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언론이 휴대폰 산업에 대해 애기할 때면 어김없이 나오는 단어 두 개가 있다. '갈라파고스'와 '구로후네(黑船)'다. 세계와 격리된 채 '국내용'으로만 개발한 결과 글로벌 시장에서 설 곳을 잃은 일본 휴대폰의 현 주소가 갈라파고스이고 그런 일본시장에 상륙해 시장을 휩쓰는 외국의 스마트폰은 19세기까지 쇄국정책을 고수하던 일본사회를 사실상 강제로 개방하게 만든 외국 세력의 상징, 구로후네에 비유된다. 탄탄한 경제력을 믿고 현실에 안주해온 일본을 위협하는 오늘날의 구로후네는 제조산업뿐 아니라 각 분야에서 출몰하고 있다. 외국기업들에 밀려 시장을 빼앗긴 일본 기업들은 안정지향적인 국내 젊은이들 대신 외국인의 우수 인력들로 일자리를 메워가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파나소닉그룹의 경우 내년 국내 대졸 채용이 350명에 그치는 반면 해외 현지 채용은 1,100명에 달할 전망이다. 일본 경제의 아킬레스건으로 일컬어지는 국채시장에도 구로후네의 위협이 감지되고 있다. 재정적자국인 일본은 국채 대부분을 국내에서 소화해온 덕에 안정된 장기금리를 유지했지만 오랜 경기부진과 대지진 여파로 일본인들은 이제 늘어나는 국채를 떠안을 여력이 없다. JP모건의 간노 마사아키 수석이코노미스트는 "국채시장의 쇄국상태가 끝나고 외국인 투자가에 본격적으로 의존하게 될 때"가 "구로후네가 다가오는 때"라고 경고한다. 국채시장에 구로후네가 모습을 나타내면 장기금리 급등으로 일본이 그리스 같은 재정위기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 지금 일본의 위기상황은 에도시대 말기를 능가한다. 다각적인 외세의 압력과 장기적 디플레이션, 대지진과 원전 사고 피해, 여기에 국정 혼란까지 더해진 총체적 난국이다. 에도시대 말, 구로후네의 등장으로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신정부를 수립하고 근대국가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현재 일본 정치권도 간 나오토 정권을 밀어내고 새 출발을 시도하고 있다. 위기시의 리더 교체에는 적잖은 부담이 따르지만 이미 리더십을 잃고 '공공의 적'으로 추락한 간 총리 퇴진은 불가피한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다. 최근 간 총리 퇴진을 둘러싸고 벌어진 정계의 촌극과 세력 다툼은 일본의 앞날에 더 큰 혼란을 예고하는 듯하다. 일본 정계가 민주ㆍ자민당의 대연정이라는 그럴싸한 봉합책으로 제2의 메이지유신을 이룰지 돌이킬 수 없는 추락을 야기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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