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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9월4일] <1492> 국방정부


SetSectionName(); [오늘의 경제소사/9월4일] 국방정부 권홍우 편집위원 ImageView('','GisaImgNum_1','default','260'); 1870년 9월4일, 프랑스 파리 시청 본관. 국민의회가 황제 나폴레옹 3세의 퇴위와 새로운 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이틀 전 끝난 프로이센과의 세당 전투에서 패전한 나폴레옹 3세가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공화파 의원들과 파리 시민들은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제2제정(帝政)을 버리고 공화정부를 세웠다. 이름하여 국방정부. 정권은 수 차례 바뀌었지만 2차 세계대전까지 존속한 프랑스 제3공화정의 출발점이다. 국방정부는 각 지방에 공문을 내려 보냈다. '우리는 최후까지 저항할 것이다. 각 지방도 궐기하라!' 파리 시민들은 '국민군'을 조직해 총을 들었다. 국방정부 수립 보름 후 파리가 프로이센군에 포위되자 내무부장관인 강베타는 기구를 타고 파리를 탈출, 투르에 도착해 지방의 병력을 모았다. 매일같이 2개 연대와 1개 포병 중대가 창설된 끝에 60만명의 군대가 새롭게 만들어졌다. 국방정부는 성공했을까. 그 반대다. 기아와 함께 병력ㆍ탄약도 부족했지만 분열됐던 탓이다. 호시탐탐 왕정복고를 노리는 왕당파와 재산가들은 프로이센과의 강화를 모색하고 강베타가 새로 편성한 군대마저 적대세력으로 여겼다. 결국 1871년 초 파리는 프로이센군의 손에 넘어갔다. 국방정부의 생명도 사실상 꺼졌지만 역사에 두 가지 흔적을 남겼다. 첫째는 파리코뮌 탄생. 프로이센에 끝까지 저항한 파리코뮌은 결국 진압됐으나 세계 최초의 노동자 정권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둘째는 세계공황. 평화협상 조건으로 프랑스에서 프로이센에 건너간 50억프랑이라는 돈은 유동성 과잉을 낳고 결국은 최초의 세계적 공황이라는 1873년 공황으로 이어졌다. 국방정부 멸망 당시 프랑스에서는 항전을 포기하고 보다 일찍 평화협상을 맺었다면 훨씬 가벼운 조건의 평화협정이 가능했다는 저항 무용론이 한동안 활개쳤다. 세월이 흐른 오늘날의 평가는 정반대다. 국방정부와 파리코뮌의 항거가 없었다면 현대 프랑스의 가치형성도 불가능했다는 게 주류다. 강이 바다로 흐르듯 역사의 긴 숨결은 순리를 배반하지 않는다. 혼자 웃는 김대리~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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