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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7월 27일] <1759> 베른하르트 작전


‘5파운드 이상 지폐를 모두 신권으로 교체하거나 발행을 중단한다.’ 1944년 9월 초 잉글랜드은행이 내린 결정이다. 전쟁이 한창일 때 신권을 도입한 것은 위조지폐 때문. 나치가 제작한 위조지폐가 대거 유입되는 통에 연 50%의 인플레이션 속에서 경제가 파탄지경에 이르자 내놓은 고육책이다. 히틀러가 위폐를 구상한 시기는 영국 본토에 대한 공습작전이 실패로 끝난 1940년 겨울부터. 각국의 화가와 인쇄기사ㆍ은행직원 등을 잡아와 포로수용소에 설비를 갖추고 1942년 말부터 정교한 위폐를 찍어냈다. 지폐를 바늘로 찔러 위조 여부를 확인하는 영국인들의 습성까지 감안해 제작된 위폐는 4개 권종, 약 1억3,011만파운드어치. 나치 친위대의 크뤼거 베른하르트 소령이 실무책임을 맡아 ‘’으로 불리는 국가적 조직범죄의 결과물인 위폐는 품질에 따라 네 종류로 분류돼 쓰였다. 조악한 위폐는 비행기로 전선에 뿌리고 완성도가 높은 위폐는 교역에도 활용했다. 히틀러의 위조지폐는 영국은 물론 파운드화가 통용되는 지역에까지 퍼지며 물가앙등과 혼란을 불러 일으켰다. 미국 달러화는 간신히 화를 모면했다. 포로수용소의 위폐개발팀이 완벽한 위조달러를 만들어낼 즈음, 전쟁이 예상보다 빨리 종결된 덕분이다. 패전 직전 나치는 위폐 제작원판을 파기하고 남은 위폐를 남모를 장소에 버려 범죄의 흔적을 지웠다. 나치 잔당은 위폐의 존재를 부인했으나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1959년 7월27일,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위폐를 끈질기게 추적하던 서독 잡지 슈테른지의 기자가 오스트리아 토플리체 호수의 78m 바닥에서 위폐 묶음을 찾아낸 것이다. 슈테른지는 ‘독일의 치부를 드러냈다’는 극우세력의 협박을 받았지만 이겨냈다. 불편하더라도 진실은 결국 승리한다. /권홍우ㆍ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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