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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秘錄, 김우중신화의 몰락] <제3막> 김우중과 자동차

김우중 "대통령이 車넘겨준다 했소" <br>오호근 "그런 상업적 계약 말도안돼"

김우중 회장은 몰락하는 그 순간까지도 '자동차'만은 버릴 수 없다고 부르짖었다. 97년 김선홍 기아그룹 회장(오른 쪽), 정몽규 현대차 회장과 환담을 나눈 김 회장. 그는 이때 이미 국내 자동차 산업을 이원화하겠다는 뜻을 품었다(사진 //쪽). 그리고 도 무오이 베트남 당서기장 등 외국 지도자들과 만난 자리에서는 자동차를 통해 세계 경영의 꿈을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서울경제 DB


[秘錄, 김우중신화의 몰락] 김우중과 자동차 분신(分身)의 분신(焚身)김우중 "대통령이 車넘겨준다 했소" 오호근 "그런 상업적 계약 말도안돼" 김영기 기자 young@sed.co.kr 관련기사 • 秘錄, 김우중신화의 몰락 [전체보기] ㆍ'車는 세계경영 최적의 도구' 인식 ㆍ98년들어 자동차 중심 그룹 재편 ㆍ㈜대우 등 계열사는 전위부대로 ㆍ"삼성·기아車를 현대와 나눠갖자" ㆍ자동차 산업 2社체제 집념 물거품 ㆍ"모든걸 걸었던 車때문에 망했다" 1999년 8월26일. 워크아웃 결정 순간, 김우중 회장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절망에 젖어 있었을 것이라고? 그것은 오산(誤算)이다. 그는 '살다 보면 겪는 진통의 순간일 뿐' 이라고 마지막까지 믿었다. 대우자동차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자동차는 '자신의 분신(分身)'이었고, 세계 경영의 꿈을 실현할 최후의 카드였다. '인간 김우중'의 자동차에 대한 애착, 그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수준 이상이었다. 대우 12개사가 워크아웃에 들어간 8월말. 여의도 한국투신에 위치한 오호근 기업구조조정위원장 사무실에 낮선 손님이 찾아왔다. 정주호 대우 구조조정본부 사장이었다. “위원장님, 저희 회장님을 좀 만나 주셨으면 합니다. ” 오 위원장은 푸른색 살렘 담배를 입에 물었다. 사실 그와 김 회장은 썩 좋은 인연은 아니었다. 김 회장이 투자금융사를 만들 때 오 위원장은 대학 교단을 떠나 영업부장으로 들어가 연(緣)을 맺었지만 그리 궁합은 맞지 않았다. “내키지 않으실 줄은 알지만 회장님께 상황을 솔직하게 말해 줄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 오 위원장은 9월2일 남산 힐튼호텔로 김 회장을 찾았다. 수척해진 얼굴, 하지만 김 회장은 여전히 ‘총수’로서 발언을 이어갔다. “대통령께서 (대우차 등)6개를 넘겨줄 것을 약속하셨소. 6개는 내가 계속 맡아야 겠소.” 김우중 회장은 몰락하는 그 순간까지도 '자동차'만은 버릴 수 없다고 부르짖었다. 97년 김선홍 기아그룹 회장(오른 쪽), 정몽규 현대차 회장과 환담을 나눈 김 회장. 그는 이때 이미 국내 자동차 산업을 이원화하겠다는 뜻을 품었다(사진 위). 그리고 도 무오이 베트남 당서기장 등 외국 지도자들과 만난 자리에서는 자동차를 통해 세계 경영의 꿈을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서울경제 DB 오 위원장이 얼굴이 일순 일그러졌다. “오해하고 계신 거 아닙니까. 대통령이 상업적인 계약을 하셨을 리 없습니다. 7월에 12개 중 6개는 회장님 책임아래 빨리 구조조정을 하고 나머지는 채권단에 맡기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약속이 안 지켜지면 워크아웃에 들어가거나 법정관리에 보내기로 확약하지 않았습니까. 헌데 지금 워크아웃에 들어갔습니다. 약속이 안 지켜졌다는 뜻입니다. 전 워크아웃 외에 다른 권한이 없으니 원칙대로 하겠습니다.” 김 회장의 귀에 오 위원장의 말은 들어오지 않았다. 다음날 정 사장이 황급히 오 위원장의 방을 다시 찾았다. “도대체 어른을 만나 무슨 얘길 하셨습니까. 