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ㆍ칠레 자유무역협정(FTA) 발효(2004년 4월) 후 1년이 지난 지금 당초 우려와는 달리 칠레산 농수산물이 쏟아져 들어와 우리 농촌을 피폐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FTA가 발효한 지난해 4월부터 12월까지 칠레산 농수산식품 수입량은 금액 기준으로 전년 대비 52.1% 증가했다. 그러나 포도ㆍ돼지고기 등 일부 품목에 한정돼 국내 농업ㆍ축산업ㆍ수산업 전반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겉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내면을 보면 사정이 다르다. 한ㆍ칠레 FTA 발효 이후 우리 농촌은 이미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겪고 있다. 포도ㆍ복숭아ㆍ키위 등 3개 품목의 전체 재배면적 중 무려 24.6%가 사실상 폐업한 것이 단적인 예이다. 과거 바나나 수입 전면 개방 이후 제주도의 과수농가 대부분이 감ㆍ귤 농장으로 전환했던 경험도 있다. 한ㆍ칠레 FTA를 시작으로 점점 높아져 가고 있는 농수산물 개방의 파고는 우리 농촌에 ‘경쟁력 제고를 통한 변신’이라는 사활이 걸린 화두를 던지고 있다. ◇칠레산 농수산물, 돼지고기ㆍ포도주에 집중=농림부가 FTA 체결 이후 지난해 12월까지 칠레산 농수산물 수입 현황을 분석한 자료를 보면 큰 영향이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2004년 4월부터 12월까지 총 수입량은 6,348만달러로 52.1% 늘었다. 이 중 돼지고기(금액기준으로 71.8% 증가), 포도주(〃 173.3%), 키위(〃 64.1%) 등 3개 품목이 상승을 주도했다. 올 1월 기준으로 수입된 칠레산 농수산물의 품목별 비중을 살펴봐도 돼지고기(48.8%), 포도주(11.5%) 등 2개 품목이 60.3%를 보이는 등 특정상품에 집중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일정 농림부 농업협상과 과장은 “돼지고기는 광우병 파동으로, 포도주는 국내 소비가 증가해 자연스럽게 칠레산 수입이 증가한 것”이라며 “칠레 FTA 타결로 인해 국내 농가가 큰 타격을 입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FTA 1년은 미풍, 닥쳐올 파고는 더 크다=농촌경제연구원의 한 관계자는 “한ㆍ칠레 FTA를 1년만 놓고 보면 우리 농업에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고 강조했다. 국내 농수산물에 대한 보호벽이 아직까지 높기 때문이다. 문제는 보호벽이 곧 무너진다는 데 있다. 칠레산 농수산물의 경우 2009년 4월부터 단계적으로 관세가 철폐돼 2014년에는 완전 철폐된다. 4년 뒤부터는 일부 품목을 시작으로 무관세 칠레산 상품이 국내에 쏟아져 들어온다. 이를 반영하듯 한·칠레 FTA로 타격이 우려되는 포도·복숭아·키위 등 3개 품목의 과수농가를 대상으로 지난해 폐업 신청을 받은 결과 전국적으로 1만2,644개 농가가 폐업을 신청했다. ◇돈 지원보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농수산물 구조조정과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정부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한ㆍ칠레 FTA에 따른 발전기금으로 2010년까지 1조2,000억원을 조성,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정부는 또 2004년부터 2013년까지 총 119조원을 지원, 농가의 경쟁력 제고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문제는 우리농가의 현실을 볼 때 자칫 ‘돈 먹는 하마’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점이다. 농지를 담보로 빌린 돈이 12조원에 이른다. 호당 농가부채가 92년 569만원에서 2003년 2,662만원으로 367% 증가했다. 농업 성장률은 가격하락과 인건비 상승 등으로 이미 2002년부터 마이너스로 돌아선 상태다. 제반 여건을 감안해볼 때 현재의 단순 ‘돈’ 지원보다 선택과 집중이 요구된다는 것. 한국개발연구원의 한 관계자는 “재정지원을 통한 전체 농가의 소득 보전ㆍ유지는 헛된 낭비만 초래할 수 있다”며 “사양 품목과 육성 품목을 나눈 뒤 특정 농수산 산업에 대한 지원을 집중하는 게 우리 농가의 살 길이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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