 저희 집보다 훨씬 낮아요. 주변에 휴대폰 기지국이 들어서기 전과 비교해도 100분의 1에 수준이에요. 이렇게 낮은 수치는 한 번도 본적이 없어요. 도대체 왜 몸에 증상이 나타나는지 이해할 수가 없네요.”
EHS를 연구한 수십 건의 논문들에 의하면 EHS 환자들은 종종 ‘노시보 효과’에 의해 증상이 촉발된다. 전자기파에 노출될 것이라는 예상만으로도 실제로 노출됐을 때와 유사한 신체 반응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의사들이 EHS를 진단키 어렵게 만드는 최대 난제이기도 하다. 어쩌면 멜리사와 제인의 증상도 그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그린 뱅크의 주민인 제니퍼 우드는 다이앤과 유사한 경로로 이곳에 정착했다. 그녀는 1997년 갑자기 EHS 증세가 나타났다고 했다. 이후 건축 일을 그만두고 하와이의 가족 곁을 떠나 홀로 10년간 방랑자의 삶을 살았다. 일반 의약품과 민간요법을 가리지 않고 치료법을 찾았지만 증상은 개선되지 않았다. 그러던 3년 전 한 대체의학 학회에서 그린 뱅크를 알게 됐고, 이틀 뒤 다이앤을 찾아왔다. 당시 그녀의 체중은 36㎏까지 빠져 있었다. “저승의 문 앞에까지 다가가 있었다고 보면 돼요.”
그녀는 전기와 수도 시설조차 없는 골짜기에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그리고 불과 9개월 만에 체중이 58㎏로 늘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지도, 식습관을 바꾸지도 않았어요. 유일하게 바꾼 것은 전자기파가 없는 곳으로 이사했다는 거죠. 이거야 말로 제 질병의 원인이 전자기파라는 명확한 증거가 아닐까요.”
제니퍼는 현재 마을 밖 숲이 우거진 산마루에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건설한 오두막집에서 살고 있다. 그녀의 또 다른 집은 중학교 인근 언덕에 위치한 그린 뱅크 공공도서관이다. 이곳에는 인터넷이 가능한 컴퓨터 8대가 배치돼 있는데, 그린 뱅크의 EHS 환자들이 외부세계와 소통하는 유일한 끈 구실을 하고 있다. 냉장고가 없는 제니퍼는 도서관의 탕비실에 개인 음식도 보관하고 있었다.
도서관의 자원봉사자인 아놀드 스튜어트와 담소를 나누던 제니퍼가 놀라운 소식을 전해 듣고 눈이 동그래졌다. 그린 뱅크의 토박이인 톰이 얼마 전 플로리다에서 온 EHS 운동가 모니크와 결혼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 제니퍼를 통해 소식을 접한 다이앤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럴 리가 없어. 톰은 EHS를 믿지 않는 걸.”
다이앤에게는 두 사람의 결혼을 쉽게 믿지 못할 충분할 이유가 있었다. 톰은 그린 뱅크로 이주한 첫 번째 EHS 환자이자 모든 EHS 환자들의 비공식 대표자 역할을 하고 있던 다이앤을 누구보다 신랄하게 비판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4년 전 다이앤의 남편인 버트가 EHS에 대한 주민들의 이해를 돕고자 마을회관에서 강의를 했을 때도 그랬다. 톰을 포함한 EHS 비판론자들은 다이앤이 마을에 보건소가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꾀병을 부리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스튜어트도 그때는 톰의 편이었다. “저희는 다이앤을 맹비난했어요. 아직도 너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그때는 그랬죠.”
스튜어트의 기억에 의하면 EHS 비판론자들과 다이앤의 대립은 마을회관에서 식사를 했던 다이앤이 테이블 근처의 형광등을 치워달라고 요청한 것이 시발점이었다. 이후 다이앤이 부엌의 형광등 불빛에 노출되기 싫다며 테이블로 음식을 가져다 달라고 요구하면서 대립은 격화됐다. “저희가 가장 짜증스러웠던 것은 다이앤의 끊임없는 특별대우 요구였어요. 한번은 사고로 팔 하나를 잃은 주민이 이렇게 말하기도 했죠. ‘이봐요 다이앤. 이런 나도 음식은 직접 가져다 먹어요.’라고요.”
하지만 버트의 강의를 기점으로 주민들의 마음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고, 데탕트가 찾아왔다. 교회의 목사는 다이앤을 위해 무선 마이크 사용을 중단했고, 치과 의사는 그녀가 올 때마다 모든 형광등을 꺼버렸다. 편의점에서는 가끔씩 점포 밖에 상품을 진열해 놓고 EHS 환자들의 안락한 쇼핑을 돕기도 했다.
