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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 스포츠로 울분을 달래다

■ 끝나지 않는 신드롬 (천정환 지음, 푸른역사 펴냄)<br>손기정 올림픽우승·美 프로야구 올스타 내한 등<br>일제시대 스포츠 신드롬을 통해 본 민족주의

식민지 시대 조선민중들은 스포츠로 민족주의를 함양 시켰다. 저자는 책을 통해 민족주의가 스포츠 신드롬으로 등장하는 현상을 말한다. 사진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의 경기장면.

‘미국 메이저리거들 서울에 오다.’ 한반도 전역에서 야구열이 높아 가던 1922년 12월. 실로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전미국직업야구단’, 다름아닌 미국 프로야구 올스타팀이 서울을 방문한 것이다. 그것도 우리 국가대표 야구팀과 경기를 치르기 위해서다. 이 미국 메이저리거들은 원래는 일본 도쿄를 들러 만주를 거쳐 상하이로 갈 예정이었지만, 조선 야구계는 이 엄청난 기회를 그냥 팽개치지 않았다. 조선체육회 이사며 전 YMCA 야구단 선수인 이원용이 일본에 건너가 간청에 간청을 거듭한 끝에 결국 미국팀 일정을 바꾸는데 성공했다. 메이저리거들이 조선에 내 준 시간은 딱 하루. 식민지 조선의 야구계가 목 빠지게 기다리던 미국 야구 선수들은 이미 어두워진 남대문역에서 차를 나눠 타고 조선호텔로 갔다. 이들 가운데는 훗날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된 뉴욕 양키즈의 웨이트 호이트(Waite Hoyt), 보스턴 레드삭스의 허브 페나크(H. Pennock) 같은 유명 선수들도 끼어있었다. 12월 8일 오후 2시. 드디어 용산 만철운동장에서 미국팀과 전조선청년회팀의 야구 시합이 열렸다. 스포츠 열기가 대단했던 때라 조선인들은 물론 소식을 듣고 찾아온 서양인들로 경기는 그야말로 빅 히트였다. 경기를 기획했던 이원용은 이날 투자액을 넘는 수익을 거두며 돈방석에 올라 앉았다. 첫 책 ‘근대의 책 읽기’에서 일제시대 책 읽기 열풍을 소개했던 현대문학 전문가 천정환씨가 이번엔 식민지 시대에 일어난 대중적 신드롬에 눈길을 돌렸다. 1922년 메이저리거들과의 야구 경기, 1926년 순종의 죽음을 계기로 번진 전국적인 애도 물결, 한반도를 뜨겁게 달구었던 1936년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 등 식민지 시대에 대중적 신드롬을 일으켰던 사건들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저자는 특히 손기정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이라는 사건에 긴 지면을 할애하며 식민지 백성의 한과 울분의 배출 창구 노릇을 했던 스포츠 열풍을 해부하고 있다. 한국팀 응원을 위해 광화문을 꿰 찬 것은 붉은 악마가 처음이 아니었다. 70여전 전 광화문은 손기정 선수 응원열기로 이미 한차례 뜨겁게 달궈졌다. 붉은 악마가 손에 태극기를 움켜쥐며 대형 전광판에 시선을 집중했다면 1936년 8월 9일 당시 광화문 거리 조선인들은 밤 11시부터 들려오는 라디오 실황중계에 귀를 곤두세웠다. 일제 식민지 통치로 손에 쥘 수 없었던 태극기는 마음 속에 품었다. 식민지시대 한반도를 열풍으로 몰아넣은 사건들을 흥미진진하게 펼쳐놓은 이 책은 그저 재미만을 겨냥해 쓰여진 것은 아니다. “1936 여름의 신드롬은 충분히 발전한 상업적 미디어, 일상화된 유행 현상과 그것을 열심히 추종하는 개인들의 존재, 그리고 민족주의적 대중 심리가 넘쳐 났기에 가능했다. 초이성적이며 비합리적인 우월감과 열등감이 범벅돼 나타나는 신드롬에는 슬프고도 우스꽝스런 대중의 열망과 음험한 국가이성, 냉철하기 그지 없는 자본의 논리가 배후에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방대한 자료를 통해 식민지 조선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여러 사건을 추적하는 저자의 눈길은 풍속사가의 유순한 시선과는 거리가 멀다. 식민지 시대 신드롬의 겉 모습 보다는 그 이면에 자리잡은 본질을 들춰내려는 흑심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책의 제목이 ‘이미 끝난 신드롬’이 아니라 ‘끝나지 않는 신드롬’인 것도 다분히 의도적이다. 저자의 표현대로 ‘인류가 근대에 길러낸 가장 위험하고 저질 스런 발명품 가운데 하나’인 민족주의가 스포츠 등의 신드롬을 통해 교묘히 고개를 내미는 현상을 경고하고 싶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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