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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차게 그은 획은 땅을 파고든 뿌리 같고 하늘을 떠받든 기둥 같다. 튀겨나온 물감 방울이 생생한 검은 선의 움직임은 우렁찬 폭포일 수도, 치솟는 분수일 수도 있다. 서울경제신문이 창간 50주년을 맞아 오는 7~8일 여는 '서울포럼 2010'의 팸플릿 표지를 장식한 화가 오수환(54ㆍ사진)의 작품은 획 하나에 삼라만상을 응축했다. 우리 경제를 진단하고 글로벌 경제의 미래를 전망하며 한국 경제사의 '큰 획'을 긋게 될 이번 포럼의 성격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서예적 필치를 보는 듯한 오수환의 '서체미학(書體美學)'은 운명이었다. 작가는 유교적 전통이 강한 경남 진주에서 서예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글씨를, 중국과 한국의 전통 서체를 보고 자랐다. 그가 서울대 미술대학에 재학중이던 1960년대 후반~70년대 초반은 자유로운 몸짓으로 순수한 정신세계를 표출하는 추상표현주의와 네오다다이즘(Neo-Dadaism)이 화두였다. 미국에서 시작된 이 같은 추상화의 경향을 놓고 서양화를 전공한 오수환은 '동양성'을 모색했다. "미국의 추상미술은 중국의 수묵화를 포함한 동양 미술의 영향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고구려 벽화나 백제의 불상, 고려 불화와 조선 회화 같은 한국 미술사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전통미술의 해석 안에서 답을 찾아냈죠." 단번에 정답을 찾은 것은 아니다. 20대 시절 15개월의 월남전 참전을 계기로 이데올로기의 양극단에서 벗어나야 내면의 자유에 이른다는 결론으로 추상화를 시작했다. "전쟁을 주제로 한 고야, 피카소, 페르낭 레제의 그림을 보세요. 전쟁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죽기 전 마지막 한마디는 단순하고 단호하죠. 죽음에 대한 생각은 그림을 단순하게 만들어 20년간 흑백작업을 지속했습니다." 오수환의 추상화는 단순하나 정적(靜的)이지 않다. 그의 자유로운 붓질은 미래지향적이고 진취적이다. "내가 추구하는 한국의 전통미술과 노장사상, 불교, 주역은 공통적으로 역동성을 지향합니다. 회화(繪畵)는 끝없이 새로운 대상을 만나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생동감 있는 모습으로 관람객과 소통해야 합니다. 결국 그림은 삶에 대한 것이고, 현실에 어떤 모습을 제시해 줄 것인가 고민합니다." 작가는 한 점의 캔버스 유화를 완성하기 이전에 수십 장의 드로잉을 그린다. 생각의 과정이 담긴 드로잉만 따로 모아 별도 전시를 열었을 정도다. "드로잉을 미리 해뒀기 때문에 본격 작업은 새가 먹이를 채듯 한 호흡으로 해치웁니다. 우연성이나 무의식을 표현하려는데 붓질을 머뭇거리다 보면 의도적 요소가 가미되고 작위적일 수 있거든요. 생동감과 신체성(몸짓의 흔적)을 보여주는 감성적ㆍ충동적인 작품이니 이성적인 미니멀리즘 추상화와는 맥락이 다릅니다." 80~90년대 먹색 작업은 2000년대에 접어들며 고운 색조를 띠게 된다. 2007년 프랑스 매그화랑의 초대로 생 폴의 작업실에서 한동안 머물렀는데 마티스와 르누아르가 여생을 보낸 지중해의 분위기가 그의 색채 감각을 자극했다. 외국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그가 찾아낸 것은 전통 오방색. 해외 컬렉터들은 더욱 열광했고 그는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에 확고한 지지층을 확보했다. 프랑스의 유명 컬렉터 가문인 매그재단은 올 하반기 니스의 매그미술관과 파리의 매그화랑 양쪽에서 오수환의 동시 개인전을 추진 중이다. 또 10월에는 미국 필라델피아 하버포드 대학이 마련한 한국관련 문화 행사에 한국현대미술가 대표로 초청받아 4인전을 연다. 당장 8일부터는 뉴욕 첼시 소재 가나아트 뉴욕에서 개인전이 시작된다. "올해는 해외 전시가 많습니다. 나이가 들어 생각은 예스럽다 하더라도 표현은 현대미술의 변화에 균형을 맞춰줘야 하거든요. 변화된 모습으로 국내 개인전은 좀 천천히 보여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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