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미국의 대선 레이스가 시작됐을 때 누가 봐도 바로 직전 해에 걸프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공화당의 현직 대통령 조지 HW 부시의 재선은 당연시됐다. 이미 율리시스 그랜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프랭클린 루스벨트 등 전쟁 영웅이나 재임 기간 전쟁에서 이긴 대통령에게 압도적 지지를 몰아줬던 미국 유권자의 성향으로 볼 때 부시 대통령이 이기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러나 결과는 부시에 비해 비교가 되지 않는 경력을 가진 40대의 빌 클린턴 민주당 후보의 승리였다. 후발 주자였던 클린턴 후보는 본격 선거 운동기간 동안 1980년대 말부터 시작해 1990년대 이후 미국 사회에 깊게 드리워지기 시작한 '불경기'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이런 전략 아래 탄생한 선거 슬로건이 유명한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였다. 걸프전 승리보다 재정과 무역 쌍둥이 적자로 허덕이면서 침체하는 미국 경제의 어려움을 몸소 겪던 유권자들의 마음에 적중했다.
내년 총선과 2017년 대통령 선거 등 두 차례의 큰 선거를 앞둔 한국 사회에 이를 다시 적용해보면 "바보야, 더 큰 문제는 정치야"로 집약되는 것 같다. '51대49'라는 팽팽하고 해묵은 진영 갈등 속에서 그나마 유지돼 오던 우리 사회의 갈등 구조가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한계상황에 이르고 있다는 증거들을 우리 국민들은 지난 한 해 내내 목격했다. 되는 것도 안되는 것도 없는 정치권에 대해 이제는 불신을 넘어서 국회 '무용론'으로까지 치닫고 있다.
매년 연말의 일상은 한 해를 보내는 아쉬움과 뒤늦은 분주함으로 어수선하지만 올해는 유독 그 정도가 심하다. 이의 상당 부분이 여의도 정치권에서 진원하고 있다. 해를 넘기는 시한이 코앞인데도 임시국회가 열려 있고 주요 현안 법안 처리에는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는 답답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법안뿐인가. 당장 내년 총선의 기본 규칙인 선거구조차 지금 봐서는 내년에 획정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할 공산이 크다. 게다가 국회 협상의 한 축인 제1야당은 공동창업주가 따로 살림을 챙겨 나가며 극심한 내홍 양상을 보이면서 정치권에서 이 난국을 풀 주체가 누구인지도 불분명한 상황이다.
사태가 이 정도로 진행되면서 정치는 거들떠보기도 싫다던 민생들도 '억지 춘향'식으로 정치 싸움에 끌려 들어가는 분위기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최근 "(임시국회) 쟁점 법안 관련 회의를 하자"는 정의화 국회의장의 중재 제안을 거부했다. 법안 심의는 상임위원회가 중심이 돼야 한다는 논리를 대고 있지만 새로 뽑힌 이목희 새정연 정책위 의장은 사회보장기본법과 기초연금법 등 새정연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5~6개 법안을 협상 테이블에 추가하겠다고 밝혔다.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지 않은가. 공무원연금법과 국회법을 연계하던 때부터 새정연이 올해 대여 협상에 나서면서 내내 보여온 '법안 끼워 넣기' 전략이다. 문제의 본질을 오도하고 회피해온 방식으로도 너무 상투적이고 아예 법안 처리에 발목을 잡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현재 한국 사회의 가장 큰 화두인 '정치의 문제'를 일으킨 주범은 확실히 국회선진화법이다. 선진화라는 좋은 이름을 갖고 있지만 민주주의사(史)에서 유례가 없는 3분의2 찬성이라는 족쇄에 걸려 19대 국회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끝나게 만든 근본적인 이유다.
20대 국회를 구성하는 선거가 불과 100여일 앞으로 다가왔다. 사람을 바꿔야 하고 무능·무책임·무생산으로 일관한 19대 국회를 심판해야 한다. 선택의 고민은 각자 나름이겠지만 여야의 책임 떠넘기기를 구조화시키고 국회를 식물상태로 만든 국회선진화법은 반드시 바꿔야 한다. '탁상입법'으로 탄생한 불합리한 법을 그대로 두고 가자고 유혹하는 후보가 있다면 그것은 이 틈바구니에서 기득권을 이어가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분명히 구별해내야 한다.
/온종훈 논설위원 jhohn@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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