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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별장·신들의 궁궐… 머물고픈 도심속 정원

서울 전통정원 석파정·종묘

석파정, 인왕산 너럭바위 한눈에

별장 옆엔 노송의 자태가… 고요속 단아한 자연미 만끽

종묘, 왕들 신위 모신 정전까지 500m 이어진 울창한 숲길

서울 종로구 부암동 석파정이 인왕산 아래, 멀리 북악산이 마주 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탁월한 위치와 경관은 조선말 권력자들의 쟁탈전 대상이 됐다.

석파정의 서쪽 경계인 인왕산 기슭의 너럭바위. 코끼리바위로도 불린다.

종묘의 외대문을 들어선 후 보이는 길이 숲 속 사이로 안쪽 정전까지 길게 이어져 있다. 혼령들이 다니는 신로는 딛지 말라는 표식이 놓여 있다.

종묘 입구 부근에 있는 향나무. 부정을 없애고 정신을 맑게 한다고 해 즐겨 심었다.

우리나라의 정원은 인공적인 손길을 최대한 배제한다. 인간과 자연 사이의 경계를 짓지 않는다. 인간을 포함한 자연을 그대로 반영한 결과물이다. 뭔가를 자꾸 만들어 갖다놓는 중국·일본의 정원과는 확연히 모습을 달리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반만년 역사 이래 그랬을 것이다. 다만 현재로는 조선시대에 절정에 이른 정원의 규격으로 이를 관찰할 수 있다. 서울에서 전통적인 정원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식민지와 전쟁, 그리고 도시화를 겪으면서 하나둘 사라졌다. 그래도 기회는 있는 법이다. 서울 시내에서 조금만 눈을 돌리면 전통정원을 만날 수 있다. 전통정원은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사대부들의 정원, 왕들의 정원, 그리고 신들의 정원이다. 창덕궁 후원 같은 왕들의 정원이야 너무나 유명하기도 하고 다소 의례화된 면도 있다. 이번 회에서는 다소 익숙하지 않는 사대부와 신들의 정원을 살펴보기로 하자. 바로 부암동의 석파정과 종로의 종묘가 바로 그들이다.

◇석파정, 자연을 품은 '인간의 정원'=종로구 부암동 석파정(石坡亭)은 조선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흥근(1796~1870)이라는 사람의 별장(당시의 호칭은 별서·別墅)이었다. 바로 안동김씨 세도가의 한 사람이다. 집 뒤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삼계동(三溪洞)'이라고 새겨져 있는 것을 감안하면 처음에는 '삼계동정사(三溪洞精舍)'로 불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국왕의 외척이기도 했던 안동김씨 세력을 몰아내고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이 별장과 딸린 정원의 운명도 바뀐다. 대원군은 이를 계략으로 빼앗고 이름도 '석파정'으로 바꾼다. 앞산이 모두 바위(石)언덕(坡)이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김흥근은 북문 밖 삼계동에 별장을 갖고 있었는데 장안의 으뜸가는 명원(名園)이었다. 대원군이 그 별장을 팔라고 했으나 흥근은 거절했다. 대원군은 다시 청하길 '놀이에 하루만 빌려달라'고 했다. 흥근은 마지못해 허락했다. 대원군은 이때 임금(아들인 고종)께 한번 행차하기를 권해 모시고 갔다. 흥근은 임금이 머물렀던 곳을 감히 다시 쓸 수 없다 해 다시는 삼계동에 가지 않았다. 결국 이는 대원군의 소유가 됐다."

석파정은 이후 대원군 후손들에 의해 관리돼오다가 한국전쟁 뒤에는 가톨릭에서 운영하던 콜롬바고아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지금은 석파문화원이라는 데서 소유·관리하고 있다. 현재 석파정에 가려면 서울미술관을 통해야 한다. 서울미술관에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서 3층으로 오르는 엘리베이터를 타면 바로 석파정 입구에 다다른다.

