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검색
팝업창 닫기
이메일보내기

[오늘의 경제소사/3월31일] <1357> 탕헤르 사건


SetSectionName(); [오늘의 경제소사/3월31일] 탕헤르 사건 권홍우 편집위원 ImageView('','GisaImgNum_1','default','260'); 1906년 3월31일, 모로코의 항구 탕헤르(Tangier). 모로코를 사실상 지배하던 프랑스가 경악할 만한 사건이 일어났다. 독일제국의 카이저(황제) 빌헬름 2세의 전격방문 때문이다. 함대를 동반한 채 탕헤르에 나타난 빌헬름 2세의 행보는 거침없었다. 프랑스에 대들던 술탄 압둘 아지스와 만나 모로코의 완전독립과 대외개방을 지지한다고 선언, 모로코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독일 황제가 왜 모로코에 나타났을까. 지정학적인 전략 요충지도, 무역에 꼭 필요한 상업지역도 아닌 탕헤르에 입항한 이유는 세 가지. 급성장하는 독일 해군을 위한 석탄보급 기지를 확보하고 아프리카 분할에서 지분을 높이는 동시에 영국-프랑스 동맹체제를 흔들기 위해서다. 견원지간이던 영국과 프랑스가 1898년부터 평화조약을 맺고 군사동맹으로까지 발전하자 동맹의 견고성을 시험하기 위해 황제의 전격 방문이라는 카드를 꺼냈다. 빌헬름 2세는 프랑스를 압박하면 영불 관계에도 지장이 있을 것으로 여겼지만 오산이었다. 예기치 못한 사태에 직면한 프랑스는 반(反)독일 경향이 강한 외무장관을 해임하는 한편으로 영국에 기댔다. 영국에 대(對) 독일 공동대응과 유사시 군사행동까지 약속 받은 프랑스는 모로코 문제를 국제회의장으로 끌고 갔다. 빌헬름 2세의 탕헤르 방문으로 불거진 모로코 위기를 논의하기 위해 1906년 4년 소집된 알헤시라스 회담은 영국과 프랑스가 의도한 대로 흘러갔다. 13개 국가 중 11개국이 프랑스를 지지해 독일의 의도는 무산되고 말았다. 독일은 1911년에도 모로코에 군함을 파견하며 2차 모로코 위기(아가디르 사건)를 일으켰지만 끝내 영불 동맹을 깨뜨리지 못했다. 국제적으로 고립된 독일의 선택은 전쟁. 탕헤르 사건은 1차 대전으로 향하는 첫 단추였던 셈이다. 혼자 웃는 김대리~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

서울경제를 팔로우하세요!

서울경제신문

텔레그램 뉴스채널

서울경제 1q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