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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 포커스] 영광과 압박의 자리 은행 지점장, 그들의 삶은…

저금리·IT발달로 권한↓… 외부경쟁은 갈수록 치열<br>전결권은 뺏기고 책임만 확대

서열식 성적표 공개에 숨막혀… 고객들 집사 역할도 마다 않아

은행의 꽃 수식어는 옛말


국내 시중은행 2년 차 지점장인 이동건(가명)씨의 하루는 거래처 방문에서 시작된다. 그는 올해부터 나름의 원칙을 만들었다. 오전에는 최소 2곳의 기존 고객을 방문한다. 금리경쟁이 심해지자 이탈고객이 늘었기 때문이다. 오후에는 최소 4곳 이상의 중소기업을 찾기로 했는데 실계약으로 이어질 확률은 5%가 채 못 된다.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실적 순위는 여전히 하위권이다. 이씨는 곧 열리는 전국 영업점장회의가 두렵다.

최근 시중은행들이 대부분 지점장 인사를 완료했다. 은행 지점장은 은행의 꽃이라 불린다. 이 수식어에는 과거의 영광이 서려 있다. 고속성장 시대에 지점장 권한은 막강했다. 자금수요는 넘쳐났고 지점장은 전결권이라는 보도를 쥐고 있었다. 그러나 경제성장세는 꺾이고 자금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전결권으로 대표되는 권한은 사라지고 실적 부진에 따른 책임만 확대됐다. 저금리가 뉴오더로 등장함에 따라 내외부 경쟁은 더욱 심화됐고 그만큼 지점장의 권한은 위축됐다.

은행의 꽃이라 불리던 지점장의 낙화는 영업환경 변화에서 비롯됐다.

우선적으로 정보기술(IT) 기술의 발달은 지점장의 권한을 앗아갔다. 전결권이 대표적이다. 여신집행권이 온전히 본점 몫으로 돌아가자 지점장의 전투력은 급하락했다.

저금리가 만연해지면서 내외부 경쟁은 보다 치열해졌다.

국내 모든 시중은행은 전국 영업본부 소속 지점의 실적을 날마다 공표한다. 이 성적표에는 예·적금, 대출은 물론이고 신용카드 신규발급, 방카슈랑스 취급 실적 등이 순위대로 나열돼 있다.

이를 대하는 시선은 두 개로 엇갈린다.

어떤 지점장들은 성과주의 문화가 정착된 만큼 내부경쟁을 위해서라도 실적공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A은행 지점장은 "순위표를 받지 않으면 내 성적을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 경쟁심을 고취 시키는 데 가장 유용하다"며 "핵심성과지표(KPI)에서 부족한 부분을 바로바로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실적이 뒤처지는 지점장들에게 그날의 성적표는 공포 그 자체다. 특히 실적평가는 상대평가로 이뤄진다. 일정 수준을 채우면 모든 대상자가 살아남는 절대평가와 달리 누군가는 반드시 목록에서 배제돼야 한다는 뜻이다. 통상적으로 시중은행들은 관리대상이 되면 지점장 직위를 박탈하고 후선으로 배치해 재교육을 받게 된다. 이 과정에서 수치심을 느낄 수밖에 없다. 재교육을 받고 다시 지점장으로 복귀할 가능성이 지극히 낮다는 점에서 관리대상으로 지목됐다는 것은 사실상 은행을 떠나라는 말과 같다.

내부 장애물은 이뿐만이 아니다. 시중은행 점포에서는 '지포부'라는 말이 유행한다. '지점장이 되기를 포기한 부지점장'의 약자다. 지점장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인 이들은 승진을 포기하고 지점장 요구에 잘 따르지 않는다. 승진을 포기한 자들 앞에서 지점장의 고유권한인 인사고과는 무용지물이다. 오히려 딱 할 일만 하고 알게 모르게 지점장 명령에 반기를 들다 보니 지점 분위기를 해치기 일쑤다.

B은행 지점장은 "지점실적이나 부실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지점장만 지게 되기 때문에 지점장이 오히려 아래 직원들의 눈치를 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며 "거칠게 말해 부하직원이 개판을 쳐도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데 그럴 때면 자괴감이 들 정도"라고 말했다.

내부경쟁보다 더 두려운 것은 외부경쟁이다.

C은행에서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 인근 점포는 대표적인 '속 빈 강정'으로 통한다. 이른바 강남 3구에 입점해 있어 실속 있는 점포로 보이지만 속내를 까보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 관내에는 최근 10년간 신규업체가 한 곳도 없었다. 자금수요는 멈췄는데 동일한 점주권 안에서 5개 시중은행이 경쟁한다. 지점 실적을 점프시키기 위해서는 외형과 수익을 모두 노릴 수 있는 중소 기업체가 중요하다. 이 부분을 채울 수 없다 보니 지점장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기존 업체를 지키는 것뿐이다. 금융 주도권이 전적으로 자금수요자에게 있다는 뜻인데 이 때문에 관내행사가 있을 때마다 불려다니기 십상이다.

C 시중은행 지점장은 "점주권 내 중소기업 사장들끼리의 모임이 있는데 행사가 있을 때마다 불려다닌다"며 "이들이 요청해온 일들을 처리해주다 보면 마치 집사라도 된 듯한 기분"이라고 말했다. D 시중은행 지점장은 "지점장으로 승진하면 아예 연봉에서 1,000만원 정도는 따로 떼 영업비용으로 분류해놓는다"며 "실적을 채우고 다음 단계로 승진하기 위해서는 사비를 쓰는 일쯤은 당연한 일이라고 봐야 한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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