하지만 다이앤을 포함한 이 마을의 EHS 환자들은 이런 상황의 이면에 상당한 긴장감이 숨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EHS 환자들에게 보여줬던 주민들의 반응은 촌사람들이 외지인에게 표명하는 막연한 경계심리와는 차원이 다른 탓이다. “그린 뱅크 같은 작은 마을의 주민들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때부터 이어진 인간관계를 맺고 있어요. 그런 마을에 갑자기 10여명의 EHS 환자들이 몰려와 전등을 끄라고 요구한다면 마을주민과 저희들의 대결구도가 만들어지지 않을 수가 없겠죠.”
어느 날 오후 그린 뱅크의 EHS 환자 3명이 자원봉사를 위해 모였다. EHS 환자 모임에 새로 가입한 여성에게 문제가 생겨서 멜리사와 제인, 마틴 웨더럴이 그녀의 집을 검사해주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마틴은 온타리오주의 전직 경찰관으로 2012년 퇴직 후 그린 뱅크에 정착했다고 했다.
자동차를 타고 달리던 일행은 그린 뱅크에서 남쪽으로 8㎞ 떨어진 던모어 마을에 멈췄다. 교차로 주변의 집 몇 채와 주유소, 빵집, 마을회관을 겸하는 상점 하나가 전부인 곳이었다. 일행은 상점 밖 피크닉 테이블에서 간단히 점심을 때웠다. 우리의 표정은 밝았다. 필자는 따뜻한 햇빛이 좋았고, 세 사람은 EMR이 적어 편안한 것 같았다. 며칠이 지나면서 멜리사와 제인은 처음보다 한결 편안하게 숙면을 취한다고 했다. 제인은 혈압이 떨어졌고, 멜리사는 오랫동안 그녀를 괴롭혔던 이명이 완전히 사라졌다.
식사를 마치고 필자는 NRQZ으로 이사 온지 얼마 안 됐다는 상점 주인에게 EHS 환자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살짝 물어봤다. 주인은 기다렸다는 듯 ‘이방인’들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다. 자잘한 요구를 계속해대고, 거들먹거리며, 마을 주민들과 도통 어울리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녀에게 감사를 표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날 이후 6일 동안 다이앤은 멜리사와 제인에게 그린 뱅크의 구석구석을 구경시켜 줬다. 우체국과 도서관, 그린 뱅크 천문대, 심지어 쓰레기 처리장까지 보여줬다. 일요일에는 마을에서 24㎞ 떨어진 교회로 예배를 보러 갔다. 예배가 끝난 후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가 제인에게 다가와 EHS에 시달리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물었다. 제인이 대답을 하자 그 연주자는 모든 EHS 환자들이 수년이상 들어왔던 질문을 꺼냈다. “요즘은 모르는 병이 없지 않나요? 왜 아무도 이런 병이 있다는 걸 모를까요?” 제인은 마땅히 대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 듯 보였다.
EHS는 의학계에서 인정한 질병이 아니다. 그런 만큼 진단을 받을 수도 없어 EHS의 환자들은 보험사나 보건 당국에 치료비를 요구하기가 매우 힘들다. 오직 스웨덴만이 EHS를 장애와 동급의 기능손상으로 인정하고 있을 뿐이다.
긍정적 사실은 EHS 운동가들의 활약에 힘입어 EHS나 전자기파 관련 문제에 대한 시각이 조금씩이나마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지난 2011년 WHO가 휴대폰 전자파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 국제암연구소(IARC) ‘인터폰 프로젝트’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무선주파수를 ‘발암 가능(possibly carcinogenic) 그룹’으로 분류했을 때 환자들의 사기는 크게 올랐다. 이 연구 결과, 무선주파수에 다량 노출될 경우 뇌종양의 일종인 신경교종(神經膠腫) 발병률이 40%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피실험자의 범주와 숫자가 한정됐던 탓에 연구팀도 이 결과를 모든 휴대폰 사용자에게 적용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또한 올 2월에는 프랑스가 탁아소에서의 무선주파수 기기 사용을 제한하기도 했다. 무선주파수 노출을 줄이려는 예방적 조치였다. EHS 환자들은 이런 노력들이 모여 언젠가 EHS도 정확한 원인이 규명돼 하나의 질환으로 치료받을 수 있기를 고대하고 있다.
