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구(66ㆍ사진) 한국식품산업협회장은 거침이 없었다. 매일 아침 축구로 하루를 여는 '축구광'답게 골문을 향해 날아가 꽂히는 축구공처럼 직설적인 화법과 달변으로 식품업계의 각종 현안들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최근 정치권을 중심으로 경제민주화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가운데 식품업계의 주요 관심사는 동반성장위원회가 주도하는 '중소기업 적합업종'이다. 동원그룹 부회장이자 식품업계를 대표하는 박 회장은 중소기업 적합업종 지정으로 대표되는 대기업 규제 움직임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대기업ㆍ중견기업ㆍ중소기업 식의 기업규모에 따른 구분은 오늘날의 글로벌 경쟁시대에 무의미하다"는 그는 "국내 순위 1, 2위를 따질 게 아니라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전문기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유럽 식품기업인 네슬레의 매출은 한국 대표기업인 삼성전자와 맞먹는다"며 "대기업ㆍ중소기업의 구분보다 '식품 최고기업 네슬레'처럼 세계시장에서 개별업종의 위상이 더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이런 맥락에서 박 회장은 동원을 비롯해 CJㆍ대상 같은 식품 전문기업이 사업다각화 차원에서 관련분야인 급식업ㆍ식자재유통업 등에 진출하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그는 "이미 미국의 세계적 급식기업인 아라마크의 한국 계열사인 아라코가 한국 급식시장에서 사업을 확장해가는 상황인데 정부가 대기업이라는 이유로 국내 식품전문 기업들을 규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식자재유통업에 대해서도 "지금은 중소상인들이 많지만 여러 기업들이 외식업 분야에 진출하고 전문 레스토랑 수가 늘어나면서 외식산업 규모가 점점 커지는 상황에서 영세한 자영업자들에게만 맡기는 것은 한계가 있다"며 식품 전문기업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박 회장은 '매출의 일정비율 이상을 해당 분야에서 거두는 기업' 같은 식으로 정부가 전문기업의 범위를 명확히 정해 육성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현행 직영급식 제도에 대해서도 나름의 해법을 제시했다. 밥과 국을 중심으로 하는 우리나라 식단의 특성상 직영급식보다 전문기업이 급식을 담당하는 시스템이 더 적합하기 때문에 직영급식을 바탕으로 하는 무상급식 제도로는 결국 식단의 품질이 떨어져 학생들에게 피해가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식품업계에서는 최근 몇 년간 각종 원가상승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물가정책으로 가격인상이 억제돼 수익성이 악화되고 있다는 목소리가 높다. 동원F&B는 최근 가다랑어 국제시세가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더 이상 원가부담을 견디지 못해 참치캔 가격을 조정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가격정책과 관련해 식품업계 경영자로서 할 말이 많을 것 같았다. 박 회장은 "식품제조업은 원료의 제조ㆍ가공에서 물류, 유통, 소비자에게 이르는 과정으로 이뤄진 공급망(서플라이체인)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물류ㆍ유통 등 공급망에 참여하는 다른 주체들과의 고통분담이 필요하다"고 식품업계의 입장을 에둘러 표현했다. 다시 말해 전체 공급 시스템에서 봐야지 식품기업들만 제품 가격을 인상해 물가상승을 일으키는 주범으로 몰아가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얘기다.
이왕 민감한 주제가 화두에 오른 김에 유통업과 식품제조업 간 상생에 관한 또 다른 민감한 주제를 꺼내봤다. 박 회장은 한국 유통업이 당면한 과제를 "골목상권뿐만 아니라 제조업과도 공존하는 것"으로 규정하면서 건전한 갑을 관계를 설정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유통업체들이 단순히 가격이 싼 상품만 조달하려고 하면 제조업 기반이 무너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결국 유통업도 붕괴된다는 논리다. 따라서 유통업과 식품제조업 간 건전한 관계가 유지돼야 상호발전이 가능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지난 2009년 제18대 식품산업협회장으로 취임한 박 회장은 식품기업에 대한 각종 불필요한 규제를 없애기 위해 노력해왔다. 상공부(현 지식경제부) 공무원 출신답게 박 회장은 불필요한 규제가 무엇인지, 또 그 규제를 해소하려면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해 적확한 인식을 갖고 있는 듯했다. 대표적인 것이 유통기한 문제다. 그는 "한국에서는 유통기한이 곧 '폐기 기한'으로 인식돼 엄청난 양의 식품이 폐기 처분되고 이로 인한 식품업계의 손실이 연간 수천억원대에 이른다"며 "일본과 미국에서는 '상미기한(賞味期限ㆍ제품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기한 또는 품질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기간)'또는 '베스트비포(best before)'라는 제도를 채택해 자원낭비를 막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문제를 협회 차원에서 정부에 건의한 결과 이달부터 일부 품목을 중심으로 소비기한제도를 시험적으로 시행하게 됐다고 전했다.