큰일 났습니다. 회장께선 위원장님하고 얘기가 다 돼 걱정할 것 없다고 하시니….” 그랬다. 김 회장은 적어도 대우차에 대해서만큼 워크아웃이란 개념을 적용하려 들지 않았다. 9월 중순 대우차 출자전환을 놓고 두 사람이 다시 만날 때도 미련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유랑의 길로 떠나는 마지막까지도 부평 공장에 머무르며 전의(?)를 불태웠고, 독일에 머무르는 동안에도 차만은 놓지 않겠다고 버텼다. “경영권은 내놓아도 내가 벌린 일은 내가 매듭짓겠다”는 말을 끝까지 외쳤다. 그는 왜 이토록 대우차를 움켜쥐려 했던 것일까. 도대체 ‘무엇’이었길래…. 김 회장이 모태인 대우실업을 세운 것은 31세 때인 1967년. 대변인 격인 백기승 유진 전무는 “(다른 오너들처럼)어렸을 적 자동차 장난감을 갖고 노는…, 그런 오너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대우 원로들도 그가 초기부터 자동차에 천착하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샘플 원단을 들고 동남아로 떠나 일주일만에 30만달러를 수주해 ‘트리코트 김’이란 별명을 얻기부터 70년대 중반 한국기계 등을 잇따라 인수하기까지…, 아니 옥포조선을 인수하고 83년 GM코리아를 넘겨받아 대우차로 이름을 바꾸고 월드카 ‘르망’을 내놓을 때조차도, 차에 대한 김 회장의 집착은 그리 유별나지는 않았다. 그릿摸?무엇 때문에 김 회장은 자동차와 그렇게 질긴 인연을 맺었을까. 그것은 결국 그가 신앙처럼 숭상하던 ‘세계 경영’으로 귀결된다. 김 회장이 세계 경영을 선언한 것은 93년. 하지만 차에 대한 욕구가 본격 분출된 것은 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차인 티코를 통해 돌풍을 일으킨 대우는 잇따라 독자 모델 생산에 나섰고, 동거 상태였던 GM과의 관계는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92년 10월29일. 김 회장은 GM과 9년여에 걸친 관계를 청산했다. GM과의 동거로는 ‘세계’를 향한 욕구를 채울 수 없고, 늦기 전 독자 영역을 구축하고 싶어했다. 전직 계열사 임원인 A씨의 회고. “나이 예순에 이르면서 후세에 어떤 인물로 비춰질까 고민한 것 같아요. 김 회장은 ‘국제화를 선도했던 기업인’으로 남고 싶어했습니다.” 또 하나. 대우에는 세계 1등을 하는 제품이 없었다. 90년대 중반 연세대 동문 모임. “평생 소원이 무엇이냐”는 후배의 질문에 그는, “죽기 전 세계 1위 제품을 만드는 것”이라고 망설임 없이 말했다. 뜻밖의 답변. 하지만 이는 전략을 짜는 또 하나의 뼈대였다. 1등을 하지 못할 바에야 차선으로 시장을 선점하면 승산이 있을 것이란 계산, ‘개발도상국 공략론’과 ‘탱크주의’는 그래서 나왔다. 자동차는 이런 그의 철학을 실현할 최적의 도구였다. 폴란드 FSO 인수를 놓고 GM과 ‘전쟁’이 벌어지던 95년7월. 외교안보연구원 초청 특강에 나선 김 회장은 자동차 산업과 세계경영의 고리에 대한 철학을 드러냈다. “자동차는 하이테크가 아니라 미들테크다. 우리는 이 분야 경쟁이라면 결코 뒤지지 않는다.” 세계 경영의 중심에 자동차를 내세운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자동차를 통해 시장을 개척한 후 다른 산업은 ‘후방효과’를 노리는 것, 그것은 세계 경영의 기본 전략이었다. 다른 계열사들은 종속변수에 불과했다. 차를 전면에 내세우고, 그 뒤를 전자, 중공업, 기계, 금융, 통신 등이 따르게 해 현지에서 또 하나의 ‘그룹’을 이루는 것. 세계경영은 바로 한국식 경영의 확대판이었다. (주)대우와 대우중공업은 그 전위 부대였고, 역할은 단순했다. 대우차의 포장도로(자금)를 닦는 일이었다. 신정부 진영이 채 갖춰지기도 전인 98년초. 자동차 중심론은 절정에 다다랐다. 신정부엔 수출지상론을 설파하는 한편, 차 중심으로 그룹을 재편해 나갔다. 99년1월초. 김 회장은 계열사들을 대우차 중심으로 탈바꿈시켰다. 370개에 달하는 대우 해외 법인과 140개 지사가 대우차를 중심으로 그물망처럼 포진됐다. 