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재정위기 와중에 자금의 도피처로 각광 받고 있는 독일이나 영국ㆍ일본 국채에도 언제 꺼질지 모를 거품이 끼여 있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금융시장에서 안전자산의 '안전성'이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심각한 국가채무 부담 때문에 일찌감치 신용등급이 강등된 일본은 물론 'AAA' 등급을 유지하고 있는 영국이나 독일에 대해서도 시장 전문가들은 "알고 보면 위험하다"는 경고를 잇달아 제기하고 있다. 지금은 투기세력까지 쏠리면서 수익을 바라기는커녕 웃돈을 주고라도 이들 국가의 국채에 투자하겠다는 글로벌 투자가들이 줄을 섰지만 잠재된 리스크가 불거지면 이들 안전자산이 시장의 '폭탄'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실정이다.
◇유로존 위기에 노출된 독일=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유럽 재정위기 국가들에 대한 독일의 익스포저가 국내총생산(GDP)의 30% 규모에 달할 정도로 많다는 점을 들어 독일은 유로존 위기의 도피처가 아니라고 경고했다. 독일 국채인 분트는 이미 수익률이 제로(0)를 넘어 마이너스로 진입했지만 웃돈을 얹어서라도 자금을 넣어둘 만큼 분트가 안전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최대 리스크는 유럽 재정위기국에 대한 익스포저다. 현재 독일에서 재정위기 국가들로 흘러들어간 대출금만도 8,000억유로에 달한다. 유로존 위기가 더 심각해지면 독일도 결코 투자자 불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국가인 셈이다.
실제로 지난해 11월 재정위기가 이탈리아와 프랑스까지 번질 조짐을 보이자 투자자들은 독일 국채를 대거 팔아치웠다. 당시 10년 만기 독일 국채 수익률은 한 주 사이 1.864%에서 2.363%까지 치솟으며 안전자산의 위상을 무색하게 했다.
실물경제의 취약성도 문제다. 수출이 GDP의 40%를 차지하는 독일은 지금까지는 유로화 약세의 수혜를 입어왔지만, 수출시장의 60%를 의존하는 유럽의 경기침체가 심화되면 타격이 불가피하다.
◇"길트 수익률, 5%까지 치솟을 수도"=유로존에서 발을 빼고 있다는 이유로 안전자산으로 각광 받고 있는 영국 국채(길트)도 독자적인 국가채무 문제 때문에 안전성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예년에 통상 4% 수준을 유지해온 영국의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은 지난달 30일 1.64%까지 하락해 영국 국채시장이 열린 1703년 이래 최저치를 기록했다. 지난 1년 동안 국채 가격은 15% 이상 치솟았다.
하지만 로이터통신은 지난 1년간 길트에 대한 보증비용, 즉 크레디트디폴트스와프(CDS) 프리미엄은 30%가량 상승했다는 점을 들어 영국 국채가 투자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위험도가 높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언 스프레드버리 피델리티 채권펀드 매니저는 "10년 만기 길트 수익률이 1% 아래로 떨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영국의 신용도에 대한 우려가 불거지기 시작하면 5% 이상으로 치솟을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로이터에 따르면 영국 정부 부채는 GDP의 8%를 웃돌아 GDP 대비 비중으로는 독일의 3배에 달한다.
◇"유로존 다음은 일본"…국채 붕괴 시나리오도=특히 '안전'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심각한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 일본 국채다. 고령화ㆍ저출산, 오랜 경기침체로 일본 국채는 언제 거품이 꺼질지 모를 시한폭탄으로 인식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올해 일본의 GDP 대비 정부 채무는 236%로 재정이 파탄난 그리스보다 훨씬 높고 미국이나 독일과 비교하면 약 2배에 달한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2009회계연도부터는 국채 발행액이 일반회계 세수를 웃도는 비정상적인 재정상황이 이어지고 있을 정도다. 지금까지는 국채 대부분을 국내 투자자들이 소화한다는 특수성 때문에 막대한 재정적자와 신용등급 강등에도 국채 금리가 낮은 수준에 머물러 안전자산의 이미지를 지켜왔지만 더 이상은 버티기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더구나 지난해 일본이 31년 만에 무역적자를 기록하고 머지않아 경상수지도 적자로 돌아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면서 일본 국채 붕괴 시나리오는 점점 현실감을 띠기 시작했다. 미국 헤지펀드인 헤이먼캐피털매니지먼트의 카일 배스 매니저는 "국채 금리가 2%포인트만 오르면 일본은 재정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며 "앞으로 18개월 이내에 일본 국채 거품이 붕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중국의 미 국채 털기 시작될까='채권왕'으로 불리는 빌 그로스 핌코 최고투자책임자(CIO)는 안전자산으로 분류되는 미 국채로 투자자금이 몰려들고 있지만 그로 인한 수익률 저하 때문에 중국 등이 언제든지 미 국채를 팔아 치울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미 국채 최다 보유국인 중국이 국채 처분에 나설 가능성은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도피처로 여겨지는 미 국채도 언제든 시장의 리스크에 휘말릴 수 있음을 의미한다.
현재 10년 만기 미 국채 수익률은 1.5%에 육박하는 수준까지 떨어졌으며 30년 만기 국채도 수익률이 2.61%까지 빠져 있다. 10년 만기 수익률은 지난달 미 물가 상승률인 2.3%를 크게 밑도는 수준으로 물가를 감안하면 투자자들의 손실이 불가피한 수준이다.
그로스 CIO는 이 같은 손실 리스크가 부각되면서 중국과 같은 큰손이 미 국채에서 손을 털 경우 미 국채의 위상이 크게 흔들리면서 달러화 기축통화체제가 무너질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롭 아넛 리서치어필리에이츠 매니저는 "미국이 막대한 재정적자를 해소하는 과정에서 하이퍼인플레이션에 빠질 가능성이 50대50"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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