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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산책] 고향의 샘


아침을 먹는데 TV 화면에 샘이 방영되고 있다. 두레박이 굳이 필요 없는 샘이었고 왕돌들을 테에 둘렀는데 높이가 바닥에서 두어 뼘도 안돼 보인다. 여기가 동네 한가운데라고 한 노인이 입을 떼는 장면과 겹치면서 TV 속 샘은 주변의 나뭇가지며 빈 까치집, 차양에 잘린 하늘 등을 한가득 담아내고 있었다.

그 순간 내 눈앞에 고향의 샘이 떠오른다. 크기가 저 샘의 서너 배는 될 고향의 우물이다. 동네로 들어서는 맨 앞자리에 있어서 '앞샘'이고 물을 바가지로 퍼먹을 수 있어서 '바가지 샘'이라고도 불렸다. 산 밑자락에 붙었을지라도 물맛 좋기로 소문이 나서 택시기사들도 척척 알아들었고 우체부 아저씨가 목을 축이던 곳이었다.

마을공동체 지켜온 고향 우물 그리워

너비는 세 발 가옷을 웃돌았는데 깊이도 그 못지않았고 머리엔 양철지붕을 했다. 샘 바닥에 염소 머리만한 물구멍이 있어서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철철 넘쳐났다. 울타리 안에 개인 샘을 판 집들도 이 물을 길어 먹다시피 했고 무더위가 밤까지 진을 치면 샘은 품을 열어 청년들의 알몸을 받아냈다. 여름 땀띠도 이 물로 등목 한 번 하면 맥을 못 췄다. 동네 소문이란 소문은 여기로 모여들었고 여기서 퍼져나갔으니 이곳은 동네의 눈이었고 귀였으며 입이었다. 무슨 얘기든 받아들였고 다독여줬다. 야반도주했다가 고개 숙이고 다시 동네에 들어섰을 때도 군말 없이 가슴을 열었던 곳이다. 어느 날 무식한 굴착기가 앞샘의 귀를 막고 눈을 감겨버리며 젖줄을 떼어버리기 전까지 그랬다.

여기서 중국 장예모 감독의 영화 '집으로 가는 길'도 오버랩돼 떠오른다. 부모님 세대의 사랑을 그린 이 영화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사랑을 표현하는 데 쓰인 중국만의 그 어떤 것이었다. 화면에 가득 찼던 삼합둔의 풍정을 끼고 구닥다리 베틀에 앉아 수의를 짜는 모습, 바싹 깨진 사기대접을 맞추어 놓고 끈으로 고정시킨 뒤 거멀못처럼 생긴 작은 못을 박아서 물 한 방울 안 새게 접합하는 과정, 눈보라를 맞받아치며 길을 트던 장례행렬 등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중국도 결국 자본과 그것이 이룩한 문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지점에서 이 영화가 촬영되지는 않았겠지만 어째서 장예모 감독이 이 작품을 만들었는지 짐작하게는 만드는 대목대목들이었다. 서구 문명이 중국인들의 미래에 어떤 규모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예상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지는 못했을지라도 장예모는 중국인들이 그렇게 견디어온 '과거'로부터 새 '미래'가 시작된다는 점을 선명하게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사람의 체취와 문제의식이 한데 채색된 이 토막들이 내 몸에 적힌 기억을 충동질한 것일까. 산업시대의 뒷전에 몰린 배꼽 떨어진 삽을 주워들고 앞샘처럼 아예 묻히거나 바닥에 팽개쳐진 체취를 기억하는 것은 우리의 미래를 확인하는 쓰라린 행위라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문명에 소외되다 못해 아예 콘크리트에 묻혀버린 고향의 샘이지만 거기서 나는 커왔고 그 경험으로부터 내 미래도 시작됐을 것이다. 또 문명의 이중적 속성을 알면서도 그것을 즐기는 현대사회의 기형적 구조를 아우르고 싶은 애정도 거기서 싹텄을 것이다.

경제논리 아닌 현대사회 가치 키워야

개인의 비밀이 없어지다시피 하고 있으며 무엇이 의미 있고 가치가 있는 것인지 그 기준조차 모호해지고 있는 이 풍요로운 시절에 꼬질꼬질 때가 묻은 앞샘과 같은 옛 이미지를 끄집어내는 내 행동은 계절을 까먹고 펑펑 쏟아지던 올해 봄눈의 역주행 같은 것일까. 김수영 시인이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것이라도 좋다'라고 했던 시 구절은 과연 정확하게 어떤 뜻일까. 이런 질문들을 던지면서, 뭐든 파헤치고 허물고 짓는 경제논리 앞에 무너져 내리던 고향 샘 속에 간직된 여성성을 우리가 정신이 흐려지기 전까지 존중해줘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다잡아본다. 돈이 주인처럼 행세하는 현대사회에서 사람이 목적이었던 시절을 무릎맞춤하듯 삶의 한복판에 끌어당기는 한 세상은 아직도 희망적인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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