박 회장이 불필요한 규제로 꼽는 또 다른 사례는 이물질 관리다. 그는 "유해물질은 소비자의 건강을 위해 정부가 관리해야 하지만 이물질은 식품제조 공정상 어쩔 수 없이 들어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해당 기업과 소비자가 자율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며 이를 정부가 일일이 규제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지적했다. 식품에 들어 있는 이물질을 관계기관에 신고하면 포상금을 지급하는 이른바 '식파라치' 제도를 없애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박 회장은 또 정부가 추진 중인 '신호등표시제'도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신호등표시제는 어린이 비만을 막기 위해 과자와 음료 등 어린이가 자주 먹는 식품의 당류ㆍ지방ㆍ포화지방ㆍ나트륨 등 주요 성분을 색깔로 제품 표면에 표시하는 제도다. 현재 일부 제품을 중심으로 자율적으로 시행되고 있으며 내년부터 과자류 제품을 시작으로 단계적으로 의무화된다. 이에 대해 박 회장은 "이런 제도는 현재 전세계에서 영국만 자율적으로 시행하고 있다"며 "모든 식품을 일률적으로 단순화해 색깔로 표기하면 소비자들의 오해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부모들이 열량 등의 숫자 표기를 보고 자율적으로 판단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식품안전 문제에 대한 정부의 규제완화를 주장하는 박 회장의 견해는 현재 한국 식품 전문기업들의 위생 기준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자부심에 근거한 것이다. 그는 "국내 식품 전문기업들은 이미 글로벌 수준에 도달해 있지만 일부 기업을 제외한 그 아래부터 영세 자영업자들의 '생계형 식당'까지 수준 차이가 너무 크다"며 "오히려 전반적인 식품산업의 수준을 끌어올려 균형을 맞추는 데 정부의 감시감독 역할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진단했다.
최근 문제가 된 일부 식품업체들의 식품안전규정 위반사례에 대해서도 박 회장은 기업들이 식품제조 주체로서 정부의 부족한 면을 보완해 함께 식품안전 문제를 개선해나갈 것을 주문했다. 그는 공무원 시절의 경험을 예로 들며 "정부기관이 모든 면에서 완벽하지는 않기 때문에 식품검사 규정 역시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정부기관이 조사를 진행하고 문제가 드러나면 바로 발표하는 현행 방식 대신 다른 기관에서도 검사 받을 기회를 기업에 주고 정부기관의 조사 결과와 다르면 재검사를 하는 방식으로 기업의 소명기회를 보장하자는 것이다. 기업들에 대해서는 합리적인 근거로 정부를 설득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문했다.
정부기관과 민간기업을 모두 경험한 박 회장은 기업은 전문기업이 돼야 하는 것처럼 공무원 역시 전문가가 돼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그는 정부와 민간기업에서 일하는 것의 차이점을 묻자 "뜨거운 감자 돌리기"라고 일갈했다. 공무원들의 한 부서에서 근무하는 기간이 짧다 보니 골치 아픈 문제는 재임기간 내 처리하지 않고 후임자에게 떠넘기려는 경우가 많다는 뜻으로 들렸다. 박 회장은 "정부 부처도 인사이동을 최소화하고 행정직을 더 세분화하는 등 공무원들이 전문성을 갖추도록 시스템을 뒷받침해야 기업은 물론 소비자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관료 20년 접고 CEO 변신… 동원정밀·F&B 성장 이끌어… 박경훈기자 socool@sed.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