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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꽃피우고 서민과 중산층에 희망을 주는 사회를 만들겠습니다. 하나의 민족을 회복하고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며 함께 잘사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손학규(65) 전 민주당 대표가 정치ㆍ경제적 민주주의와 남북 화해ㆍ협력을 위해 애썼던 고(故)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에게 바친 조사다. 상가와 장지를 내내 지켰던 손 전 대표는 친구이자 동지를 떠나 보낸 허탈감과 애달픔에 몸부림쳤다. 두 사람은 고(故)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서울대 65학번 운동권 트리오로 꼽혔다.
'미완의 개혁가'였던 김 전 의장과 달리 손 전 대표가 대권을 잡고 개혁의 나래를 펼지는 두고 볼 일이다. 정의를 외치던 열정이 있고 지도자로서 훌륭한 경력을 쌓았지만 대중적으로 와우팩터(wow factorㆍ사람들을 흥분시키는 요소) 부분이 약하고 대표를 지냈지만 당내 리더십이 탄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호등에 비유하면 현재 '황색불'인 셈인데 '파란불'이 켜질지 '빨간불'로 바뀔지는 변수가 많아 현재는 미지수다.
◇강점:야권통합을 이뤄낸 뚝심과 안정감=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과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 김두관 경남지사 등 야권 대선후보군 중 손 전 대표는 당 대표를 1년 넘게 하며 민주당 지지층과 정서적 유대감이 나름대로 형성돼 있다. 경기도지사, 보건복지부장관, 4선 의원 등 지도자로서의 경력도 훌륭하다. 그만큼 안정감이 있다. 특히 우여곡절을 딛고 뚝심으로 야권통합을 일궈냈다. 지난 2007년 대선과 2008년 총선에서 대패했던 야권 승리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한나라당 출신이기는 하지만 학생운동과 노동운동ㆍ빈민운동을 하며 불의에 저항하고 헌신한 것도 훌륭한 스토리텔링의 소재가 될 수 있다. '손학규의 민심대장정, 그 땀의 기록'이나 '대한민국, 손학규를 발견하다'라는 책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약점:좀처럼 오르지 않는 대중적 인기=대중적 인기가 떨어진다. 특히 20~30대에 통할만한 매력포인트가 약하다. 소위 와우팩터가 부족하다는 평가다. 대표로 선출되고 분당에서 승리할 때 각각 지지율이 올랐다 다시 빠졌는데 상승동력의 계기를 마련하기가 쉽지 않다. 교수 체질을 벗지 못해 기자들과 식사할 때도 강의식으로 설명하는 경향이 있다. 젊은 층의 고민에 공감하고 배려하는 안 원장과 대비된다. 소탈하고 성실하며 진정성이 있지만 결단을 내릴 때 독단적인 경향도 없지 않다.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처음부터 후보 영입에 무게를 둬 당내 극심한 반발을 초래한 것이나 이후 야권통합을 밀어붙일 때 사전에 당내 의원이나 당원들에게 별다른 양해 절차를 구하지 않고 결정하려 한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익명을 요구한 민주당의 한 초선의원은 "정치공학적으로 이해득실을 덜 따진다고 해석할 수도 있으나 당내에 완전히 동화되지 못하고 리더십이 약하다고 볼 수도 있다"고 평했다.
◇기회:야권주자 중 돋보이는 안정감과 경륜=현재 상황에서는 자력으로 대권 쟁취는 쉽지 않다. 안 원장 등 다른 주자들이 검증 과정을 통과하지 못하거나 대중적 인기가 식어 국민들이 차분하게 야권후보를 들여다볼 때 기회가 올 수 있다. 안보 등 새로운 이슈가 계속 터지면 야권에서도 손 전 대표처럼 안정감과 경륜 있는 인물이 부각될 수 있다. 야권의 유력주자들이 낙마할 때 그가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야권 선발투수들이 강판당할 경우 나설 수 있는 대체재인 셈이다. 당장 4ㆍ11 총선에서 적지 않은 역할과 기여를 하는 것이 급선무다. '박근혜 현상'의 저자인 이철희 민주정책연구원 부원장은 "손 전 대표는 화합과 통합의 이미지가 강점이고 박근혜 한나라당 비대위원장은 과제가 닥쳤을 때 적시에 해결하려는 자세가 앞선다"고 비교했다.
대중이 원하는 리더십을 선보여야 하는데 스타일을 쉽게 바꾸지 못한다. 이럴 경우 정치승부를 걸 만한 요인이 별로 없다. 4ㆍ11 총선을 지휘하는 것도 아니고 그의 지역구(분당)에서 재차 승리해도 PK(부산ㆍ경남)처럼 야권 대선 승리의 교두보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힘들다. 특히 여전히 당내 기반이 별로 없는 것도 큰 문제다. 대표 시절 손학규 사람으로 통했던 의원 중 지금까지 확실한 손학규맨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인생 스토리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는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을 하면서 수배와 투옥을 당했다. 경기중고 시절 밴드와 연극을 했고 서울대 정치학과에 들어간 뒤 후진국문제연구회를 조직하는 등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이 과정에서 무기정학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 구로공단에서 노동운동을 했고 청계천 판자촌에서 기독교 빈민운동을 하면서 지난 1973년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돼 1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 받았다(2심은 무죄). 1975년 수배를 피해 철공소에 1년 이상 위장취업을 했다. 수배기간 중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은 평생의 한이다. 손 전 대표가 세 살 때 남편(교장선생님)을 불의의 사고로 떠나보낸 그의 어머니는 힘든 농사일을 하며 10남매를 키워냈다. 1977년부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 인권운동을 하다 1980년 서울의 봄이 오자 "넓은 세상에서 공부하겠다"며 영국 브리스톨대 신학부로 유학을 떠났다. 이어 옥스퍼드대로 옮겨 1987년에 정치학 박사학위를 딴 뒤 인하대와 서강대에서 정치학 교수를 했다. 1992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영입 제안을 받고 경기도 광명에 출마해 내리 3선을 하다 경기도지사에 당선돼 도정을 잘 펼쳐 호평을 받았다. 한나라당에 몸담은 동안에도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에 찬성하는 등 합리적 개혁가의 이미지를 유지했다. 이어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에서 이명박ㆍ박근혜 후보의 경쟁구도에 밀려 탈당한 뒤 현재의 야권에 합류한다. 좌우명이 수처작주(隨處作主ㆍ가는 곳마다 주인이 돼라)인 그가 지지율이 뒤처지자 반전을 시도한 것이다. 민주당이 2007년 말 대선에서 참패한 뒤 구원투수로서 2008년 총선을 지휘했으나 완패한다. 이후 강원도 춘천에서 와신상담의 시간을 보내던 그는 2010년 10월 민주당 당권을 거머쥐고 2011년 4ㆍ27 분당 보선에서 승리한 뒤 2011년 말 뚝심으로 야권통합을 성공시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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