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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지금과 다를바 없는 조선의 '보통 사람들'

■ 고문서, 조선의 역사를 말하다(전경목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br>위자료로 엽전 35냥 받은 남편 노름에 빠져 패가망신한 양반…<br>당시 법·제도 등 담은 문건 찾아<br>조선 평민의 적나라한 일상 묘사

19세기 어느 을묘년, 최덕현이라는 자가 혼인 관계를 끝내고 아내를 높은 사람 집에 첩으로 보내면서 작성해 준 문서다. 전북대학교 박물관 소장. /사진제공=휴머니스트


'애통하구나. 가슴이 미어진다. 부부유별은 사람이 반드시 지켜야 할 윤리 중 세 번째로 큰 윤리인데, 무상하게도 아내는 나와 함께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동고동락해왔으나 뜻하지 않게 오늘 아침 나를 배반하고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갔다. … 그녀가 나에게 한 행위를 생각하면 칼을 품고 가서 죽이는 것이 마땅한 일이나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장차 앞길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분 생각해 용서하고 엽전 35냥을 받고서 영원히 우리의 혼인 관계를 파하고 위 댁(宅)으로 보낸다. 만일 뒷날 말썽이 일어나거든 이 수기를 가지고 증빙할 일이다. 을유년 12월 20일 최덕현 수표.'

이 수기는 1825년 또는 1885년 최덕현이 자신의 아내와 혼인 관계를 청산하고 어느 중인이나 양반댁의 첩으로 들여보내면서 작성해준 문서다. 최덕현은 그 대가로 일종의 이혼 합의금 또는 이혼 위자료 35냥을 받았다. '조선 시대'와 '이혼'이라는 두 단어는 괴리감이 있어 보인다. 여필종부 혹은 일부종사라는 이념에 따라 혼인한 여자는 반드시 남편을 따라야 하고, 그 남편과 일생을 같이해야 하는 사회에서 이혼이 쉬이 허락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수기를 실마리로 조선 후기 이혼과 재혼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을 추론할 수 있다.

'교지(敎旨) (왕의 명령)

황우영을 통훈대부 행통례원 인의로 임명함

광서 19년 11월

[뒷면]단골 김중섭

이 문서는 조선시대 관리 임명장인 고신(告身)이다. 이 뒷면에는 아주 작은 글씨로 인사 담당 서리의 이름이 적혀 있다. 대부분 고신 작성자의 이름 정도로만 여겨 가볍게 취급하고 만다. 그러나 이를 주목해 파고들면 절대 간단하지 않은 네트워크를 포착하게 된다. 뒷면에 적힌 '단골(丹骨)'이라는 두 글자를 단서로 조선 후기 지방 양반과 중앙 서리 사이의 은밀한 관계망과 시대적 변천사를 읽어낼 수 있다.

책은 이처럼 빛바랜 고문서 몇 장에 적힌 내용을 단서로 당시 백성의 일상사를 추적해 가는 과정을 담았다. 조선 시대 연구는 흔히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같은 관청 공식 사서 중심으로 출발하지만, 거기서 '보통 사람들'의 눈물과 웃음, 당대의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만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당대를 살았던 이들이 직접 작성한 고문서는 그래서 중요하다. 전경목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헌관리학과 교수는 사소하고 하찮아 보여 별로 주목받지 못한 이 고문서에 돋보기를 대고 차근차근 분석해냈다.



고문서에 등장하는 이들의 짧은 사연은 '이들은 왜 이랬을까?'라는 의문을 품게 하는 첫 단서다. 전 교수는 이 단서를 토대로 비슷한 내용을 담은 다른 문서나 당시의 법·제도·관습 등을 기록한 문건 등 '추가 증거'를 확보해, 마치 수사관처럼 하나의 사건에서 당시 평민들의 적나라한 삶과 그 시대 풍습, 역사를 추리해나간다.

고문서들에 등장하는 인간군상은 참으로 다양하다. 불륜 남녀, 자신을 내쫓고 시어머니에게 욕설까지 한 아내를 고소한 남편, 노름에 빠져 패가망신한 양반, 돈 주고 벼슬을 사는 공명첩이 실은 평민들은 원치 않았으나 나라에서 강매했다는 사실 등 다양한 일상사가 담겨 있다.

달랑 문서 한 장으로 시작했지만, 이 고문서에 담긴 사건 하나로 출발해 여러 사료를 토대로 퍼즐 조각 맞추듯 사건의 내막을 파악하고 시대적 맥락을 읽어내는 과정이 마치 한 편의 추리 소설을 읽는 듯하다. 딱딱한 역사서가 아닌 마치 한 편의 드라마를 감상하듯 조선의 민낯을 흥미롭게 관찰할 수 있는 책이다. 2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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