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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지인을 통해 ‘샐라티스트’ 전시회라는 것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샐러리맨으로 위장한 예술가들’이라는 흥미로운 제목으로 시작하는 전시회였습니다. 미술가나 음악가처럼 순수 예술가로 살고 있지는 않지만, 프로 이상의 사명감으로 무장하고, 지속적으로 창작 활동에 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습니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회사원, 의사 등 다양한 직종의 ‘아마추어 아닌 아마추어’들이 모여 단체전을 갖고, 공동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대가성 없는 순수한 예술을 위해 내일도 열심히 살자는 그들의 슬로건이 매우 의기양양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19세기 말 프랑스 파리의 ‘모던 아트’를 기치로 내건 미술가들 속에서도 비슷한 면모가 발견됩니다. 앙리 루소는 원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직접 미술학교에 진학할 수 없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48지 그림을 독학하며 꾸준히 자기만의 인상주의 화풍을 즐겨 왔습니다. 그리고 49세가 되던 해, 본격적으로 한 사람의 미술가로서 개인전과 단체전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물론 전업 작가도 아닌 상태에서 이루어진 데뷔였습니다. 그 흔한 명문 예술학교 학위나 특정 명인의 계보 효과 하나 없이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인정받은 것은 가히 인간승리였습니다. 생애 주기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들의 관점에 따르면 그는 상당히 오래 된 ‘퍼스트 라이프’(First life : 은퇴 이전의 삶)를 세무공무원으로 살다가, ‘세컨드 라이프’(Second life : 은퇴 이후의 삶)를 순수예술가로서 꽃피운 것입니다. 비록 66세로 일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19년 밖에 안되는 세월이었지만, 앙리 루소가 프랑스 미술사에 기여한 바는 매우 크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동 시대의 위트릴로 같은 작가는 원래 소년기부터 알코올 중독에 걸린, 어두운 과거를 갖고 있었습니다. 일종의 정신적 장애를 갖고 있었던 것이죠. 재활 프로그램에 등록해야 했던 위트릴로는 치료의 일환으로 그림 그리기를 권유받았습니다. 그런데 유난히 자신이 여러 형태의 시각화에 능하다는 것을 그 재활 과정을 통해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후 위트릴로는 파리 골목의 일상적인 풍경과 19세기 말의 데카당스적이고 음울한 분위기를 잘 그려냈다는 호평을 받았습니다. 조르주 루오라는 작가 역시 루소나 위트릴로처럼 불행한 청장년기를 보내야 했습니다. 유난히 하층민들의 일상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술집 여급이나 서커스 단원, 노동자 등의 모습에서 ‘성스러운’ 모티브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나름대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그는 남들을 위해 웃음과 즐거움을 제공하면서 자신의 슬픔을 묻는 감정노동자들이 진정한 성인의 모습을 한 것이라는, 지금으로서도 상당히 전위적인 사고를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어쩌면 19세기 말의 프랑스 파리를 문화 중심지, 또는 창의적 클러스터(Creative cluster)로 손꼽는 이유는, 기존의 프로 예술가나 공학자, 법조인들 뿐만 아니라 ‘아마추어’들도 진정성과 기술적 완결성을 갖추면 논의에 ‘끼어들기’를 할 수 있는 자유로움 때문일 겁니다. 공교롭게도 아카데미 프랑세즈라고 하는 중앙집권적인 예술가 인증 조직이 분열되고 나서, 갑자기 마네, 모네, 드가와 같은 인물들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분명 주목해 볼만한 대목입니다.
지난 2014년 말, 정부는 미래창조과학부를 중심으로 ‘미래 성장 동력 개발 계획’이라는 마스터 플랜을 발표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현 정부가 중요한 슬로건으로 내 걸고 있는 창조경제 철학과 문화 융성 비전이 함께 접목될 수 있는 기술, 문화, 경제적 솔루션을 찾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 문화예술계는 구시대적인 특정 인맥 중심의 기회 독점과 선진국 커뮤니티를 뒤쫓아가는 후발주자라는 면모를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기술 역시도 사람의 상상력과 경험보다는, 효율성과 수익성 중심으로 개발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창조는 자유로움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똑같은 공식을 반복하지 않고, 지금껏 ‘외부인’으로 취급되었던 사람들의 튀는 시각을 내부화할 줄 아는 큰 그릇의 관점이 필요합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샐라티스트들’과 같은 사람들이 문화예술뿐만 아니라 창조적 감각을 필요로 하는 전반적인 분야에서 생겨난다면, 문화융성과 창조경제라는 말이 ‘별나라 이야기’ 같은 담론은 아닐 겁니다.
백범 김구 선생은 <나의 소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경제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힘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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