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오후 서울 여의도의 신한은행 여의도중앙금융센터 지점. 입구와 ATM마다 '통신장애로 기기사용을 중단합니다. 빠른 시간 내에 복구하도록 하겠습니다. 불편을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라는 안내가 붙었다. 창구에 들른 고객들은 허탕을 쳐야 했다. 한 고객은 "전산이 마비됐는지 몰랐다. 집에 부칠 돈이 있어 왔는데"라며 말을 흐렸다.
이날 꽃샘추위로 다시 추워진 날씨에 은행을 찾은 고객들은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입구의 안내를 보고 창구 업무는 가능하지 않을까 기대한 다른 고객도 ATM뿐 아니라 창구 업무, 인터넷 뱅킹까지도 마비됐다는 이야기에 허탈해했다.
인근의 농협은행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인터넷 뱅킹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창구 업무는 불가능했고 CDㆍATM은 작동이 안 됐다. 창구 직원들은 고객들에게 사태를 설명하느라 진땀을 뺐다. 이전부터 전산 장애 사고가 잦아 고객들의 반응이 더 싸늘했고 직원들도 트라우마로 더 당황했던 탓이다.
신한은행과 농협은행은 고객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영업을 6시까지로 긴급하게 늘렸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본의 아니게 오후에 2시간가량 전산망 마비로 고객에게 피해를 준 만큼 2시간 영업을 연장했다"고 설명했다.
일부 금융사의 전산망이 마비되자 증권업계도 대비 태세를 갖췄다. 신한금융지주 계열사인 신한금융투자는 아직 전산 마비나 해킹 등의 피해는 포착되지 않았지만 만약에 대비해 회사 내 인터넷 연결을 모두 차단했다. 하나대투증권은 하나금융지주의 공통 조치에 따라 사내 메신저와 e메일 시스템에 대한 접속을 막았다. 우리투자증권은 악성코드 감염 여부를 점검하는 동안 인터넷을 끊었다.
동시다발적으로 전산 장애가 발생하자 LG유플러스와 KTㆍSK브로드밴드 등 통신사들은 일제히 비상체제에 돌입했다. 통신업계 관계자는 "동시다발적 공격으로 2009년 청와대와 국민은행 등의 주요 사이트에 피해를 줬던 7·7 분산서비스거부(DDoSㆍ디도스) 대란을 떠올린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라고 전했다.
분초를 다투는 방송사들은 20일 오후2시 갑작스런 전산 마비에 아수라장이 됐다. KBSㆍMBCㆍYTN 등 주요 방송사들은 뉴스제작 등 업무에 막대한 차질을 빚었다. 당시 저녁 뉴스타임에 맞추기 위해 프로그램 마감을 앞둔 상황이었기 때문. 방송사 직원들은 자체 기사송고망이나 메일 등 인터넷 접속 자체가 안되면서 일시적 패닉 상태에 빠졌다.
이날 오후3시께부터 KBS의 사내 컴퓨터는 일제히 마비돼 사무실 PC 부팅이 안되고 모니터 화면이 블랙아웃 상태가 됐다. 한 방송사 직원은 "기사와 방송프로그램 데드라인(마감시간)이 코앞인데 전산망이 먹통이 되면서 종이에 쓴 기사와 프로그램 녹화테이프를 들고 뛰어다녔다"며 "방송 작가들도 손으로 원고를 다시 쓰고 있다"고 상황을 전했다.
사내 랜선을 꽂은 컴퓨터는 KBS외부 컴퓨터라도 해도 모두 동일한 불통증상을 보이고 있다.
그는 "내부 전산망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외부공격 흔적을 찾지 못해 여전히 원인을 조사 중이며 복구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MBC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MBC는 전산사고 발생 이후 사내 정보전산실에서 컴퓨터를 모두 끄라는 지시를 내렸다.
MBC 관계자는 "컴퓨터를 아예 끈 상태다 보니 어떤 부분이 되고 안되고 이런 것도 모른다"며 "직원용 앱이 따로 있어 인사정보시스템 등을 모바일로 이용할 수 있지만 혹시 이것마저 감염될까 하는 생각에 사용해볼 엄두도 못 냈다"고 말했다.
금융 당국은 이번 전산장애와 관련, '위기상황대응반'을 구성했다. 위기경보수준도 오후3시를 기해 '관심'에서 '주의'로 격상하는 등 사태를 엄중하게 봤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이날 오후2시를 조금 넘긴 상황에서 농협ㆍ신한은행ㆍ제주은행ㆍ우리은행 등 4곳에서 전산사고가 발생했다"며 "우리은행은 그 시각 디도스로 추정되는 공격이 있었지만 내부방어시스템을 통해 문제없이 넘어갔다"고 전했다.
금감원은 자체 비상대책반을 가동하는 한편 IT 검사역 10명을 현장에 투입, 사고원인과 복구조치를 점검하는 등 분주히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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