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전당을 프랑스 여배우 쥘리에트 비노슈와 같은 분위기가 풍기는 공간으로 만들겠습니다. 곱게 화장한 여인의 모습이지만 세련된, 그러면서도 편안한 분위기를 관객들이 느끼고 돌아가는 공간이 됐으면 좋겠어요."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임원실에서 마주한 모철민(54ㆍ사진) 신임 사장은 예술의전당의 비전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그의 말에는 예술의전당을 세계적인 명소로 키워가겠다는 의지가 묻어났다.
2011년 11월 문화체육관광부 1차관을 끝으로 오랫동안 근무했던 문화부를 떠난 뒤 4월13일 예술의전당 사장에 취임해 석 달이 채 안 됐지만 그가 빠르게 적응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모 사장이 취임 후 예술의전당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제시한 키워드가 '공공성 강화'다. 프로그램 시즌제 도입, 국립예술단체 및 민간단체와 공동기획 프로그램 강화, 표준좌석제 도입, 대관료 인하, 소외계층 및 청소년 지원, 상업적 성격의 공연 비율 제한 등이 그런 차원에서 도입됐거나 추진 중인 프로젝트들이다.
"예술의전당을 본연의 목표인 공적 복합문화공간으로 복구하는 게 시급하다고 판단하고 있어요. 예술의전당에 들어와 있는 오페라단ㆍ발레단 등 국립 예술단체들과 협력해 더 좋은 프로그램을 많이 만들어 예술의전당이 더 꽉꽉 차도록 할 것입니다."
그는 이런 취지로 중장기적으로 역점을 두고 추진하고 있는 것이 '프로그램 시즌제' 도입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관객들에게 원하는 시즌에 오면 예술의전당에서 무엇을 볼 수 있다는 예측 가능성을 주는 게 중요하다. 세계 주요 공연장이 거의 시즌제를 도입해 운영하고 있는데 예술의전당은 아직 못해왔다"며 "늦어도 내년 10월부터 2014년 4월까지 처음으로 기간을 정해 프로그램 시즌제를 적용하겠다"고 밝혔다.
"예술의전당은 세계적으로도 명망이 높지만 대부분의 공연이 대관 공연이고 자체적인 기획 공연은 1년에 2~3건밖에 없는 게 현실입니다. 예술의전당 공연 수준을 더 높이는 비결은 단순 대관 수준을 벗어난 프로그램 시즌제 도입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예술의전당은 모 사장 취임 후 공연 및 전시장 대관료도 2008년 유럽발 금융위기 이전 수준으로 내렸고 공공성이 큰 공연의 경우 50%까지 감면하도록 했으며 표준좌석제도 새로 도입했다.
"표준좌석등급제는 과거처럼 R등급을 최고 등급으로 하고 R석도 전체 좌석 수의 3분1로 제한한 것입니다. 일부 공연에서 VIP석을 넘어 VVIP석, P(President)석까지 만들어 관람 여건이 나쁜 좌석까지 고가에 팔아 관객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막겠다는 것이죠. 다른 공연기관에도 확대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예술의전당은 또 19세까지로 제한했던 '청소년 할인제도 가입제한연령'을 대학생인 24세까지 확대했고 공연 당일 팔리지 않은 티켓을 싼 가격에 살 수 있는 '스탠바이 티켓' 제도도 새로 도입했다. 청소년과 문화 소외계층의 경우 당일 스탠바이 티켓을 5,000원 혹은 1만원이라는 매우 싼값에 사서 관람할 수 있다.
