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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석 건물 위용 포로 로마노, '견제와 균형' 민주주의 상징으로
황제 전제정치 펼친 카이사르, 정복전쟁 통해 지금의 유럽 완성
'로마로 가는 길' 아피아 가도는 인프라의 중요성 새삼 일깨워줘
'아는 만큼 보인다'는 여행의 격언에 대해 이탈리아 로마만큼 잘 들어맞는 곳도 많지 않다. 로마 시내에는 무려 2,000여년 전의 유적이 발길에 걷어차일 만큼 많다. 하나하나가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꾼 스토리를 담고 있다. 하지만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알기 힘들다. 방송가나 출판시장에는 에세이류의 여행기만 넘칠 뿐 실제 이탈리아 문화와 역사에 대한 인식은 깊지가 않다. 로마가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인류에게 해준 역할 때문이다. 한국인에게도 마찬가지다. 특히 올해는 한국과 이탈리아가 수교 130주년을 맞은 해였다. 로마제국은 도시국가로 시작했다. 이 때문에 나중에 제국을 만들었어도 그냥 '로마'로 불렸다. 이탈리아라는 말은 상대적으로 뒤에 나왔는데 알프스 남쪽과 지중해에 둘러싸인 '본국'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였다. 이후 기나긴 중세를 지나서 19세기 말 이탈리아가 재통일되면서 공식 국가명칭으로 확정됐다. 로마라는 도시의 역사는 2,800년 가까이 된다. 현존하는 한 국가의 수도급 대도시 중에서 가장 길다. 이중 고대 로마제국의 역사가 1,200여년이다. 로마제국은 기원전 753년에 로물루스라는 사람이 건국해 서기 453년 이민족에게 망할 때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1,000년간 존속(기원전 57년~서기 935년)한 신라보다 길다. 물론 신라와의 차이는 그것뿐만은 아니다. 유럽과 아시아·아프리카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한 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제도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유산의 도움을 현대의 우리도 받고 있다.
◇'견제와 균형'이란 공화정 개념을 세운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로마 한복판에 '포로 로마노'라는 곳이 있다. 대리석 건물 유적과 돌기둥 사이로 세계각지에서 몰려온 관광객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닌다. 2,000년 전에 이런 건축물을 세울 수 있었던 고대 로마인들의 기술에 감탄을 하면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포로 로마노라는 곳 자체다. 일종의 광장이다. 2,000년 전의 사람들이 이런 광장에서 모여 정치를 하고 경제를 하고 토론을 했다는 것이 놀랍다. 정치는 광장에서 이뤄진다는 유럽 전통을 세운 것은 바로 로마다. 그럼 누가 이런 전통을 시작했을까.
로마도 기원전 753년에 시작할 때는 국왕이 정치하는 왕정국가였다. 하지만 폭군들의 압제를 거치고 나서 기원전 509년에는 공화정으로 바뀐다. 왕이라는 제도를 없애고 시민들이 직접 정치를 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누군가 시민들을 이끌 대표는 있어야 한다.
왕정의 마지막 국왕인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를 타도하고 공화정의 기치를 든 사람은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라는 사람이다. 그는 기존 왕정 아래서는 이름뿐이었던 원로원과 민회에 확실한 실권을 준다. 그리고 왕 대신에 집정관이라는 직책을 만든다. 이로써 '집정관''원로원''민회'라는 3개의 권력추가 정립(鼎立)하는 체제가 시작된다. 집정관은 행정·군사 권한을 갖는 지금으로 말하면 대통령이다. 임기는 1년. 원로원은 지금의 의회다. 의회와의 차이는 주로 귀족 출신이고 종신제라는 것이다. 시민들로 구성된 민회는 일종의 국민투표가 된다. 집정관은 원로원의 추천을 받아 민회에서 선출한다. 사법은 원로원 의원이 검사와 판사 역할을 했으니 원로원의 권한에 속했다. 국왕 1인의 독재에서 집정관·원로원·민회로 권력이 분리된 것이다. 즉 행정과 입법·사법의 견제와 균형이다.