다만 이 기대를 이른 시일 내에 충족시키기에는 EHS를 진지하게 다루는 연구들이 너무 적다. 그 와중에도 무선기술의 세력 확장은 더욱 거침없이 전개되고 있다. 주민들과 EHS 환자들의 인간관계에 큰 차질이 빚어지거나 그린 뱅크 전파망원경의 예산이 대폭 삭감되지 않는 한 그린 뱅크는 앞으로도 꽤 오랜 시간 EHS 환자들의 마지막 안식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멜리사와 제인의 그린 뱅크 여행일정이 끝나갈 무렵, 다이앤은 자신의 집에서 그녀들을 위한 작은 파티를 열었다. 몇몇 EHS 환자들도 와인과 음식을 들고 찾아왔고, 그들은 밤새도록 촛불이 켜진 부엌 테이블에 둘러앉아 담소를 나눴다. 그린 뱅크 천문대가 주민들을 위해 와이파이 허브를 설치하고 있다는 소문, 극초단파에 대한 구 소련의 연구내용, 나날이 확산되고 있는 무선전파 관련 질환 등이 안주거리로 등장했다.
그들 모두는 ‘정상인’들에 대한 경고성 이야기도 했다. 친구이자 이웃이며 직장동료였던 사람들이 갑자기 전자기파 과잉 노출에 의해 건강상의 문제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다른 사람들도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 마틴이 필자에게도 경고의 메시지를 던졌다. “모든 사람들이 몸에 전자기파의 영향을 받고 있어요. 전자파 없이 살지 않는 한 수년 내에 모두가 그 사실을 직시할 겁니다. 그때는 무선기기라면 꼴도 보기 싫어질 거예요.”
때때로 EHS 환자들을 둘러싼 음모론적 가설들이 화제가 되지만 다이앤의 부엌에 있던 사람들은 결코 기술을 두려워하거나 문명의 붕괴를 준비하는 둠스데이 프레퍼스가 아니었다. 디저트를 먹던 중 제인이 그린 뱅크에 집을 얻기 위해 부동산 중개업자를 알아보고 있다고 말했다. 멜리사도 고향으로 돌아가기 싫다고 했다. “잃어버렸던 저의 삶을 다시 찾은 느낌이에요.”
그린 뱅크의 자연은 너무나 아름답다. 이곳에서의 삶은 전원생활과도 같은 매력이 있다. 하지만 EHS 환자들이 여기 오는 이유는 다른 곳에서는 살 수가 없어서다. 그렇다고 모든 EHS 환자들이 그린 뱅크 정착에 성공하지는 못한다. 일단 이곳에 아는 사람이 없다면 일자리나 주택을 마련하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 설령 이사를 오더라도 바깥세상과 철저히 격리된 생활을 견디지 못해 떠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다이앤은 현재 한 가지 계획을 준비 중이다. 비영리기구(NGO)의 도움을 받아 5만6,000㎡의 땅을 구입, EHS 환자들만을 위한 피난처를 건설하려 한다.
필자가 그린 뱅크에서 보낸 마지막 날 아침, 다이앤은 그 피난처가 건설될 공터를 보여줬다. 언저리에 작은 오두막집이 한 채 있었고, 솔잎 향기가 그득한 곳이었다. “EMR에 걸린 사람들이 여기에서 요양을 하며 건강을 회복하게 될 거예요. 저처럼 말이에요.”
그녀는 볼티모어에 살고 있는 아들을 보기 위해 잠시 동안 무선전파가 난무하는 세상으로 여행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이 좋아졌다. “어쩌면 이곳에서 요양을 취하고 난 후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 평범하게 살 수 있을지도 몰라요.”
다이앤은 공터를 걸어 다니며, 건물이 들어설 장소를 가리켰다. “여기는 오두막집을, 저기에는 집회 장소를 지을 거예요. 저쪽에는 전자파를 차단한 컴퓨터실도 마련할 생각이에요.”
NGO에서는 컴퓨터실에 반대했지만 다이앤이 고집을 피웠다고 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삶이 있으니 이곳에서도 일을 하거나 가족들과 인터넷으로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여기는 EHS 환자들의 공동체일 뿐 종교집단은 아니잖아요?”
마을을 떠날 때 자동차의 백미러 속에 그린 뱅크 천문대의 거대한 안테나가 달처럼 떠올랐다. 그 순간 오두막집에 지도를 놓고 나온 사실이 떠올랐다. 휴대폰도, 내비게이션도 작동하지 않는 곳에서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언제 길을 잃어버려 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료함을 달래려고 켜놓은 라디오에서는 잡음만이 들렸다. 얼마가 지났을까. 라디오에서 음악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NRQZ을 벗어난 것이었다. 하지만 필자는 곧바로 라디오를 꺼버렸다. 그리고 정적을 온몸으로 즐겼다.
EHS ElectroHyperSensitivity.
유르트(yurt) 유목민들이 거주하는 원형 천막.
노시보 효과 (nocebo effect) 진짜 약을 복용해도 환자가 그 약의 효과가 없다고 믿으면 약효가 발휘되지 않는 현상.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와 반대되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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