계열사들도 본격적으로 비행편대를 형성했다. 그룹 전체가 물고 물리는 자금대차의 고리로 묶이는 서곡이었다. 99년초 김 회장은 중공업에 긴급 명령을 내렸다. 조선에서 벌어들인 돈을 자동차에 몰아주라는 것. 중공업의 지원사격이 시작됐다. 98년초 석달 동안, 중공업이 대우차에 지급 보증한 돈은 1,600억원. 대우차에 구멍이 날 때마다 단골 도우미는 중공업이었다. 자금난이 정점에 달하기 시작한 98년말. 이번엔 중공업 해외 법인들이 자동차에 끌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현지 법인들이 모조리 대우차로 넘어간 것이다. 경차 사업을 책임져온 중공업의 자동차 사업부분도 통째로 대우차로 넘어갔다. 양도 대금도 받지 못한 채. 계속된 출자, 중공업은 결국 대우차의 최대주주로 떠오른다. 계열사들은 이처럼 자동차를 살리기 위한 ‘가미가제’였다. ‘자동차 경영’은 이렇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룹 전체에 독(毒)으로 변해 돌아왔다. 세계 경영과 자동차, 집념은 국내로 이어졌다. 대우차 전 임원 P씨의 회고. “김 회장은 90년대 중반부터 유행처럼 번진 M&A 열풍에 주목했습니다. ‘규모의 경제’이죠. ‘대마불사’란 이름으로 치부되기는 했지만…” 전경련 회장으로 공식 추대된 98년 9월10일 기자간담회. 김 회장은 이날 ‘오프(비보도)’ 조건으로 그의 속내를 드러냈다. “자동차 산업 2사 체제는 반드시 이뤄집니다. 삼성과 기아차를 현대와 대우가 나눠 인수하는 거죠.” 기아차 입찰이 한창이던 상황, 그의 가슴엔 이미 빅딜을 통한 삼성차의 퇴출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10월12일 마감된 기아차 3차 입찰, 발언은 그대로 확인됐다. 당시는 대우의 자금난이 서서이 드러나기 시작하던 때. 김 회장은 쌍용차를 인수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높은 가격을 써내며 기아 인수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대우는 이미 1차 입찰을 앞둔 7월6일 현대차에 기아차 인수를 위한 컨소시엄 구성을 제의했고, 2차 입찰을 앞두고는 삼성차에 공동인수를 제안했던 터. ‘2원화’를 향한 의지는 그만큼 강력했다. ‘계획’은 뜻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10월18일. 기아차 입찰 결과, 1위를 현대에 뺐겼다. 기아차를 놓친 상황에서 김 회장이 가만 앉아 있을 리 없었다. 11월 중순, 이학수 삼성 구조조정본부장에게 연락이 왔다. 김태구 사장이었다. “삼성차를 계속 끌?갈 생각이십니까. 우리가 처리해주면 어떻겠습니까.” “그럼 대우는 뭘 내놓겠습니까.” 김 본부장은 대우건설을 내걸었다. 삼성의 응답은 ‘노’였다. 그리고 대신 나온 응답이 바로 대우전자였다. 비극의 탄생, 김 회장을 몰락의 길로 몰고 간 빅딜은 이렇게 세상에 나왔다. 전 대우 계열사의 A사장. 김 회장에 비판적 입장을 보인 그의 발언에는 많은 것이 함축돼 있다. “자동차에는 김 회장의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세계 경영과 대마불사, 하물며 외상 경영까지…. 그룹의 모든 생존 법칙은 자동차를 통해, 자동차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지요.” 대우가 워크아웃에 들어간 이후. 대우의 ‘연금술사’였던 장병주 전 ㈜대우 사장은 임직원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을 자동차로 하려 했고, 결국 자동차 때문에 망했다.” ‘자동차 왕국’을 향한 김 회장의 욕망, GM과의 26년간의 걸친 악연의 고리는 그가 추구한 또 다른 외줄타기 게임이었다. ⇒(다음편에서 계속) 입력시간 : 2005/06/27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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