또 ▦청소년들에게 예술의전당 주요 공연장 2층에서 공연의 리허설을 무료로 볼 수 있도록 개방 ▦주5일제 수업에 맞춰 '청소년 토요교실' 운영 ▦대학 졸업생을 대상으로 한 '문화예술 아카데미' 개설 등도 모 사장 취임 후 새로 도입했거나 도입 예정인 프로그램들이다. 모 사장은 "'문화예술 아카데미' 는 대학을 졸업해도 현장에서 곧바로 활용할 수 없는 대학 졸업생들에게 예술의전당이 갖고 있는 공연기획, 전시기획 분야의 최고 노하우를 전수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관광 분야에 주특기를 갖고 있는 모 사장은 클래식 한류를 만들기 위한 방안으로 일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클래식 관광상품도 추진하고 있다. "일본은 클래식 인구가 매우 많고 저변이 큰 시장입니다. 그런 일본의 클래식 팬들을 한국에 유치하자는 것이죠. 일본 여행사에서 관광상품을 만들면 문화상품으로 연결이 가능하다고 판단, 현재 관계기관과 협의 중입니다." 그는 "클래식 관광상품을 일단 일본 관광객으로 시작한 다음 중국 관광객으로까지 확대해 예술의전당을 '클래식 한류의 거점'으로 육성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모 사장이 최근 중국의 문화예술을 상징하는 공연기관인 중국 국가대극원(國家大劇院)과 양해각서(MOU)를 맺고 돌아온 것도 그런 류(類)의 아시아 시장 공동협력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대극원은 공간 연면적만 우리 예술의전당 1.7배 정도되는데다 2008년 개관한 뒤 불과 4년 만에 만든 오페라 제작 편수가 21편에 달할 정도입니다. 양국 간 공동제작, 스태프 교류, 세계적인 공연의 공동 초청 등 시너지가 클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모 사장은 국내 공연 관객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지만 아직 오페라ㆍ발레 등 순수문화예술 분야는 저변을 늘리는 노력을 더 많이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의 좌석 수가 2,000석인데 평균 4회 공연하면 관객의 뒷심이 딸립니다. 4회 공연 관객 숫자가 8,000명, 그것도 유료관객 숫자로 따지면 더 적은 게 현실이죠. 문화예술인들이 힘들어 하는 이유입니다." 그는 "미국 메트로폴리탄오페라의 경우 그 같은 어려움 타개 차원에서 오페라 공연을 촬영해 극장에서까지 상영하고 있다"며 "예술의전당도 오페라와 발레 공연을 주요 공간에서 영상으로 볼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모 사장은 또 "유럽은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광장문화가 잘 형성돼 있다"며 유럽식 광장문화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는 "예술의전당은 주말에 많으면 3만명이 넘게 방문하고 주변에 예술기관도 몰려 있는 곳"이라며 "야외 무료공연도 더 많이 늘리고 활성화시켜 관객들이 예술의전당 곳곳에서 유럽식 광장문화를 만끽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고 밝혔다.
예술의전당은 특히 내년이면 개관 25주년을 맞는다. 모 사장은 "25주년을 계기로 임직원들과 함께 예술의전당을 대표할 공연이나 전시도 준비 중이며 예술의전당 임직원들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여건을 마련하는 데 역점을 둘 계획"이라고 전했다. CI나 로고도 현대적 감각으로 바꾸는 방안도 추진한다.
"음악ㆍ연극ㆍ성악ㆍ예술기획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성을 갖춘 예술의전당 임직원들이 외부 공연예술단체와 함께 더 질 좋은 작품을 내놓는 것은 관객이나 국민에 대한 의무이자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예술의전당이 국립 예술단체나 외부 예술단체와 연결시키는 고리 역할을 하게 될 전시감독과 공연예술감독을 새로 초빙한 것에도 그런 고민이 녹아 있죠." 그는 "국민 세금으로 만들어진 공적인 복합문화공간인 예술의전당을 더 풍성하고 더 잘 활용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고 있으며 어렵더라도 그런 일들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모 사장은 이어 일각에서 제기하는 예술의전당 상업성에 대한 비판에는 "외국에서는 예술의전당 같은 아트센터의 경우 정부 지원 규모가 많으면 전체 예산의 80%, 아무리 낮아도 50% 정도에 달한다"며 예술의전당은 지원 수준이 낮아 공공성 확보에 어려움이 많다고 토로했다.
