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과 일본이 납치자 문제에 합의하며 관계개선 의지를 보임에 따라 대북 압박에 힘을 쏟던 한국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다. 동북아 패권을 둘러싼 미일과 중·러 간의 대립구도 속에 남북관계마저 출구를 찾기 어려워 외교적 딜레마가 심해지는 모습이다.
◇뒤통수 맞은 한국 외교=30일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일본 측은 북일 간 합의 내용을 공식발표 직전에야 우리 측에 통보했다. 정부로서는 북일 간 협상이 한미일 3각 공조 틀 안에서 이뤄진다고 믿었지만 뒤통수를 맞은 셈이다. 미국 또한 이날 "일본의 투명한 납치 문제 해결 노력을 계속 지지한다"고 밝혀 하소연할 데도 없어졌다.
이와 관련해 정부 책임론이 불가피해 보인다. 박근혜 정부는 출범 이후 대미외교와 대중외교에 자신감을 보이며 지금까지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형태로 북한을 압박해왔다. 북핵 문제와 관련해서는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유엔에서 "북한이 핵실험을 할 경우 중국이 가만 있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는 등 중국 의존적 모습을 보였다.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추진에 대해서는 미일 동맹의 틀 안에서 진행된다는 이유로 이를 묵시적으로 수용, 미국에 기대는 모습이었다. 일본 측이 이번 북일 합의를 인도적 사안이라고 강조하고 있어 미중 양국만 바라보던 한국 외교는 딱히 손 쓸 방법이 없어졌다.
지난달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에 방한 일정을 무리하게 끼워넣은 것이 부메랑이 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당시 정부는 대북 압박과 일본 과거사 문제에 대한 경고 차원에서 오바마 대통령의 방한을 강력히 추진, 이를 성사시켰다. 하지만 북핵 문제나 일본 과거사 문제에 대한 진척 없이 오히려 북일 간의 유대만 강하게 했다는 평가다. 오바마 방한의 대가 중 하나로 분류되는 미국 미사일방어(MD) 체계 편입 압박도 나날이 거세지고 있다. 정부는 "미국 MD 체계 도입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입장이지만 31일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한미일 국방장관 회담에서 어떤 식으로든 MD 문제가 거론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와 관련, 대일외교의 강약조절을 통해 일본을 껴안아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하종문 한신대 일본지역학과 교수는 "위안부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한일 국장급 회담은 난항을 겪고 있는 반면 북일은 합의점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양쪽의 성과가 크게 대비될 수밖에 없다"며 "대일정책과 관련해 지금처럼 경직되게 접근하지 말고 거시적 안목으로 유연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북한은 일·러 관계개선으로 돌파구. 우리 주체적 외교역량 키워야=북한이 일본과의 관계개선이라는 바람을 타고 중국과의 관계개선에 나설 수 있는 것도 우려되는 부분이다. 북한이 이번 합의로 대중 의존 외교를 언제든 탈피할 수 있다는 신호를 줘 한반도 안정을 중요시 여기는 중국 측을 다급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또 중국의 요청에 따라 4차 핵실험을 감행하지 않은 만큼 그에 대한 반대급부를 중국 측에 꾸준히 요구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이 러시아와의 관계개선을 통한 출구 찾기 전략을 병행할 수 있다는 점도 주의할 부분이다. 실제 러시아 극동개발부 장관이 지난 3월 방북하는 등 북·러 관계가 최근 급격히 좋아지는 모습이다. 김흥규 아주대 정외과 교수는 "북한은 러시아와 경제협력을 추진해 국제사회의 압박을 비켜갈 수 있게 하는 구멍을 만들고자 할 것"이라며 "특히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한 우리 정부의 태도를 러시아 측이 못마땅하게 여겼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북한에 힘을 실어주는 정책을 내놓을 수 있다"고 밝혔다.
결국 남북관계 개선을 통한 해법이 대안으로 거론된다. 북한이 핵보유를 기정 사실화한 상황에서 한결같은 대북 압박책보다는 유화정책을 병행, 대북 리스크를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지금까지 우리가 북한을 포위하는 전략을 취해왔는데 이번 북일 간 협의로 오히려 우리가 포위된 형국"이라며 "결국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통한 상황 변화이며 미국이나 중국에 의존해서는 우리의 영향력이 갈수록 줄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밝혔다. 다만 북한이 미일과 중·러 간의 대립구도가 형성된 현 상황을 대남 압박용으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아 당분간 외교적 활로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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