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경제성장의 불씨를 지피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 추진해 온 경제정책들이 대지진과 뒤이은 후쿠시마(福島) 원전 사고로 인해 '올 스톱'될 위기에 처했다. 경제 성장을 뒷받침해 온 원자력발전 정책과 기업경쟁력 회복을 위한 법인세 인하, 국제시장에서의 역량 강화를 위한 농업개방 및 자유무역확대 등에 줄줄이 제동이 걸리면서 오랜 저성장의 덫에서 벗어나려는 일본의 장기성장 전략의 차질이 불가피해 보인다. 에다노 유키오(枝野幸男) 일본 관방장관은 25일 기자회견에서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가입에 대해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영향을 고려해서 판단을 내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는 자유무역협정에서 뒤쳐진 그 동안의 행보를 만회하기 위해 미국의 주도로 진행 중인 TPP 가입을 적극 추진, 오는 6월까지 교섭 참가 여부를 결정해 대화에 참여하겠다는 입장을 거듭 밝혀왔다. 하지만 TPP 가입의 전제조건이 되는 농업개혁 일정이 대지진으로 차질을 빚으면서 간 정부가 주요 정책과제로 내세웠던 '시장 개방'은 당분간 보류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블룸버그 통신은 앞서 24일(현지시간) "정부가 재해복구와 피해자 지원, 원전 위기 극복에 집중해야 하는 상황인 만큼 TPP는 당분간 우선 정책과제에서 밀릴 것" 이라고 내다봤다. 실제 가노 미치히코(鹿野道彦) 농림수산상은 지난 22일 "3월 말까지로 예정됐던 농업개혁 중간정리는 물리적으로 어려워졌다"고 밝혀 6월 말로 예정됐던 농업개혁안 수립과 TPP 가입 여부 결정도 차질을 빚게 될 것임을 시사했다. 기업의 수익 제고와 경쟁력 향상을 위해 12년 만에 추진키로 했던 법인세 인하도 'U턴' 가능성이 높아졌다. 요사노 가오루(与謝野馨) 경제재정상은 이날 각료회의 후 기자회견에서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법인세 감세가 사회 전체의 수요에 맞는지는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수십 조 엔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재해 복구 재원 마련이 당장 발등의 불로 떨어진 마당에 한가하게 감세를 강행할 수는 없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그 동안 재계를 대표해 법인세 감세를 강력하게 주장해 온 요네쿠라 히로마사(米倉弘昌) 게이단렌 회장도 "법인세 감세분을 (복구)재원으로 돌리는 방안도 검토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하는 등 5%포인트의 법인세 인하는 대지진 피해로 인해 사실상 물 건너간 것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일본 정부는 작년 말 선진국 최고 수준인 40%의 실효법인세율을 5% 포인트 낮추고 고용촉진 세제혜택 및 환경투자 촉진을 위한 그린투자세제를 도입키로 하는 등 기업에 대한 다각적인 세제혜택 방안을 마련, 약 5,800억엔의 세수 감소를 예상했었다. 체르노빌 이후 최악의 원전사고로 남게 될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참사로 인해 그 동안 일본이 친환경 에너지정책의 주축으로 삼아 왔던 원전 정책도 원점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아졌다. 정부측은 원전 사고 이후에도 원전정책 포기에 대해서는 줄곧 부정적인 입장을 취해 왔다. 하지만 원전에서 누출된 방사성 물질이 대기와 바다는 물론 식품과 각지의 수돗물까지 오염시키는 등 사태가 일파만파로 확산되자 원전 정책을 고수하기 부담스러워진 것이 사실이다. 에다노 관방장관은 지난 24일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원자력발전소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크게 변하고 있다"며 "우선은 후쿠시마 원전 사태를 마무리 지은 다음 제로베이스에서 원전 정책을 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원전정책 포기 가능성을 시사했다. 경제주간 다이아몬드지는 최신호에서 "이번 사태로 일본 국민들의 뇌리에는 원자력에 대한 공포가 각인돼 버렸다"며 "오는 2020년까지 9기의 원전 증설 등 정부가 추진해 온 원전 정책은 전면 동결이 불가피한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