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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 뛰어넘어야지, 걸려 엎어져서야…"
요즘 3세 경영인에 들려주는 아산의 금언
평생 모은 돈을 사업 실패로 날린 만 40세의 사업가. 자신은 물론 형제들의 집까지 팔았으나 감당할 수 없는 빚만 얻은 상태에서 재기가 가능할까. 아산 정주영은 해냈다. 재기를 넘어 한국 최대의 기업군을 일궜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자서전 제목처럼 아산은 숱한 시련에 봉착했으나 실패에 빠지지 않았다. 한국동란 직후인 1954년에 시작한 고령교 보수공사에 낸 적자를 갚아나가는 데 걸린 시간만도 20년. 빚을 비로소 청산했을 때 아산의 나이 60세였다. 환갑을 넘기고도 세계로 뻗어 나가는 눈부신 행보를 보인 아산의 힘은 바로 시련에서 나왔다.
고령사회로 진입한 한국 사회의 중장년층은 물론 최근 청와대 대기업 총수 모임에 첫선을 보인 3세 경영인들이 새겨들어야 아산의 금언이 있다. '시련이란 뛰어넘으라고 있는 것이지 걸려 엎어지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아산 정주영도 선친도 모두 집요했다. 강원도 통천에서 14세에 소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변호사가 되거나 큰돈을 벌겠다며 단행한 가출만도 네 번. 결과는 늘 미수에 그쳤다. 아산의 부친은 귀신같이 맏아들을 찾아내 집으로 데리고 갔다. 6남2녀의 장남이자 장손인 정주영이 농사를 지어야 집안이 편안해진다는 확신으로 아들을 찾아내 설득하고 농사일을 시켰다. 마지막 가출 이후 쌀가게에 취직한 아산은 특유의 성실성을 인정받아 가게를 인수한 후 미곡상으로 성장해나갔다. 집 떠난 지 7년 만에 금의환향한 아산은 부친에게 농사자금과 함께 논 2,000평을 사드리고 장가도 들었다. 삶이 편안해졌다.
그러나 아산은 고향에 돌아온 지 1년 만에 '여유 있는 농부의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사업을 찾아 서울로 올라왔다. 25세의 청년 아산이 주목한 사업은 자동차수리업. 자금이 문제였으나 쌀가게를 운영하며 알게 된 인연으로 변통할 수 있었다. 남의 돈으로 사업을 벌인 아산에게 두 가지 시련이 찾아왔다. 첫째, 애써 꾸민 공장이 홀랑 불에 탔다. 아산의 신용을 믿은 채권자가 거액의 자금을 또 빌려줘 재기에 나섰으나 두 번째 시련이 덮쳤다. 공장을 새로 지어야 하는데 조선총독부가 허가를 내주지 않았던 것. 아산은 여기에도 굴하지 않았다. 힘들 때면 네 번째 가출 직후 인천 부두에서 막노동하던 시절, 노동자합숙소에서 겪었던 빈대들을 떠올렸다.
잠을 청할 수 없을 정도로 물어대는 빈대를 피하려 밥상 위에서 잤으나 빈대들은 상다리를 타고 올라와 사람을 물어뜯었다. 밥상 다리 네 개를 물 담은 양재기에 넣어 빈대를 익사시키는 방법을 썼지만 소용없었다. 빈대들이 벽을 타고 천장에 올라가 사람을 목표로 떨어지며 피를 빨았기 때문이다. 아산은 그때부터 어려움에 봉착하면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 '빈대조차 장애를 넘으려고 전심전력으로 연구하는데 사람이 못할 것이 무엇인가.'
하루도 빠짐없이 일본인 관리를 쫓아다니며 설득한 끝에 겨우 수리공장 허가를 얻어낸 아산은 자동차 수리로 더 큰 돈을 벌었다. 고객들은 다소 비싸도 다른 공장보다 60%가량 수리가 빠른 아산의 공장에 차를 맡겼다. '공기단축이 곧 돈'이라는 아산의 경영철학은 이때부터 싹텄다. 일제의 기업정비령으로 1943년 아산의 수리공장이 강제 합병됐으나 자동차 수리업은 훗날 현대자동차 창업으로 이어졌다.
광복과 전쟁은 또 다른 기회를 주었다. 영어에 능통한 동생(정인영) 덕에 미군의 차량정비 수요와 신축 공사를 떠맡았다. 광복 직후 대형 15개사 밑에 3,000여개 업체가 이전투구를 벌이던 구도에서도 현대토건은 미군 공사를 도맡았다. 한겨울 방한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둘러볼 미군 묘지에 푸른 잔디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보리를 심어 푸르게 바꾸는 창조적 발상과 신용, 동생의 영어 회화 실력이 주효했다. 전쟁이 끝난 뒤 아산은 우리 정부가 발주하는 공사에 뛰어들었으나 최대의 시련을 만났다. 조폐공사 동래사옥 건설에서 막대한 적자를 내 미군들에게서 번 달러를 쏟아부은 것도 모자라 고령교 복구공사가 아산의 앞을 막았다.
정부가 지리산 일대에서 준동하는 빨치산을 진압하기 위해 군경 작전용 도로로 끊어진 고령교 복구공사를 발주하자 특허를 가진 고급인력을 고문으로 채용하고 관련 장비를 보강해 수주에 성공했으나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거의 파괴돼 기초만 남은 다리 부근에는 잔해물이 어지럽게 흩어져 복구작업을 방해했다. 걸핏하면 발생하는 장마와 급류가 교각을 덮쳐 자재가 쓸려가고 장비가 물에 잠겼다. 1년 동안 단 한 개의 기둥도 못 세우던 판에 인플레이션까지 닥쳤다. 정부의 통화량 증가 정책과 이렇다 할 시장조절 장치가 없는 전쟁 직후 상황에서 물가가 1년 만에 120배나 뛰었다.
결국 고령교 사업은 계약금 5,478만환에 적자 6,500만환으로 아산을 빚더미에 빠뜨렸다. 아산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정부 국책사업을 약속한 대로 완료해야 한다는 책임감, 손해를 봐도 신용이 더 중요하다는 철학으로 적자를 감수했다. 날마다 찾아오는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며 수익성이 높았던 미군 차량정비 사업을 매각하고 동생들의 집까지 팔아 공사비를 충당하는 한편 인건비는 사채를 얻어 겨우 지급했다. 사업 실패의 파장이 얼마나 컸던지 한때 한강에 투신하려 인도교를 서성거린 적도 있었다. 아산이 당시의 손해와 빚을 청산하는 데는 20년의 세월이 걸렸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이 단행한 8·3 사채동결 조치가 아산을 살렸다는 해석과 함께 사채시장의 큰손이던 한 여인이 죽어가면서까지 아산을 도왔다는 주장도 나오지만 확실한 사실은 한가지다. 신용을 지키기 위해 공사를 무리해서 완공하고 20년 동안 빚을 갚아나간 아산의 끈질김이 '실패를 실패가 아니라 비약적 성장을 위한 시련'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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