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45년 3월 31일 '한스 피셔'가 자살했다. 그는 생을 마감하기 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저명한 생화학자였다. 이보다 28년 전인 1919년 7월 15일에는 '에밀 피셔'가 자살했다. 그 역시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화학자였다. 공교롭게도 '피셔(Fischer)'라는 이름을 가진 노벨 화학상 수상자 둘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 더 놀라운 사실은 에밀 피셔가 자살하기 10년 전, 그의 옆에는 한스 피셔가 조수로 활동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에밀 피셔는 1881년부터 퓨린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퓨린은 DNA의 성분을 만드는 중요한 물질이다. 우리가 많이 먹는 육류, 고등어와 멸치 같은 등푸른 생선, 시금치, 아스파라거스, 콩 등에는 퓨린과 유사한 화합물이 많이 포함돼 있다. 그는 또 포도당과 과당 같은 당을 연구해 당시 알려진 모든 당의 분자구조를 결정했다. 작대기와 원소 기호를 이용해 3차원의 복잡한 분자구조를 2차원으로 표현하는 '피셔 투영법'도 그가 만든 것이다. 이 같은 공로로 그는 1902년 노벨 화학상을 수여했다. 에밀 피셔가 연구에 매달릴 때 그의 옆에는 한스 피셔가 있었다. 한스는 1904년 화학 박사 학위를, 1906년에는 의사 자격증을 딴 수재였다. 1908년 뮌헨대에서 의학박사를 딴 그는 베를린대로 가서 1910년까지 3년간 에밀 피셔의 조수로 일했다.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두 피셔가 드디어 인연을 맺은 것이다. 1930년 한스는 적혈구 색소인 헤민과 클로로필의 구조를 연구한 공로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혈액이 붉은 이유는 적혈구에 들어있는 헤모글로빈이라는 성분 때문이다. 헤모글로빈이 산소와 만나 산화되면 메타헤모글로빈이 된다. 메타헤모글로빈 안에 있는 색소 헤마틴이 산과 결합한 것이 헤민이다. 헤민은 범죄 수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CSI 등의 과학수사물을 보면 혈흔을 알아보기 위해 루미놀이라는 액체를 뿌리는 장면이 나온다. 루미놀과 만난 혈액은 파란색 형광빛을 내며 '여기 피가 있어요'라고 속삭인다. 서로 다른 지역에서 태어나 다른 대학을 졸업하고 비슷하지만 다른 연구를 한 두 피셔. 그러나 사제관계와 노벨 화학상으로 한 번 맺어진 이들의 인연은 둘 다 자살함으로써 삶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끈질기게 이어졌다. 1973년 또 다른 피셔가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금속과 유기물질의 결합 메커니즘을 밝혀낸 공로로 상을 받은 그의 이름은 에른스트 오토 피셔. '피셔의 저주'가 한스 대에서 끝났기를 간절히 바란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