사실상 이러한 제도는 2,500년이 지난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로마가 '영원의 제국'으로 인식되는 이유다. 이 시스템은 로마에서 유럽을 거쳐 미국에서 정착한다. 조선왕조가 퇴장하고 민주공화국의 이념을 택한 후 우리나라도 이를 받아들였고 또 지금 그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포로 로마노는 이렇게 로마인들의 정치·경제생활 가운데 발전됐다. 포로 로마노에 서면 민주주의를 느낄 수 있다.
◇'유럽'의 창시자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고대 로마제국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을 꼽으라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대답이 많다. 그는 당시에도 가장 유명하고 유능한 정치가이자 장군이었다. 실제로는 과두체제인 공화정을 폐지하고 기원전 1세기 중반 황제의 전제정치를 시작한 인물이다.
유럽역사가들은 카이사르가 지금의 유럽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참가했던, 고대 로마제국의 정복전쟁 결과로 제국은 이미 라인강 서쪽의 서유럽, 다뉴브강 이남의 남유럽, 그리고 북아프리카·소아시아·시리아 등의 중동까지 이어져 있었다.
본국이라고 불리는 로마 혹은 좀 더 범위를 넓혀서 본국 이탈리아가 이들 식민지(당시의 용어로는 속주)를 지배하는 상황이었다. 후세의 제국주의 국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영국도 정복전쟁을 통해 한때 지구상 영토와 인구의 4분의1을 지배했었다. 하지만 영국과 고대 로마는 식민지와의 관계에서 큰 차이가 난다. 영국의 식민지들은 끝까지 식민지로 남았다. 200년 가까이 식민시기를 겪은 인도인도 스스로를 절대로 영국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하지만 로마제국의 식민지인들은 스스로 로마인이라고 불렀다. 로마의 동화노선 때문이다. 이것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인물이 카이사르다. 카이사르는 자신이 직접 정복한 갈리아(지금의 프랑스)를 비롯해 어떤 지역의 사람이라도 로마제국에 공이 있다고 판단되면 로마 시민권을 줬다. 그리고 원로원의 의석도 보장했다. 로마에 거주할 필요도 없었다. 식민지인 자신의 거주지에서 이런 권리를 가졌다는 것이다.
유럽인들이 지금도 자랑스럽게 자신들을 로마의 후손이라고 밝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들은 로마로부터 시민권을 받아 로마인이 됐던 사람들의 후손이다.
◇인프라의 중요성을 일깨운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로마 시내에서 볼 것이 '진실의 입'이나 '콜로세움' '가톨릭교회'만은 아니다. 오히려 로마식 가도에서 진정한 고대 로마제국의 힘을 느낄 수 있다. 대표 격이 '아피아 가도'다. 이는 로마 시내에서 걸어서 30분 정도만 가도 만날 수 있는데 기원전 312년에 처음 만든 것이다.
가도라는 것은 지금으로 하면 고속도로다. 당시의 주 교통수단인 말과 마차가 가장 빠른 거리와 시간으로 이동할 수 있게 한 포장도로다. 전체 폭이 10m 이상으로 가운데 4m는 차도(마차도로)이고 양쪽으로 각각 3m는 인도다. 이것을 빈틈없이 돌로 포장했다. 이런 도로가 도시들 사이로 최대한 직선으로 놓인 것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할 때 바로 그 길이다. '로마에 가서는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고 할 때 로마로 가는 길이다.
고속도로가 지금은 당연한 것이지만 2,300여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기원전 312년 이를 처음으로 주창하고 건설을 책임진 사람이 당시 재무관(재무·건설담당 장관)이었던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다. 그의 이름을 따 아피아 가도라고 이름 붙였다.
이후 로마는 제국 각지에 가도를 건설한다. 이를 통해 사람들과 물자의 이동이 엄청나게 편리해졌으며 속도도 빨라졌다. 로마 시대의 이동속도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근대에 철도가 개발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물론 이런 도로를 만드는 것이 당시의 재력이나 기술 수준으로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제국을 만들고 유지하고 사람들이 편리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를 로마인들이 생각했다는 것이다. 2,000년 전의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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