"예술의전당의 1년 전체 예산 가운데 정부 지원 규모가 20% 수준에 불과합니다. 나머지는 대관료, 식음료 수입, 입장권 수입, 공간 임대 수입 등 자체 수입이 50%, 민간 펀딩이 30% 수준입니다." 그는 "운영의 묘를 발휘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정부 예산 지원 비중을 더 확대해야 예술의전당이 문화예술의 공적 기능을 위한 최소한의 여건을 만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모 사장은 "문화예술 향유가 점차 커다란 국민의 기본권으로 인식되고 있다"며 "무엇보다 이곳을 찾는 관객들이 편리하게 이용하도록 하겠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예술의전당 최고경영자(CEO)는 제2의 인생"이라고 했고 "예술의전당 근처에서 19년째 거주하고 있다"고도 말했다. 예술의전당의 어떤 점이 불편한지 구석구석 잘 살펴볼 기회가 많았고 그런 점들을 특유의 부드러움으로 하나하나 개선해나가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 모철민 사장은 '균형감각론(論)'과 '신사적인 태도'. 모철민 예술의전당 사장 뒤에는 '합리적 공무원'이라는 꼬리표가 항상 따라붙는다. 그가 오랫동안 일해왔던 문화체육관광부 후배들의 평가가 그렇다. 본인도 "그동안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균형감각'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고 살아왔다"고 말할 정도다. 그는 "성공한 사람들의 자질을 찬찬히 살펴보면 균형감각이 많았고 특히 공직에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판단할 때 가장 필요한 덕목이었던 것 같다고 후배들에게도 조언하고는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겸손한 경청 뒤에 나타나는 '카리스마 넘치는 추진력'도 모 사장이 그동안 보여줬던 업무 스타일이라는 평도 있다.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곳곳에서 모 사장의 컬러가 묻어나기 시작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까닭이다. 모 사장을 관통하는 또 다른 키워드는 '신사적인 태도'다. 외국에서, 그것도 오랫동안 파리에서 생활한 분위기가 배어나오는 것 같다는 게 주변의 전언이다. 모 사장은 30년간 교통부와 문화부에서 공무원으로 일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4개월 빠진 30년"이다. 그 가운데 3분의1인 10년을 해외에서 보냈고 10년의 해외 생활 중 6년을 파리에서 체류했다. 공직 생활은 교통부에서 시작했다. 그러다 1994년 교통부에 속해 있던 관광업무가 문화부로 이관되면서 자리를 옮겼고 그 후 18년간 문화부에서 일했다. 원래 여행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관광행정을 하면서 더 매력을 느껴 미국 오리건대에서 관광학 석ㆍ박사 학위를 따기도 했다. 2004년부터 3년 넘게 주(駐)프랑스 한국문화원장을 지냈다. 특히 한ㆍ프랑스 수교 120주년을 기념해 '한국을 가슴속으로(Coree au coeur)'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1년 동안 쉴 새 없이 한국을 소개하는 문화행사가 개최됐던 2006년은 그에게 특별한 해였다. 횟수가 120회를 넘길 정도로 수교 이래 양국 간 최대 규모의 문화 교류 행사였다. 파리ㆍ리옹ㆍ몽펠리에 같은 대도시는 물론 지방 소도시들에서도 이벤트가 잇따랐다. 모 사장은 이때를 "세계 문화의 중심지에서 한국 문화를 알린다는 게 쉽지 않았지만 보람도 컸다"고 회상했다. 그의 국제감각과 분위기가 무르익은 것도 이때가 아니겠느냐는 게 문화부 주변의 얘기다. 그가 공직 생활 중 어려움에 처할 때 위로를 받았던 저서로 꼽는 것은 파울로 코엘류의 '연금술사'. "운명주의자적인 측면도 있지만 열정을 갖고 일하면 하다못해 길가의 돌멩이도 도와주며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하나하나가 각자의 궤적을 만들어주고 그 궤적이 앞날의 궤적도 만들어준다는 메시지가 좋았다"며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개인적으로 가슴에 와닿았던 책"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정승양기자 ◇약력 ▦1958년 서울 ▦1977년 경복고 졸업▦1982년 성균관대 경영학과 졸업 ▦1987년 서울대행정대학원 정책학 석사 ▦1991년 미국 오리건대 관광학 석ㆍ박사 ▦1981년 제25회 행정고시 ▦1999년 청와대 문화관광비서실 행정관 ▦2004년 주프랑스 한국문화원장 ▦2008년 청와대 관광체육비서관 ▦2009년 국립중앙도서관장 ▦2010년 문화체육관광부 1차관 ▦2012년 동아대 경영대 석좌교수 ▦2012년 4월 예술의전당 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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