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칠레와 처음으로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었지만 이후 대표적인 관세인하 품목인 칠레산 와인 소비자 가격은 오히려 오르는 기형적인 경험을 했다.
'몬테스알파' '1865' 등 칠레의 대표적인 와인들은 수입원가가 7~8달러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만 유독 4만~5만원이 넘는 높은 가격이 책정됐다. FTA로 칠레산 와인에 부과되던 15%의 관세는 철폐됐지만 유통과정에서 유통업자들이 마진을 크게 남기며 FTA 효과를 불식시켰기 때문이다.
한ㆍEU FTA 체결 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수입차에 부과되는 관세가 8%에서 5.6%로 낮아졌는데도 유럽 수입차 업체들은 한국 소비자들의 수입차 선호도를 믿고 꿋꿋하게 고가 정책을 그대로 유지했다.
한미 FTA가 발효되면서 정부는 국내 소비자물가 안정에 FTA가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또 향후 15년간 대미 무역수지 흑자도 연평균 1억3,800만달러 증가할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이 같은 정부의 예상은 지나치게 낙관적이라는 평가도 적지 않다. 관세인하 효과를 소비자가 제대로 느끼기도 전에 유통업자의 배만 불리게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미국 경기둔화를 고려할 때 대미 무역수지 역시 정부 예상치보다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14일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한미 FTA 발효로 당장 식탁물가에서 가격인하 효과를 보는 품목들은 발효 즉시 관세가 없어진 체리ㆍ건포도ㆍ포도주스ㆍ와인 등이다. 롯데마트의 한 관계자는 "건포도는 재고가 모두 소진된 후에는 지난해 가격보다 12~13%가량 저렴한 가격에 판매될 예정이며 오는 5월부터 본격적으로 판매가 시작되는 체리는 지난해보다 평균 10%가량 저렴해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장 한미 FTA로 가격인하 효과를 체감할 수 있는 것은 이들 몇 개 품목에 그칠 것으로 전망된다.
의류ㆍ가방류도 관세가 바로 철폐되지만 이들 품목의 경우 인건비가 싼 제3국에서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대부분의 미국 브랜드 상품들이 한미 FTA 대상에서 빠질 가능성이 크다. 이밖에 식탁물가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품목들의 관세는 5~10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인하되는데 인하 단계에서 바로 소비자들의 체감물가 인하 효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예컨대 국내 수입 삼겹살 시장에서 43.7%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미국산 생삼겹살의 경우 관세가 10년에 걸쳐 매년 약 2.2%씩 점진적으로 인하되기 때문에 유통업자 입장에서는 매년 소비자가격 인하 필요성을 느끼지 않게 될 가능성도 있다.
자동차의 경우도 관세가 인하되지만 미국차가 전체 수입차 판매량의 8%에 못 미쳐 시장에 미치는 효과는 미미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다만 미국에서 생산한 일본차나 독일차는 FTA 효과를 볼 수 있어 가격인하 요인이 있다.
정부가 장밋빛 전망을 내놓고 있는 대미 무역수지 개선 효과와 관련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FTA 반대론자들은 벌써부터 한ㆍEU FTA 무역수지 효과를 거론하면서 정부의 한미 FTA 낙관론을 비판하고 있다.
실제 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7~11월 우리나라의 대EU 수출은 1년 전 같은 기간보다 8.5%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FTA 발효 이후 오히려 무역수지가 악화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유럽 재정위기라는 특수한 상황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에 FTA 효과를 무작정 평가절하할 수는 없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한미 FTA와 관련해서도 무역수지에 긍정적인 요인과 부정적인 요인이 상존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미국 경제가 여전히 둔화조짐을 보이고 있는데다 미국이 올해 말부터 재정긴축에 돌입할 것으로 보여 수입 시장의 파이 자체가 줄어들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다만 경기둔화 속에서는 가격에 대한 민감도가 높아지는 만큼 관세가 철폐된 우리 상품의 경쟁력이 더 높아질 수 있다는 긍정적인 전망도 나온다.
박현수 삼성경제연구소 글로벌연구실 수석연구원은 "미국 경제가 최근 회복세이기는 하지만 글로벌 환경이 여전히 불확실해 우리 상품의 수출증가 효과도 제한적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면서도 "경기가 안 좋을수록 가격이 중요한 변수가 되는 만큼 우리 상품이 미국 시장 안에서 경쟁하는 데는 분명 유리한 환경이 조성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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