석파정에 들어서면 신기하게 모든 소음이 사라진다. 아래에는 자하문터널을 드나드는 자동차의 소리로 가득 차 있으나 석파정 안은 고요 그 자체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나 하는 놀라움만 남는다.

흥선대원군 별장이었다는 건물을 가운데 두고 길이 나 있다. 길은 인왕산의 자락인 너럭바위(코끼리바위)로 이어진다. 너럭바위를 보면 인왕산이 바위들로 이뤄진 산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낼 수 있다. 그 비범한 생김새와 영험한 기운으로 소원을 이뤄주는 바위로도 말해진다고 한다.

석파정에는 바위가 셋이 있는데 너락바위 외에도 집 뒤에 '삼계동'이 쓰여진 바위, 그리고 집 앞에 '소수운렴암(巢水雲簾菴·구름 발 드리운 물 위의 암자)'이라고 쓰여진 바위가 그것이다. 집 옆으로는 늙어서 휘어진 노송이 너른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집 뒤 언덕에서는 키 큰 소나무들이 듬성듬성 운치를 만든다.

집 대청에 앉으면 오른쪽으로는 인왕산이, 왼쪽으로는 북악산 자락이 한꺼번에 눈에 들어온다. 단정한 고요 속에 사람들의 오가는 소리도 없이 자연을 느낄 수 있다.



◇종묘, 왕조와 함께한 '신들의 정원'=서울은 인간의 정원들과 함께 신들의 정원인 종묘(宗廟)도 함께 있다. 지하철 종로3가역에서 나오면 한참 공사 중인 종묘광장공원을 거쳐 종묘의 입구인 외대문을 찾을 수 있다.

서울 도심에서 대표적인 녹지는 궁궐이다. 도심개발 과정에서도 궁궐만큼은 옛스러움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시민들에게 여유를 준다. 반면 종묘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제사를 지내는 지역이라는 선입견만 빼버리면 어디에도 비할 데 없는 정원이 된다. 다만 원래 목적이 인간이 아닌 신들(조상신들)을 위한 공간이라는 것이 차이다.

외대문을 들어서면 키 큰 나무들로 울창한 흙길이 보인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이런 곳이 있다니. 도심임에도 바깥은 소음과 차단되고 오직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만 들린다. 길은 거의 일직선으로 종묘의 맞은편까지 500m가량 이어진다. 안쪽에 역대 왕들의 신주를 모신 정전과 영녕전이 있고 거기까지 가는 중간에 향대청·재궁·전사청 등 부속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종묘의 길은 다른 곳과 차이가 있다. 길 중간에 석판이 이어졌는데 모두 세 가닥이다. 가운데 길은 신로(神路)라고 조상의 혼령이 다니는 길이라며 딛는 것을 삼가라는 표식이 있다. 나머지 두 길은 국왕과 왕자가 각각 지나다녔다고 한다. 그럼 왕비는 어떻게 하나. 전통시대 종묘에서의 행사에는 여자의 출입이 금지됐다고 한다.

관람객들은 대부분 흙길을 따라 걷는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숲은 울창해지고 과거로 돌아가는 것 같다. 늘 인파로 붐비는 경복궁 등 궁궐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공간이다.

가장 대표적인 건물은 정전이다. 바로 역대 국왕들의 신위가 모셔져 있는 곳이다. 조선 초기 건축됐다가 임진왜란에 불타고 1608년 다시 세워진 것이 지금껏 남아 있다. 모두 합쳐 19칸인데 국내에 있는 목조건물 중 가장 긴 것이다. 현재의 용어로는 가로 101m다. 보통 카메라로는 전체가 담기지 않는 엄청난 길이다. 특이한 것은 종묘의 건물에는 현판이 없다. 신들은 알아서 자기 자리를 찾았을 테니 따로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참고로 조선왕조를 기준으로 할 때 신들의 정원은 두 가지다. 하나는 종묘고 나머지 하나는 왕릉이다. 왕릉은 무덤이니 당연히 교외에 있다. 하지만 제사를 지내는 사당은 생활공간에 가장 가까이 왕궁 옆에 둔 것이 지금의 종묘가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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